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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기적 (행 09: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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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우리가 지난번에 배웠던 지난주에 배웠던 사도행전 8장 25절부터 다시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8장 25절을 먼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 하여 전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 복음을 전하니라. 이 8장 25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함을 듣고 즉시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마리아로 간 내용입니다. 사마리아로 가서 그들은 말씀을 전하고 그 사람들에게 안수를 합니다. 그때 성령이 임합니다. 여러 가지 기적과 능력들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마친 후에 그들 사마리아 사람들을 다 격려하고 도와준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예루살렘으로 돌아 갈 때 그들은 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사마리아 여러 촌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러 촌에 복음을 전하니라. 이렇게 보면 8장 25절부터 9장 35절까지 내용은 베드로와 상관 없는 삽입된 사건임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즉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를 전도합니다. 빌립은 핍박을 받아서 예루살렘을 떠나서 돌아다니면서 사마리아와 유대를 전도하는 기록입니다. 그다음 사울은 예수믿는 사람을 핍박하려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반대로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두 사건이 여기에 개입이 되는데 왜 누가가 베드로 이야기를 하는데 도중에 빌립의 이야기와 사울의 이야기를 개입시켰을까 한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가지 목적이라는 것은 빌립의 사건이나 사울의 사건이나 베드로의 사건이 모두가 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을 향하여 복음의 문을 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절묘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복음이 이방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에 임한 복음이 유대인에 임한 복음이 예루살렘에 임한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들 세계속에 들어 갈수 있겠냐는 거죠 과연 문을 어떻게 열수 있겠느냐 이것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일들을 본인 자신들도 모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빌립을 통하여 일을 하고 계시고 사울을 통하여 일을 하고 계시고 베드로 자신을 통하여 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또 환경을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개입하고 나서 중간에 다시 베드로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32절을 읽겠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무렵에 사마리아 여러지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바로 그 때 사마리아 땅과 유대 땅에 그 중간 지점되는 그 해변에 가까운 룻다라고 하는 지역을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룻다라는 지역을 가게 되었는데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죠. 그것은 흩어진 성도들을 도와주고 심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이미 여러 곳에 복음이 전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예루살렘에 있던 복음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불똥을 튀기듯이 튀어나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이 룻다와 사론과 욥바에 있었다는 것이죠. 거기에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로 간걸 보면 분명히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 후에 아라비아 까지 간걸 보면 거기에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마치 이것은 불똥과 같은 것입니다. 불이 폭발을 했는데 불똥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지더니 그곳에서 성령의 불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복음은 예수의 복음은 성령의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은 부활의 복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불똥이 터지듯이 생명이 역사하듯이 마치 잡초가 번식하듯이 불똥이 튀기어 나간 것입니다. 이미 떨어지기만 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불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사도행전에서 불똥과 같은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여기서 성령의 불이 임하여 오순절처럼 온누리 교회서 성령을 받고 여러분의 직장이나 곳곳에 흩어져서 또 다시 그것을 변화시키는 그런 역할을 감당 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을 보면 놀라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복음이 물이 흐르듯이 계속 흐를 수 있는 곳까지 흐르듯이 복음은 국적과 인종과 문화와 전통을 초월하여 이게 막 흘러 갑니다. 복음이 흘러가면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이 전해지는데 심방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심방의 책임니다. 1차전도 2차전도 3차전도 심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온누리교회를 하면서 심방전도에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사도행전을 보다가 회개를 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은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를 내가 전하고 그 사람이 정말 예수를 잘 믿고 있는지 부처 믿는 사람들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 자꾸 흔들립니다. 환경의 유혹을 받아 자꾸 흔들립니다. 의심을 하게 됩니다. 찾다가 또 넘어집니다. 그 사람들을 계속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여러통 썼습니다. 그게 신약입니다. 편지를 왜 썼겠습니까 격려하고 위로하고 마귀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일종의 심방편지입니다. 