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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과 핍박자들의 만남 (행 09: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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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은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이 였습니다. 사도행전 4장 15절의 말씀대로 사울은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그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한 나의 그릇이였습니다. 그분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특이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둘려고 다메섹으로 가려는 중에 그는 성령의 빛을 받아 쓰러지게 됩니다. 바로 쓰러지는 그때 그는 두 번의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첫번째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것이였습니다. 두번째 음성은 바로 내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런 음성을 듣습니다. 사울은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울이 그 음성을 듣고 일어날려고 하니깐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는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그 받은 충격 속에 있게 됩니다. 이때 성령님께서 또 한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는데 그 사람은 다메섹에 살고 있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라고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또한 사울을 만나게 위해 존재했던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 사람이 나타나는 순간이 아주 짧은 단순한 사건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사울을 만난 그 사건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그런 계기와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삶이 숨겨져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제한 되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앞에 경건하게 기도로 준비하고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의 만남을 통하여 세계를 변화 시키는 어떤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를 만나서 안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성령이 강하게 임하게 되었고 사울은 그때 성령 체험을하게 되고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에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놀랍게도 그 눈을 덮고 있는 비늘같은 것이 떨어져서 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런 기적들과 역사들이 우리 성도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막고있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우리의 마음을 막고 주님께 가는 것들을 막고있는 것들이 바로 성령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전부 다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음식을 다시 먹게 되었습니다. 건강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이렇게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예수님께서 사울의 생애에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개입된 역사는 새로운 역사 입니다. 예수님이 개입된 개인은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개입한 가정은 변화된 가정입니다. 교회라고 다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 별로 주인이 안되는 계신지 안계신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건물이 있습니다. 사람은 많이 모이나 예수님이 안보이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교회안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시면 개입하게 되시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받은 사울은 그의 메세지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즉시 변화 받은 후에 각 회당에 돌아다니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하기 시작을 합니다. 이것은 사울이 꿈에도 상상해보지 못한 일이였습니다. 왜냐하면 몇일 전만해도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일려고 했던 사람이였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사람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장 파렴치하고 가장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울이 자기 자신의 이유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지금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23절 시작-
예. '여러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여기서 보면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한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사울은 예수를 만났습니다. 사울은 아나니아를 만났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울은 핍박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울이 이 핍박자들을 만나기 전에 오늘 이 사도행전을 기록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 1장17절에 그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를 만난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6절 17절에 보면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것이 아니라 아라비아로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들이 갈라디아서 1장 16절17절을 같이 찾아서 읽어 보도록하겠습니다. 시작-예수를 믿고 난 사울은 먼저 아라비아로 갑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다시 돌아오게됩니다. 다메섹에 돌아와서 핍박을 받게되는 일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는 아라비아로 가는 시간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이 예수를 만난 사건은 그에게 굉장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보통 사건이 아니였다는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엄청난 사건을 재정리하고 해석하고 그리고 이것을 확인하는 그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시간을 갖기 위해서 사울은 두 가지 충고를 거부했습니다. 