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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힘쓰는 기도 (살전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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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이 드리던 기도를 본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살아계신 주님을 실제적으로 눈으로 보듯이 만나는 경험들 가졌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행전이나 서신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노라면 초대교회는 기도의 차원에서 주님께 두 가지를 물려받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면 분명히 응답해 주신다는 확실성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주의 재림에 대한 대단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드리는 기도는 자신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문 제와 육체로 거하여 사는 동안 육체에 필요한 것들만을 구하는 기도로 끝내지 않 고 기도의 촛점을 주의 재림하실 일에 맞추어 나가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는 주 님 재림만을 학수고대하는 하늘만 쳐다보는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주님 재림 하실 때 구원의 반열에서 이탈되어 버릴만큼 자신의 믿음이 안일하고 타락된 모 습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위해 비는 갈망하는 기도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후안까를로즈 오르띠 즈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대부분의 기도는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되어지는 기도가 대단히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섬에서 목회를 할 때에 많은 우편물들이 왔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편물 가운데는 귀하게 취급되어져야 할 우편물과 쓸모없는 것들 이 있어서 속 내용을 뜯어 보지도 않고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기도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와는 상관없이 일 방적으로 나의 육체생활에 필요한 것들만을 구하는 기도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하 늘나라에서 잡동사니의 우편물과 같은 취급은 당하지 않을까요 다시한번 생각해 고 점검해 보아야 할 일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렇치만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나서도 아 멘 중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자신있게 주의 재림을 맞이할만큼 확신에 찬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가 기독교 역사의 일부분이고 신앙생활하는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 지만 기독교 역사를 추진해 나가는 힘과 나 자신을 그리스도 앞에 우뚝 서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 기도하는 생활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겟세마네 동산의 기 도로 얻으셨습니다. 120명의 주의 제자들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낸 것도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므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 었습니다. 바울이 전세계를 좀 더 빨리 복음화시키는 전기를 마련한 것도 기도 가운데서 허락받았습니다. 아시아로 갈려고 선교계획을 세워 행하던 그가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에서 우리를 건너와 도우라는 환상을 기도 가운데 허락받아 나아가므로 훗날에 유럽의 발전과 경제적인 힘으로 선교의 문이 더 빨리 활짝 열 릴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문명이 기도를 거부할 수도 없고 교회 안에서 기도는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나 큰 은총이지만 말씀을 떠난 기도는 신비주의자들을 생산해내고 맙니다. 분명 말씀 안에서의 기 도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만들지만 말씀에 바로 선 신앙이 아닌 가운데 기도만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닌 개인이 체험한 기도 의 경험을 중시하여 신비주의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다미선교회의 시한부종말론을 추종하는 광신자들을 만들어 내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생겨나도록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샤머니 즘이라는 미신적 신앙이 오래 전부터 백성들의 마음과 생각과 영을 지배해 왔습 니다. 샤머니즘은 경전이 필요없습니다. 감정과 신비하게 나타나는 체험만 있으 면 됩니다. 그런 신앙관이 기독교인의 가슴 즉 의식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습 니다. 그들은 말씀을 인정하면서도 체험을 중심으로 합니다. 성경 말씀을 제대로 배운다는 의미를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신 기도를 많이하여 많은 체험을 해 나갑니다. 결국 말씀에는 서있지 못하므로 말씀과 거리가 먼 신비적인 체험만이 있게 되고 감정과 신비적 체험이 말씀의 권위위에 서게 됩니다. 그 까닭에 10월 28일을 주님의 공중재림으 로 계시받았다는 하군과 어떤 신도의 주장과 이장림의 주장에 미혹이 되어 말씀 보다는 잘못된 신앙체험을 믿고 재림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정통교회는 아무리 성경에는 그날과 그 시를 알 수 없는 오로지 하나 님만이 아시는 비밀인 것을 외쳐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말씀을 배워도 자신들의 계시가 성경적인 것처럼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인용한 것 뿐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고린도교회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말씀의 뿌리는 내리지 아니하고 많은 기도를 드려서 은사와 성령충만은 받았으나 오히려 교회를 어지럽히는 결과 를 빚어서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은사의 활용과 개인신앙의 건덕을 위하여 성 령충만한 생활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야 하느냐를 가르쳐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의 역사가 진행되어 오는 동안 수없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3-10세기에서는 수도원주의가 발생하여 기독교인들은 마치 속세를 떠난 불교의 승려들처럼 산속으로 들어가 고행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산속에 서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고 기도의 경 험을 통한 신앙을 가지게 되므로 체험주의 신앙 즉 몬탄니즘 또는 모나트리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신비주의가 생겨났습니다. 그 후 교회의 역사가 계 속 흘러가는 동안 종교개혁 전에는 청교도주의가 파생됩니다.