예수님의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들은 연약한 형제들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정말 그들이 기도를 잘하고 있는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같이 겉으론 예수 잘 믿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집을 떠난 양처럼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홀로 울고 외로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신앙을 다 까먹어 버린 것은 아닌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들을 찾아 다니면서 다시 믿음을 강화하고 타약된 믿음을 다시 순수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사람들의 특징 심방 많이 합니다.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 심방 잘 안합니다. 이게 사도행전의 한 원칙입니다. 난 우리 온누리교회가 그동안 심방 안한것을 하나님께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성경 잘 가르키면 됐지 설교 잘하면 됐지 심방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 사도행전을 보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집집을 찾아 다니면서 가난하고 어려운 성도들을 도와주고 외롭고 가난한 성도들을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심방 많이 하기 원합니다. 오늘 예배 끝나고 별일이 없으시면 점심 잡수시고 누군가를 심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이름으로 찾아가서 기도해주고 격려해 주는 그런 축복이 있게 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 오늘 보면 베드로가 심방을 하다가 영혼을 돌보다가 연약한 성도들을 도와주다가 중풍병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8년 동안 자기 스스로 옷을 입을 수가 없고 먹을 수 없고 화장실을 갈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런 사람을 만나게됩니다. 저희 아버님도 5년간 아무것도 할수 없어 저희 어머니가 전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침상위에서 대소변을 다 받아내는 생활을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짜증스럽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바람에 저희 어머니는 천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다 도와주로 간 것입니다. 그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 팔년된 중풍병자를 만나게 됩니다. 32절과 3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중풍병자를 만나러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심방하다보니까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은 정말로 도와주어 야 될 사람이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위로를 해주어야 될 사람이 있는 것을 많이 봅니다. 다 겉보기에는 훌륭해 보이고 문제가 없어 보여도 그 영혼의 깊은 고독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심방을 하다가 교회들을 돌보다가 바로 8년 된 한 중풍병자의 가정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34절과 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이 중풍병자를 여기서 주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키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연역한 성도들을 돌보다 보면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동성동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기다리느라고 점심시간 무렵에 배가 하두 고파서 어떻게 할까 보니까 옆에 조그만 한 삼계탕 집이 있어요. 이 집에는 무슨 음식이 있나 먹을 것이 있나 하구 그래가지고 들어가 보았어요. 간판에 음식을 적어 놓은 것을 보니까 제가 먹을것이 없는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오는데 누가 날 딱 붙잡아요. 그 주인이 목사님 아니십니까 그래요. 너무 놀래가지고 들켰구나! 그랬더니 자기 딸이 온누리교회 다닌데요. 청년부. 얼마나 은혜를 받고 변했는지 일단 이야기를 해서 갔어요. 들어가서 닭곰탕을 먹었습니다. 우리 기사 아저씨와 둘이서 같이 특별히 음식을 잘 대접해 주셨습니다. 조그만 식탁이 10개 정도 있는 가게입니다. 그런데 자매님들이 그렇게 밝고 명랑하고 꼭 교회 온 것 같아요. 권사님이시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장사를 하는데 맛있게 닭곰탕을 먹고 돈을 내려고 하니까 돈을 안 받으려고 하세요. 그래서 한참 싸웠어요. 목사가 돈 내는 경우가 없는데 나도 돈 좀 내자고 목사도 돈 좀 내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실패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기도하자고 축복해주고 나왔어요. 며칠 지나서 저희 교회로 팩스가 왔어요. 지난주에 왔는데 그 권사님으로부터 온 팩스예요. 목사님이 다녀가신 이후에 저희 자기 집에 여러 가지 말 못할 사연들이 있고 기도제목들이 있는데 돈이 꼭 필요했데요. 돈을 갚아야 될 일인데 돈을 갚을 수가 없었대요. 꿔 줄사람도 없고 여러 가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제가 떠나자 말자 어떤 분이 무이자로 그 돈을 다 빌려주었대요. 이분이 너무 놀랜거예요. 역시 목사님이 다녀가셨더니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아주 전혀 생각하기 못했던 일인데 그 덕택에 제가 굉장히 능력 있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심방을 하면 본의 아니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전혀 나는 모르는 일이고 또 그분이 돈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런일들은 작은기도가 이런 동기부여가 된다는 것이죠 오늘 여러분 꼭 심방하시길 바랍니다. 누군가 이런 일이 또 생길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8년 된 중풍 병을 병자를 고쳐주셨는데 여기에 몇가지 주의하며 관찰할 부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 애니아를 낫게 하신 분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이렇게 말을 시작합니다. 아마 이때 분명히 베드로는 어떤 환상을 보았는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시간에 깊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고쳐준다는 어떤 영적인 깊은 감동을 받았는지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로 그 순간에 베드로가 8년된 중풍병자를 보는 순간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친다는 확신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언가 음성을 들었다는지 환상을 보았는지 느낌을 받았든지 주님이 내가 이 중풍병자를 고치리라. 말하는 분명한 메시지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니아야 예수님께서 너를 지금 낫게 하신다. 한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병든 사람을 보면 참 저사람이 낫았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어 안수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기대와 소망입니다. 