첫째는 혈육과 의논하는것을 거부했습니다.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 그때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을 내 안에 오실 바로 그때 나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부모 형제보다 날 더 이해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를 애기를 배서 해산을 통하여 세상에 태어나서 어릴때부터 먹기고 재우고 지금까지 나를 키웠다면 세상에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부모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중요한 일들을 부모님들이나 형제들하고 의논해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 제일 섭섭한게 중요한 일을 다름 사람이랑 의논했을때 입니다. 갑자기 어떤 여자를 대리고 와가지고 결혼하겠다고 하면 부모님들이 얼마나 쇼크를 먹겠습니까 부모하고 이야기하지 않고 사업을하고 공부를하러 떠난다든지 할때 부모님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하고 의논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하고 의논할 일이 있습니다. 근데 오늘 사울을 보면은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합니다. 또 두 번째 충고를 거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먼저 된 사도들과도 얘기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영적인 일이라면 뭐 혈육은 그만 둘 지라고 그래도 예수님의 열두 사도 초대교회를 일으켰던 예루살렘에 있는 그 사도들과 의논하고 충고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은 이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혈육과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먼저 된 사도들과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결코 교만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이런 사람들은 교만하거나 아주 고집이 세거나 자기 개성이 강할때 이렇게 합니다만은 사울의 경우는 자신 만만해서 그런것도 아니고 교만해서 그런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생애에 예수 그리스도가 개입한 이 엄청난 사건은 그가 직접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과 1:1로 만나서 그 문제를 확인하고 결정할려고 했던 것이 였습니다. 어떤 사람과 의논할 일이 있지만 정말 어떤 문제를 하나님과 관계된 어떤 문제는 기도하면서 금식하면서 사람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직접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이 필요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인 사건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사울이 아라비아로 갔는데 왜 갔으며, 그곳에 가서 무엇을 했을까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전혀 거기에 대한 언급이 없기때문입니다. 바울의 여정을 보면 아라비아로 가있는 그 연수는 우리가 계산하기에 3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 시간동안 그가 무엇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사람 추측대로 성령을 받고 능력을 받아서 사울이 전도하러 그곳까지 갔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성경 여러곳을 찾아보면 발견하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이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위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훈련받기 위하여 그는 그곳에 간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기 위하여 30년동안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공생애 사역이 시작되면서도 예수님은 40일 동안 마귀와 싸우기 위하여 광야에 가서 금식하며 그런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울이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신하기 위하여 이런 시간들이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들은 은혜를 받으면 무엇이든 행동으로 할려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몹시 위험한 것입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도 일을 보면 기다리지 못하고 뛰어드는 그런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면은 언제나 실패하게 됩니다. 준비된 사람 없이 시작하게 되면은 다시 일한 만큼 손해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 와야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보다 더 중요한것은 준비 입니다.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준비입니다. 준비가 얼마만큼 되었냐에 따라서 그 열매가 그만큼 맺어지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무리 시간이 결려도 주님과 깊이 교제를 하고 준비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이 맺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뜻을 모르고 무슨일을 할수 있겠습니까 주인의 뜻을 모르고 무엇이든 한들 그것이 결국 일은 많이 되었을지라도 주인의 뜻과 맞지 않는다면은 그것은 오히려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인의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일를 생각는 경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낭비처럼 보이는 시간 열매가 없어 보이는 시간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간 그렇지만 바로 그 시간이 사울이 바울이 되는 시간이요 물이 포도주가 되는 시간이요 하나의 알이 새가 되어 가는 그런 시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울의 숨겨진 이 스토리를 통하여 얼마나 이런 시간이 우리 개인에 교회적으로 필요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의 경우에서 비춰 보면은 부름을 받아 사명을 사람들은 선교지나 사역지에 나가기 전에 최소한 1-3년 정도는 이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온누리교회라는 의미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이 온누리 교회에서 은혜를 받았는데 그리고 사명을 받고 부름을 받고 이제 선교지로 갈 사람들고 계시고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해보고 싶은 분들이 많이 생길것입니다. 오늘 그분들에게 성경은 이 메세지를 여러분에게 주는 것입니다. 바로 가지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안에 깊이 빠지라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조우리 선교사님을 파송하는 예배를 들렸습니다. 제 그 자매를 보면서 배운게 있습니다. 그 자매는 IBM에 다녔던 자매였습니다. 은혜를 받고 부름을 받고 그가 선교지로 가기 위해서 사표를 쓰고 신학교를 들어 갔다가 일본으로 선교사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3년 온누리 교회에 꾸준히 계속 나왔습니다. 그 자매가 앉졌던 곳이 저기 저자리 근처었습니다. 그는 모든 예배를 참석했습니다. 