그들은 말씀에 굳게 선 믿음을 가지고 항상 기도에 힘쓰는 경건한 그리스도인 의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기본적인 지식을 무 시하고 그저 엎드려 기도 많이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를 병행 시키는 신앙생활을 할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말씀없이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기복신앙의 일종으로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복 달라는대로 주시는 그런 분으로 비하시킬 뿐만 아니라 우상 앞에 복 달라고 빌던 미신적인 신앙으로 복을 비는 대상만 하 나님으로 바꾼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정.의를 가지신 분으로서 인 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고자 할 때에 박수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 안에서의 기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위대한 기술이요,하나님 을 향한 믿음의 상승행위이며, 삼상1:15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 영혼을 쏟아놓는 종교적 행위이며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하듯(시42:1)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들어 올리는 경건의 능력이며(시25:1) 죄악된 삶 속에서 우리의 요새시요 피난처 시요 구원자이신 여호와께 피함이 되는 것임을 깊게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기도원주일 저녁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본문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할 것인지 기도에 대하여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항상 힘쓰는 기도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고라는 낱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기도 를 항상이라는 낱말은 테 프로슈케(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탄원을 의미하고 힘쓰고라는 헬라어 낱말은 프로스카르테레이테 ( )로 끈질기게 메달리는, 지속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탄원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열심과 지속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 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교훈을 비유로 들려주신 눅 18장의 불의한 재판관 과 과부의 탄원속에서 항상 낙망치 아니하고 재판관을 찾아가 억울한 일을 해결 받은 상태로 나아가는 기도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눅 11장에서 모범기도인 주기도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5-13에서 밤 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하여 떡 세덩이를 빌리는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지속적으로 탄원하는 친구를 향하여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줄 수 없을지라도 강청함을 인하여 떡 세덩이를 자는 식구를 다 깨워가며 내어 주었다 고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할 때에 뜨거운 열심으로 기도는 하지만 그러한 기도를 지 속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기도는 항상 힘쓰는 기도라고 말할 수 없으 며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되고 맙니다.