정말 낫았으면 좋겠다는 거이지 정말 주님이 낫게 해주신다는 약속의 근거와는 다를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여기서 8년된 중풍병자를 보면서 네가 정말 낫았으면 좋겠다.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런 음성을 다 듣게 되길 바랍니다. 정말 주님으로부터 이런 약속 주님이 행하시는 그일에 우리가 모두 동참자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베드로는 주님의 이런 확신이 왔을때 어떤 느낌이 왔을때 그는 그 사실을 그대로 믿고 순종했습니다. 예수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지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고 명령을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데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대로 내인간적인 신념이나 철학이나 지식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경험에 불과한 것입니다. 참 믿음은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하는 말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게 해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이 현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셨을지라도 우리는 순종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강력한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지금 일어나게 해라. 에수님이 그렇게 하셨는데도 에이 그럴 리가 있나요 예수님.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돌아갈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성령님은 가끔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첫째 어떤 사람은 그것을 듣는 귀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이 많고, 자기 주장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을 시간이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기도할 때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어떤 깊은 감동이 사로잡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감상적인것이라하여 쉽게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한때 그럴수 있다 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이 말씀 하실 때 그것을 믿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이성에 맞지 않을찌라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뚫고 나갈수 없을만큼 힘들지라도 내가 직장을 생각해보고 가정을 생각해보고 환경을 생각해보면 그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깊은 감동을 받아서 네가 이런 일을 했으면 좋겠다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눈물까지 흘려요. 그러나 눈물 흘리고 나면 끝이예요. 일어서므로 대개 사람들은 기도가 모두 끝나죠.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일어나라! 세 번째 애니아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놀랐습니까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그럴수가 있는 것입니다. 즉시 일어났습니다. 그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목격하고 나서 어떻게 말을 했습니까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보고 무엇이라 했죠 주께로 돌아가니라. 베드로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지금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기적을 보면 예수님께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적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적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거꾸러 예수님이 하신 것 마저도 자기가 가로채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면 머지 않아서 망하게 됩니다.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그 신앙까지 잃어버리게 됩니다. 애니아의 기적은, 8년 된 중풍병자가 살아난 기적은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룻다로부터 10마일 떨어진 욥바라는 곳에서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36절과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시작!-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남자제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남자제자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사람은 도르가라고 말합니다. 이 여자의 특징은 선행과 구제가 많았습니다. 많았는데 그냥 보통 많은 것이 아니라 심히 많았습니다. 굉장히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죽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다죽는다는 것을 여기서 배웁니다. 그가 아무리 선행과 구제를 많이 했을찌라도 나이가 들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인간의 길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다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나는 이 사실을 통해서 여러분께 이 아침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죽음이 준비 되었습니까 오늘 죽는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 하느냐가 그 인생을 결정합니다. 죽음에서 승리한 사람은 모든 면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생애가 화려 할찌라도 죽음에서 실패하면 모든 것을 다 실패한 것입니다. 이 여자도 죽었습니다.이 여자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10마일이 떨어져 있는 베드로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37절과 38절을 읽겠습니다. 시작!-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여자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경건한 특이한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에 대한 설명은 아주 짧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엄청난 능력을 가진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아람어로 그 사람 이름은 다비다입니다. 