훈련원에가서 하루종일 훈련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서 일을 하는게 아닙니다. 곳곳에 기도 집회에 다 쫓아 다닙니다. 철야기도 기도, 모든 은혜가 있는 곳은 다 다닙니다. 그것을 3년이나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니깐 일본으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자매가 한것이 사도바울이 한것처럼 한것을 저는 기억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5절에 보면은 이 아라비아란 말이 또 한번 나오는데 아라비아에 시내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갈의 얘기를 여기서 하고 있습니다. 자유하는 여자와 종의 여자의 두 얘기를 비교하면서 이 말씀을 하고있습니다. 아라비아의 시내산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은 사울이 분명히 그 시내산에 가지 않았을까하는 추측을 우리가 하게 됩니다. 모세가 율법을 봤던 곳입니다. 만약에 그곳에 가서 3년동안 있었다고 한다면 바로 그곳이 말씀의 학교요 기도의 학교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메세지와 붙여서 생각해 본다면은 율법의 산에서 그는 율법의 멍애를 벗어 버리고 성령을 따라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는 체험을 그런 그가 거기서 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들을 보면은 그후에 사울이 전하는 메세지나 그가 개척한 모든 교회나 편지를 통해서 보면은 이런 일들이 얼마나 깊게 다양하게 표현되는지 모릅니다. 정말 온누리교회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할때 깨달아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지가 문제가 아니라 선교사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준비된 선교사가 없으면 선교지에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가서 일을 한다면 일한만큼 손해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역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역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과 사역자들이 부름을 받았고 뜨거운 열정에 조급하여 준비하지 않은채 떠나서 선교지를 망치는 경우도 우리가 너무나 많이 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사를 안보내야 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는 꼭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러한 준비와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선교지에서 실패한 경우는 부름을 받지 않았는데도 자기가 부름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간 사람들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를 보면은 두가지가 분명히 여기서 확인 됩니다. 첫째는 그가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인 것입니다. 누가 선교지로 가야 합니까 누가 사역에 뛰어 들어야합니까 첫째 부름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부름은 힘이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런것 같기도하고 아닌것 같기도 부르심의 확신 분명해야 합니다. 이 부름을 받지 않았는데도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 선교사로 부름을 받고 선교지에 갑니다. 열매가 좋지가 않습니다. 나중에 그분을 가만히 자세히 관찰하게 되면 그분이 선교사로 간것은 현실을 회피 할려고 간 것이 였습니다. 현재의 삶이 고통 스럽기 때문에 가정 관계라든지 직장 관계라든지 지금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별로 재미가 없습니다. 스트레스가 있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있습니다. 근데 누가 선교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다라고 생각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현실의 도피의 수단으로 선교지를 선택한 것입니다. 현실의 도피의 방법으로 선교지로가서 헌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의 깊은 내면속에는 열등감이 있고 현실 도피가 있는것입니다. 어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런것들이 다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고난이오고 핍박이 올때 이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되는것을 보게 됩니다. 사울의 경우는 그가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에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의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나는 온누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이 부름에 확신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름을 받았다면 사울의 경우는 세상에서 부르심에 합당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받았다고 성령을 체험했다고 바로 행동하게 되면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철저하게 자기를 쳐서 복종케하며 성품을 바꾸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울이 은혜받았다고 바로 일을 했다면 그렇게 위대한 편지를 쓸수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엄청난 사역을 감당할수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사울은 마음의 사형 선고를 받고 살 소망까지 끈어지고 그런 비참한 상황까지 그가 들어 갔습니다. 말할수 없는 수많은 고난들을 받았으며 배신을 겪었습니다. 감옥에서 생활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실현속에 그가 그 일생을 보냈는데 만약 준비되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이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울에게는 아라비아에 이 숨겨진 세월 이것이 사울이 되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할때 하나님이 길을 막을실때가 있습니다. 나는 꼭 가야되겠는데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다 됐는데 마지막 도장하나가 안찍힙니다. 준비가 다 되었는데 그것안 하나님의 싸인으로 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더 기다려야한다 더 훈련받아야 한다 더 준비되야 된다고 하는 하나님의 하나님의 싸인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준비된 만큼 열매 맺습니다 변화한 만큼 열매 맺습니다. 말씀으로 무장한 만큼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시간들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이런 시간을 갖고난 다음 사울을 다메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23절을 다시한번 읽겠습니다. 시작-여러날이라고 한 것은 계산할 수 없는 날이라는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여러날이 지나서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 왔을 때 사울을 죽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울을 죽이기 위해서 밤낮 성문으로 까지 지켰다고 나와있습니다.