우리가 이런 점을 감안할 때에 기도원은 더욱 필요하다는 절실함을 느끼게 됩 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 가운데는 절박함과 그리고 그 절박함을 해결받기 위하 여 전적으로 메어 달리며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하게 되는데 바 로 이 때에 기도원이 우리에게 큰 몫을 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집에서 금식기도하는 일은 대단히 불편하고 번거롭고 또 시험받기에 알맞은 상태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폭적으로 기도에만 메어달려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가사일에 시달리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되어서 기도의 정성과 열심도 내지 못하고 그저 형식만 갗 추는 기도를 드릴 때가 많고 그것도 하지 못하여 기도를 중간에 멈춰버리는 일들 이 있게 됩니다. 이럴 때에 우리가 기도의 동산에 올라가 한적하게 가사의 모든 일을 뒤로 밀쳐 버리고 하나님께 뜨겁게 지속적으로 전폭적으로 내어 맡기는 부 르짖는 기도를 마음껏 하게 되는 곳이 기도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전에 서 하는 기도보다 기도원에서 하는 기도가 응답이 빠르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도원에서 하는 기도가 뜨겁고 응답이 빠른 것같은 이유는 기도에만 전념하기에 좋은 여건이 형성되어 응답을 받기에 좋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둘째, 감사함으로 깨어있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할 때에 깨어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의미처럼 느껴지기 쉽습 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깨어있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가장 좋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두 종류의 잠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 습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향하여 육체가 잠자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지 않는 자를 향하여 영적인 잠을 자는 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는 상태가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죽은 자만 못하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영으로 깨어있지 않는 자에게는 여러가 지 화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13:24-30 절에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 여 심지 않은 가라지가 나타났는데 그 가라지는 농부가 잠을 잘 때에 원수들이 덧뿌리고 갔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농부에게는 그 가라지 때문에 염려가 생겨났습니다. 추수전에 가라지를 뽑아버 릴려고 주인에게 일렀더니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니 추 수때까지 가만 놔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 쉬는 죄를 범하면 그것이 우 리에게 기도쉬는 죄만 짓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원수들이 덧뿌려서 생긴 염려거리가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갑자기 또는 이상스럽게 원인모를 염려거리가 생겨났습니까 하나님께 엎드리십시오. 기도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깨어있지 않은 자는 살아있 긴 하지만 감각적으로는 거의 죽은 자와 방불합니다. 결국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 으로 깨어있지 못하여 둔한 영혼이 되며 둔한 영혼은 생활 속에 임한 일들이 왜 임하였는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영적인 진단을 내릴 수 없는 무지 속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GOP부대라고 일컬어지는 최전방 중서부 전선에서 근무를 했 습니다. 그런데 제가 최전방으로 오기 4,5년 전까지만 해도 철책으로 휴전선이 된 것이 아니라 목책(나무로 된 담장의 일종)으로서 누구라도 쉽게 넘나들 수 있 는 낮은 울타리였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군대가 밤에 목 자르는 기구를 가지고 넘어와서 아군의 목을 자주 잘라가는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때인줄 아십 니까 초병이 잠이 들었을 때 뿐입니다.

또 한번의 일입니다. 최전방에서의 근무기간이 끝나고 FEBA지역으로 불리워지 는 최전방 지역의 바로 뒷쪽에 와서 군생활을 하는데 수면병에 걸려있는 일병이 강의 시간에 조는 일이 많이 있어서 고참에게 늘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일 병은 고참에게 나는 일종의 수면병이 있어서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고 참은 믿어주지를 않았습니다. 일부러 자고서는 그것을 수면병이라고 핑게를 댄다 며 더 얻어맞기도 하고 조는 것때문에 소대 전체가 단체기합을 받는 경우가 허다 했습니다.

79년 12월 31일 저녁이 되었습니다. 저는 군인교회에서 군종병으로서 송구영신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군종과로 전화가 왔습니다. 받아보니 일병 이 원한을 품고 고참을 살해하기 위하여 안전사고를 냈다는 것입니다. 점호가 끝 나고 취침을 하려고 하는데 수면병에 걸린 일병은 밖에 나가 동초를 진지에서 서 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일병은 자기와 함께 보초를 서고 있는 병장에게 탈영을 하 면 어떻게 군법으로 처리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고참은 그런 말은 입으로라도 해 서는 안된다고 웃으면서 타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병은 실탄을 총에 장진하고 고참을 향해 총구를 겨냥하며 인 질을 삼고 도망가거나 자기의 말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죽인다며 앞장세워 내무반 으로 끌고 갑니다.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반항도 못하고 총을 땅에 버리고 손을 든 상태로 내무반을 향해 갑니다. 그 때에 잠자기 직전에 변소에 갔다가 나오는 병력을 만났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소리치자,일병은 그들을 향해 총을 쏘았습니 다. 부상을 입고 쓰러진 것을 보고 그 틈을 이용해 인질로 끌려가는 고참은 도망 을 쳤습니다.

