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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과 예수의 만남 (행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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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그 인생을 결정합니다.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냐로 조국이 결정됩니다.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냐가 그의 인생과 인격과 성품을 결정합니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가 그 한 사람의 가정을 결정합니다. 어떤 신을 만나느냐가 그 사람의 영원을 결정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느냐 만나지 않느냐는 우리 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분기점을 이룹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그 청년은 오늘 그가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울과 예수의 만남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 최대의 사건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면 사울이 바울이 된 그 순간부터 이방의 세계는, 복음의 세계는 이방으로 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을 열게 한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사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 그의 생애를 성경에 나온대로 요약을 해 보면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특별히 그는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에서 그가 자라났습니다. 그걸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소에서 성장을 했는데 바로 헬라문화와 철학에 익숙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가졌다는 것을 보면 로마의! 법과 정치에 정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당대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지성인이 갖추어야 할 것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와 헬라의 철학과 로마의 법을 다 익숙한 그런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특별히 그는 종교 전문직에 있었을뿐만 아니라 세상 전문직에도 종사했던 경험이 있는 직업에 경험이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울이라는 이 청년은 무식하고 맹목적인 예수교 핍박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예수교를 핍박하거나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보면 비지성적인 사람이거나 무식한 사람들이 많은데 사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자라온 배경과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생애를 정리해 보면은 그에게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확신과 남달리 역사 철학을 가진 지성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지성인은 나약합니다. 일반적으로 지성인들은 행동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성인을 사색하는 지성인이다라는 이런 멋진 말을 하나 붙여 주는데 그 말은 행동력이 없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색하는 지성인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 이었습니다. 그는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을 했고 소위 프락시스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그의 삶을 희생할 줄도 알았고 손해 볼 줄도 알았습니다. 누가 월급을 주거나 누가 지위를 주었기 때문에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의 신념 때문에 행동했던 사람입니다. 9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1절과 2절 시작--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신앙에 확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남이 시켜서 하면 남이 시킨 만큼만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알아서 하면 그 이상을 합니다. 신앙이란 누가 시켜서 믿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서 믿는 것이며, 확신이 있기 때문에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9장 1,2절의 사울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대한 아주 나쁜 인상과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예수쟁이들 밥맛도 없습니다. 아주 재미가 없습니다. 아주 인상이 나쁩니다. 굉장히 감정적으로 싫다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위협과 살기가 있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얼마나 이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감정의 문제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는 이만큼 나쁜 선입관을 갖고 !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2절을 보면은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져다가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자기의 소신껏 행동하는 행동파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사울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회 개혁가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운동권 사회 개혁에 관심이 많고 행동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토론도 해보고 대화도 많이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갖지 않은 놀라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주위환경에서 가정에서 환영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환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 나이에 교도소까지 들어가면서 그 행동을 합니다. 또 불법적인 많은 과격한 행동을 하는데 어 그분들과 교제하면서 생각해 보는 것은 또 새로운 놀라운 부분이 그 분들에게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본 이런 분들은 대충 이런 3가지 요소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권의 사람이나 사회 개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 헁동 하지 않는 지성. 행동하지 않는 신앙을 몹시 경멸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해야지 행동하지 않는 것은 비겁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여 비겁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행동하지 않는 동료 교수들이나 지성인들을 마음속으로 무척 경멸하고 있는 것을 일반적으로 봅니다. 두 번째는 이들의 생각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 자신들의 지성. 자신들의 양심.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아주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손해를 보지만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나는 이런 행동을 한다고 그들은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고 고난을 겪는 것을 마치 신앙의 클라이막스처럼 생각하고 신앙의 엑스타시를 거기서 느끼는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굶주리고 매를 맞고 쫓겨 다니는 그런 고통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자화상이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들과 만나서 얻은 인상은 그 행동 때문에 일어나야 했던 불법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을 쓰게 됩니다. 여러 가지 투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법이나 폭력이나 투쟁은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적 과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사실은 당연히 그러한 오류는 용서받아야 할 오류라고 떳떳하게 생각을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 이런 행동을 하는 지성인들은 아무 누구도 말릴 수가 없고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부모도 학교도 어떤 사회도 그렇게 믿고 행동하고 그런 성자의 모습을 자기 스스로 갖기 때문에 아무 누구도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또 정죄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행동하지 않는 지성인들은 비록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행동하는 지성인들에 대해서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먹힙니다. 이쪽에는 별로 할 말이 없고, 저쪽에는 말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비겁하지 않느냐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비겁한 거 아니냐 라는 거예요.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울의 모습과 이런 모습과 굉장히 비슷한, 아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시작-이런 분들의 사고를 과연 누가 바꿀 수가 있을까요 대부분 이런 분들은 나이 60이 넘어서야 자기를 반성합니다. 