24절을 읽으 싶시요. 시작
밤낮으로 사울을 잡기 위해서 성문을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히 다메섹에서 예수 믿고 변화된 뒤 몇일 후에 된일은 아닙니다. 굉장히 많은 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사울의 제자들과 사울은 성문으로 나갈수 없었기 때문에 광주리를 타고 밤에 성에서 탈출을 하는 이야기가 25절에 나타납니다. 광주리에 사울을 집어 넣고 아마 밧줄을 이용해서 밤에 야밤을 틈타서 사울을 탈출시키는 이런 사건입니다. 여기 보면은 사울의 제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은 사울이 언제 제자를 만들었겠습니까 이것은 굉장한 시간이 지났다는걸 알수있습니다. 더구나 또 고린도후서 11장32절에 보면은 사울을 죽이기로 공모했던 사람들이 누구냐하면은 다메섹의 왕 아레다의 방백들이였다고 고린도후서에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사울을 핍박하는 세력이 단순히 사울이 미워서 어떤 밀부의 세력이 아니라 다메섹 왕의 방백들이 조직적으로 사울을 체포할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만약에 사울이 준비되지 않은체 이런 핍박을 받았더라면 그는 자기가 받은 구원에 의심을 했을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믿고 갈등을 느끼는것이 무엇이냐 보니깐 분명 성령체험을 했고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믿으면 모든것이 잘되야 될텐데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되야 될텐데 자꾸 사업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믿으면 다 건강해 져야 될텐데 병들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핍박이 더 많이 질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은 예수에 대해서 회의가 생기고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내가 받은게 정말 구원인가 예수가 정말 예수인가 이런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믿고 어떻게 예수님이 일하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처음 단계는 이런시험이 있을수 있습니다. 선교지란 이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이 있었던 선교지는 더 위험했고 지금 있는 곳은 덜 위험한것이 아닙니다. 선교지란 주님 오실 때까지 똑같습니다. 강팍하고 우상이 있고 물질이 있고 죽음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는 이해될 수 없는 그런곳이 바로 선교지 입니다. 이런 선교지는 여러분 선교지가 절대로 편할것이란 생각하지 마십시요. 많은 선교사님들이 선교지로 가는데 어디로 가시는지 아십니까 안전지대를 쫓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세계 선교사들 중에 90%이상이 안전지대를 쫓아다니는 선교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가있는 전세계 선교사들중에 90%가 예수믿고있는 사람들을 선교사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안전한 지대 예수를 믿지 않은 그런 위험한 곳에 가는 사람들은 5%에서10%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도 선교지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위험과 위기가 변화된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모든 일들이 오늘 이시대에 똑같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이란에서 하나님의 총회자인 하이크 허셉피안이란 사람이 피살을 당했습니다. 그런 일들도 지금 세계 도처 곳곳에서 있을수 있다는것입니다. OMF단체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죽었습니까 그 선교사들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있었던 외교단체에 조그마한 강단에 가 보면은 약 23사람의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그 밑에 보면 전부 20후반에서 30대초반이 되는 의사 간호원 농업기술자 이런 사람들의 교사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들이 현지에 가서 다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여라가지 핍박속에 순교자들의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한 선교단체가 적어도 천여명의 선교사를 가지고 있는 선교단체는 수십명의 순교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값싸게 전달되어진게 아닙니다. 복음은 이런한 말할수없는 고난과 역경과 희생과 헌신과 이런 수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선포 전파된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그 고난의 시작을 겪게됩니다. 첫번째 고난의 시작이 담벼락 넘는 고난입니다. 담을 통해서 밤에 도망가는 고난부터 사울에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 있을 수 없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깐 또하나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의 고난은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 헬라파 유대인들 같은 사람들에게 핍박 받은 것이라면은 예루살렘에 와보니깐 예루살렘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을 인정하지 않고 의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과거에 이런 사람인데.