내무반 가까이 왔습니다. 마침 주번사관인 장교가 세면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 교에게도 총을 쏘았습니다. 장교도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 습니다. 이때 신참인 초번 불침번이 비명 소리를 듣고 너무 무서워 내무반 문을 잠그지 않고 다른 내무반으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그러자 수면병에 걸린 일병 은 내무반으로 들어와 자기를 괴롭힌 고참이 자고 있는 자리를 향해 자동으로 총 을 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자기의 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군인의 침상은 항 상 자기의 자리가 있어서 그 자리에 눕습니다. 누가 죽었겠습니까 총에 맞아 죽은 자는 고참이 아니라 제일 졸병이었습니다. 총소리와 비명에 놀 란 군인들은 벌떡 일어나 관물대 밑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일어나 피신을 했는 데 제일 졸병이 너무 깊은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졸병이 수면 병에 걸린 일병을 괴롭힌 고참 바로 옆자리여서 그가 고참인 줄로 알고 죽은 것 을 확인한 자신은 자살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군대가 그렇다고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처구니없게 죽은 병사 는 바로 오늘날 깨어있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 자신입니다. 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어처구니없이 사탄이 쏘는 불화살을 맞고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불화살을 맞습니까 기도로 깨어있지 않은 영적인 잠을 자는 성도들입니다.

셋째,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란 누구를 말하는 것 일까요 디모데(1:1)와 골로새교회의 설립자인 에바브라(4:12)를 가르키고 있습 니다. 이들은 바울의 동역자들입니다. 바울은 자기 개인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개인과 목 회자로서의 바울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은 의미상으로 분명히 다릅니다.

왜 그런 해석이 가능합니까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씀이 이를 시사하기 때문 입니다. 그들은 모두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들이요, 목양하고 있는 사역자들 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도할 문을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게 해달라는 말씀이 더욱 밑바침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도의 문을 열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한 다는 것은 단순히 전도를 가르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4절에 가면 마땅히 할 말 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합니다. 마땅히 할 말이란 복음의 선포로서 설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입술은 복음선포를 통해 죽어가 는 영혼을 살리는 설교를 하고 싶은데 감옥에 있으므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종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의 종은 마땅히 해 야 할 말인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를 외칠 수 있게 되고 그 말씀은 주의 종을 위 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회는 새벽기도하는 인구와 철야기도하는 성도가 줄어들었 습니다. 이에 대해 어떤 분은 분석하기를 입시생이 아마도 작년보다 적기때문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럴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입시생이 적으면 기도하는 사람도 적어져야 하는 것입니까 기도는 입시철에만 해야 합니까 본문 에 보면 기도는 항상 해야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도해야 할 제목이 없습니까 주의 종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주의 종을 위할 기도라면 365 일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고 만족하 지 말고 성도 개개인들이 세월을 아껴가면서 기회있는 대로 각 사람들에게 복음 을 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5-6) 이 복음전파는 성도들이 항상 기도해 야 할 제목 중에 상제목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은혜 가운데서 전할 것을 당부 합니다. 은혜 가운데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기도로 영적인 힘을 얻 어서 하는 길일 것입니다.

물론 6절의 말씀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언어생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여기 의 언어는 일상생활의 언어습관과 공적인 선포를 다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언어는 항상 은혜 가운데서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금으로 고 루게 함과 같이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소금으로 고루게 함이란 재치와 지혜로움 을 말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공적인 선포도 포함한다는 것은 전도를 위한 복음전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 의 뜻을 아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 뿐입니다. 기도란 밤의 어둠을 깨는 새벽과 같 은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와 사도들의 기도로 교회가 반석위에 세워졌습니다.

어거스틴의 기도로 기독교가 로마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루터와 칼빈, 즈빙 글리와 같은 분들의 기도로 종교개혁이 이루어져 오늘날의 개신교가 탄생되었습 니다. 죠지 휫필드나 요한 웨슬레, 무디나 에드워드 같은 분들의 기도로 타락되 어가는 교회가 영광스러운 영적 회복을 하였습니다.

기도란 특별한 위기에서 우연적으로 나오는 신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로서 우리들의 호흡과 같으므로 언제나 우 리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항상 기도하는 자는 자기만이 아는 어떤 장소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어떤 자는 성전이 기도하는 장소가 될 수 있고 며칠 간씩 기도만 전념하기 원하는 자는 그 장소가 기도원이 되는 것입 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말씀의 간단한 요약은 힘써 기도하는 중에서 간구와 감사 와 그리고 중보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도보다 영혼을 강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내적인 변화를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인정한다면 항상 힘쓰 는 기도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원을 갖고자 원하는 소원을 몸된 교회에 허락하신 하나님 앞에 하 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장소의 기도원부지를 허락받기 위해 더욱 많은 기도를 하 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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