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기독교 교육의 모범
- 그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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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연이 세운 규암재는 1908년에는 명동서숙, 이듬해에는 명동학교로 발전하였는데, 이상설이 세웠던 서전의숙과 연합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기독교 학교로서의 기능은 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09년 4월 27일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정재면이 신임 교감으로 있으면서 일대 전환을 맞이했다. 그는 평양 숭실학교, 서울 상동교회의 청년학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출신으로서 명동학교에서의 성경 교수가 그의 취임 조건이었다.
그 때부터 `신.식.병'을 교육이념의 토대로 삼던 것을 `신.망.애'로 바꾸고 본격적인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등 서울 상동청년학교 교사출신들을 평교사로 초빙해 와서 기독교 민족교육이라는 이상을 펼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적 민족교육은 훗날 일제에 의한 명동학교의 폐교 이유에서 그 성과가 여실히 나타난다. '명동학교는 지리 시간에 조선을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 지도를 사용한다.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사용한다.
철저한 항일교육을 시킨다. 입학시험 응시자 중 독립정신. 민족정신이 투철하지 못한 학생은 탈락시킨다.'
그러던 차에 1909년 4월 27일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정재면이 신임 교감으로 있으면서 일대 전환을 맞이했다. 그는 평양 숭실학교, 서울 상동교회의 청년학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출신으로서 명동학교에서의 성경 교수가 그의 취임 조건이었다.
그 때부터 `신.식.병'을 교육이념의 토대로 삼던 것을 `신.망.애'로 바꾸고 본격적인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등 서울 상동청년학교 교사출신들을 평교사로 초빙해 와서 기독교 민족교육이라는 이상을 펼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적 민족교육은 훗날 일제에 의한 명동학교의 폐교 이유에서 그 성과가 여실히 나타난다. '명동학교는 지리 시간에 조선을 일본 영토에서 제외한 지도를 사용한다.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사용한다.
철저한 항일교육을 시킨다. 입학시험 응시자 중 독립정신. 민족정신이 투철하지 못한 학생은 탈락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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