26절을 보기 바랍니다. 시작-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울을 만난 그 얼굴을 상상할수 있습니다. 싹 웃고는 있지만 굉장히 불안합니다. 왜 그런거 있지요. 안녕하세요 그러고 웃고있는 그런 표정을 사울에게 봤을때 거리를 두는 그런 교제 마음을 열지 않은 교제. 우리 온누리 교회에도 처음 오게 되면은 굉장히 처음오신분들이 당황하게 될거예요. 사람은 많은데 자기를 영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랬을 때 그분들이 사막에 홀로있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 굉장히 고마운 분이 한명 나타납니다. 그이름이 바나바입니다.
27절 시작-
사울에게 있어서 바나바가 얼마나 고마운 분이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의심합니다. 악수를 적당히 합니다. 미소를 적당히 띠웁니다. 거리를 두고 이 바나바가 뛰어 들어서 이사람을 변호해주고 보해주고 사회자 역활을 해줍닌다. 바나바는 참 따뜻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적인 통찰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못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영적인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의 회심이나 그의 체험이 사실이고 진실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의심하게되는것은 속아 봤기 때문입니다. 잘믿었다 돈 빼앗기고 잘해줬다가 배신을 당하고 잘해줬다가 나중에 봉변당하는것을 우리가 너무나 많이 겪었기때문에 이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사람을 믿는것이 고통스러운 그런것을 우리가 많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런 영적인 통찰력이 참 필요합니다. 또 하나 이 바나바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사회자의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명히 옳은줄 알지만 손해 볼 경우에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손해보지 않는 그런 안전지대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시간 빼앗기지 않은 것 자기 여러가지 사생활에 간섭받지 않을 것 경제적으로 손해보지 않을것 그러나 약간 이득이 있을수 있는것 존경을 받을수 있는것. 그런 벨트라인들 쫓아 다니면서 교회를 다니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정말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얼마나 손해를 봤냐는 것입니다. 시간에 얼마나 손해를 봤는가 자녀들이 얼마나 손해를 봤는가 당신의 인격이 얼마나 손해를 봤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가 좋아서 따르는 사람. 바로 이런것들 감당할수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만 그자리에 서면 굉장히 손해볼것이다. 뒷감당을 하기가 어려울것이다. 그래서 옳은줄 알지만 하지를 못합니다.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오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 들어서 사울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온누리교회에 이런 교인들이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필요합니까 사울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바나바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선교지의 어떤 사람들이 필요합니까 능력 있는 위대한 사람이 필요한것이 아니라 바나바같은 이런 사람들이 선교지에 필요합니다. 그는 큰 일을 안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화해자입니다. 그는 사람을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을 상담하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도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정말 선교사인 것입니다. 대게 선교지에 가면은 좋은 말로 개성이 많은 사람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오직 했으면 선교사까지 갔겠습니까 남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자기 일은 잘합니다. 나의 일과 함께하는 일에는 손을 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지에는 일하는 것보다는 인간관계가 아주 어렵습니다. 서로 섬기고 서로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존경하는 이런것들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나는 바나바를 보면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몰라요. 제가 보아도 바나바가 참 좋게 느껴집니다. 온누리교회 모든 집사님들이 바나바같이 되길 바랍니다.