40대 50대까지 그런 반성의 기미를 일반적 막보이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주장과 의견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행동을 하는 지성인들을 과연 누가 누가 설득을 할수 있을까요 사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가장 옳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스데반의 옷을 발 앞에 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울에게 어느날 갑자기 예수님이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기 보면은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췄다.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사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얼마나 그리고 엄청난 사건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을 가리켜 오순절 사건 이후에 최고의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잘 보십시오. 3절에 보면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는데 홀연히 라는 말이 나옵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왔다고 그랬습니다. 4절을 보면은 땅에 엎드려 들으매 무엇이 들렸습니까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서 비슷한 소리죠 오순절날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이 임할 때 홀연히 하늘로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를. 아주 비슷한 속성이예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한 것은 120명 집단 공동체에 임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임재, 동시적인 임재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한 개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순절날 일어날 수 있고. 120명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만 사도바울에게도 개인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러 가는 도중에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은 오늘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나타날 수도 있고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건들이 여러분의 생애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아무 누구도 내 생애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꿈이 있고 이데올로기가 있고 이념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 혁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구나 개입할 수가 없어요. 돈을 주고 산 사람은 쉽게 설득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철학이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쉽게 못바꿔요. 이 속에 예수님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땅에 엎드렸을 때 사울에게 들린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소리입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라는 말을 두 번 불렀습니다. 이것은 사울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입니다. 우리는 보통 부를 때 아무개야! 하면서 이름을 부릅니다. 그냥 부를때. 그러나 특별한 부탁과 어떤 특별한 관심이 있을때는 이름을 두 번 부릅니다. 사울아! 사울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나는 우리 주님이 용조야! 용조야! 이렇게 두 번 부르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주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꼭 두 번 부를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우리 주님은 우리를 어떤 일관계나 용무관계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어떤 특별한 미션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그러셨는데 이 말씀은 가만히 묵상해 보면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뜻은 사울아! 사울아! 나는 그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뜻이 이 안에 있습니다. 부부싸움 해 보신분들 계시죠. 안 해 보신분들 있으시겠어요 부부싸움을 하면 대개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말이 있어요. 여보 왜 그래 왜 그리 나를 못살게 굴고 미워해 이런 말을 던지는 데 이 말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내가 당신한테 시집와서 당신한테 당하고 시부모한테 당하고 시동생한테 당하고. 이렇게 당하고 저렇게 당하고 다 참고 수고했는데 당신 나한테 이럴 수 가 있냐고 이러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말이. 당신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희생을 했는데.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런 뜻이 있는데. 바로 이런 의미가 있는거예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또 하나의 뜻이 이 말씀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너는 왜 나의 교회를 핍박했느냐 라고 하지 않았아요. 너는 왜 나의 제자들을 핍박했느냐라고 하지 않았어요.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실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대면한 적도 없고 핍박 한 적도 없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가서 흩었습니다. 가서 잡아오고 사울은 오늘 보면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다메섹까지 갔고 그들을 위협했고. 그들에 대해 살기 등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울에게 예수님은 너는 왜 내 제자를 핍박했느냐 너는 왜 내 교회를 핍박했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왜 나를 핍박했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곧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를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라는 예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을 보면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먼저 미워한 줄 알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핍박하는 대신에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느니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본문에서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33년동안 우리와 같이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40일만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만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오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과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음주에 무슨 일로 죽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면 아마 교회에서 성도님들이 교회장을 치루어 주시겠지요 다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그러면 다음주에 여러분은 저의 설교를 들으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는 계속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러나 나의 설교는 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 동안에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없는데 그분의 음성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육체로 보이지 않지만 그분은 분명히 살아 계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고 그분은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러 2000년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팔레스틴으로 우리가 성지순례가지만 가봐야 예수님은 못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지금 찾아오시는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우리를 보고계시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분의 임재는, 예수님의 임재는 성령님의 임재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성령의 임재의 본질을 찾을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란 무엇입니까 오순절날 성령님의 임재는 무엇입니까 사울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는 곧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을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는 뜨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사들과 능력들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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