29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시작-
사울은 이렇게 바나바의 도움으로 이제 그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그런 축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 격려하고 인정해주고 도와 줄때 꽃이 피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때 그가 힘있는 메세지를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제 자기가 받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음을 증거할 때마다 반대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공식을알 수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려고 할 때 핍박이 온다는 것입니다. 핍박이 오면 예수님이 뭐라고 말하셨습니까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마크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고난을 겪지 않는 다면은 우리는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은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도사울과 변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29절에서 제미있는 사실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뭐라고 했죠 변론을 하고나니깐 그들이 죽이려 했다. 무슨 생각이 안납니까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 했던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때 그들과 논쟁했던 사람이 헬라파 유대인이였고 결국 그 헬라파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다가 찔림을 받아서 스데반을 죽이려 했고 결국 그를 끌어다가 돌로쳐 죽였던 것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을 때 돌로 맞아 죽을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죽음을 맞당히 여겼던 사람이 사울이 였습니다. 놀랍게도 지금은 사울이 스데반의 자리에 들어 서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이려했던 것처럼 사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29절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사울이 29절에서 헬라파 유대인들과 변론 했다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행전 6장9절에서 스데반이 어떤 사람들과 변론했다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참 성령의 역사는 오묘합니다. 참 오묘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을 줄 어떻게 알수 있었습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복음 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참 오묘한 것입니다. 그래서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핍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이 그 자리에 들어갈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자기의 고향 다소까지 돌가가게 되었습니다.
30절입니다. 시작-
다소에서 출생한 사울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갖습니다. 그는 헬러니즘을 경험했고 유다이즘을 경험했고 로마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얻은게 없습니다.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의 인생은 180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위하여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 왔습니다.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다시 자기가 태어났던 곳을 가게 됩니다. 참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가끔 삶의 거처를 옮깁니다. 어떤때는 서울에 살다가 우리 권집사님처럼 경상도로 갔다가 또 어디로 갔다가 오는 경우 저는 이북에 살다가 전라도로 갔다가 서울로 왔다가 이렇게 움직입니다. 어떤분은 이민을 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선교에 깊은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 사람은 그냥 왔다갔다 합니다. 저왔다 갔다 또 떠난다 지겹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다닙니다. 그러나 선교의 의미를 가지고있는 분들은 이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예루를 만난 사람들은 아 왜 하나님께서 이곳에 나를 보내 주신 것일까 여기에 하나님의 오묘하고 신비한 것들이 기다리고있구나! 여기에 무슨일 생길까 이런 기대와 흥분과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영적이 자격이 필요합니다. 사울처럼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과 로마의 그 모든 문화의 경험과 그런 소위 혈통적인 그런 자격들이 다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그런 자격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울은 바울이 되어서 신약의 3분에 1을 그가 쓸수있었습니다. 만약 지적인 준비가 안되어 있다면은 그는 편지를 못썼을 것입니다. 그런 인간적인 그런 자격들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비교할수 없는 더 중요한 영적인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님의 일을 하려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한 지식과 단순한 결정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세상 학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학문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비교할수 없는 생명인 것입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찌 예수를 위해 죽을수 가 있겠습니까 예수에 대하여 공부는 할수 있습니다. 학문은 할수 있습니다. 설교도 할수 있습니다. 가르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위해서 죽을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얘기하지만은 예수를 위해서는 죽을만큼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일할수 있는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 혹시 교회나오신 분들 가운데 교회도 나오시고 세례도 받으시고 다 직분도 있으시지만 아직 예수그리스도를 내 인격에서 삶에서 체험하지 안은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위해 기도하셔야만 합니다. 주님 만약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은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당신이 정말 하나님이라면은 당신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원합니다.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면은 말씀하실꺼 아니예요 없어진 분이 아니라면 분명히 계실꺼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만나야 합니다. 경험되어야 합니다. 체험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사울처럼 영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훈련없이 영적인 일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울은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아라비아에 가서 그는 3년동안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정말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가 3년동안 무엇을 했는지 아무 기록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일차전도도 이차전도도 삼차전도도 아닐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했다는 점입니다. 은혜받았다고 당장 날뛰지 않기를 바랍니다. 준비하십시요. 훈련을 받으십시요. 가장 중요한 훈련은 여러분의 성품이 변하는 훈련입니다. 여러분의 인격이 변하는 훈련입니다.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하여 영광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용조 목사 사도행전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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