도르가라고도 말하는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를 가만히 보면은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은 여자라고 소개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여자가 가장 매력있을까요 어떤 여자가 위대한 여자 입니까 여러 가지로 평가 할 수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빼어난 미모와 훤칠한 키에 재치를 갖춘 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까지 잘 믿는 그런 여자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성격이 매력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문성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도로 훈련된 지성과 풍부하고 단란한 언어를 쓰는 그런 사람들 있습니다. 또 어떤 여자들은 보면은 미술이나 음악에 이미 천재성을 발휘해서 어린 나이에 세계 정상을 차지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참 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이런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추모해야 될 한 아름다운 여자는 어떤 사람은 그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고 키가 몇센티미터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뭘 전공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어요. 그 여자가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것 참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번 여러분 자신을 돌이켜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선행을 베푼 일이 있습니까 참 교회봉사도 많이 하셨어요. 정말 남 모르게 봉사하는 성품이십니까 가난한 자를 구제 하십니까 남 모르게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격려하는 그런 성품이 있습니까 저는 목사로서 이 말씀을 준비하다가 굉장히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참 보니까 난 인색한 남자예요. 내가 굉장히 잘 웃고 잘하는 것 같아도 내 속에 차가운 것이 있습니다. 가난한자를 도울 때 언제나 따지며 도와요. 조건없이 돕는 일이 별로 없더라고요. 저는 일을 좋아하는 그런 성품의 사람이예요. 그러나 사도행전의 사도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관심이 있습니다. 정말 내 개인적인 삶에 교회에 예산을 가지고 도와주는 것이 있어도 내 개인적인 돈을 가지고 도와주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내 개인적인 재산을 가지고 돕는일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 스스로에게 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안에 선행이 있는가 과연 우리안에 불쌍한 사람에 대한 구제가 있는가 오늘 날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무엇인가 교육도 있고 선교도 있고 구원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에게 구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맘속에 정말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향하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궁핍 되어 있습니다. 왜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칭찬을 받지 못하는가 선행과 구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기대하시는가 구제하고 선행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관심이 많으십니다. 이 여자를 이 여자가 죽었는데 그 죽음의 이유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구제하다 지쳐서 죽었다. 어떤 사람은 구제를 너무 좋아해서 자기 건강을 돌보지 않다 죽을수도 있어요. 여러분 구제와 선행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돈이 없어도 구제 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애정 이런 것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것들에 너무 메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생활을 지키기 위하여 내 수준을 지키기 위하여 내 편리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내 성공을 위하여 내 주변에 있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눈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0장에 가면 고넬료라는 사람이 온 가정이 구원을 받습니다. 어떻게 구원받는지 아세요 천사가 나타나서 내가 네 기도와 구제를 보았느니라. 그 사람은 이방인이예요. 이탈리아 백부장이예요. 그러나 그는 평소에 구제를 많이 했어요.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구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어요. 하나님이 그것을 읽으신 거예요. 구제를 많이 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절대 안 버리십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해서 칭찬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정말 이웃을 향하여 조건 없는 구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구제 할때 따지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 많아요. 구제 할때 따지면 구제 못합니다. 의심하면 구제 못합니다. 그 사람이 먹을 것이 없으면 먹여야하고 입을것이 없으면 입혀야하고 그것이 적이라도 원수라도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궁휼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네편이냐 내편이냐 따져서 구제합니다. 기왕 구제 할려면 외국 사람들에게 하지말고 우리나라 사람한테 구제하라고 합니다. 기왕이면 경상도 사람한테 구제하라고 합니다. 기왕이면 전라도 사람한테 구제하라고 그럽니다. 기왕이면 내 조직 사람한테 구제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 조건을 따지고 환경을 따지고 관계를 따져서 구제를 하지 정말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대해서 정말 인색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을 해석해 보면은 이 여자가 죽었을 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슬퍼했어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압니다. 이웃에게 구제와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죽을 때 비록 장례식에 가지 못하더라도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 아깝다. 그 사람은 안 죽어야 되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죽어도 싸다는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얼마나 슬펐으면 이 여자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 시체를 곱게 씻였다 그랬어요. 그렇지요 그리고 그를 무덤으로 가지고 가지 않았어요. 어디로 가져갔습니까 다락으로 가져갔습니다. 무덤에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0 그런 사랑과 애정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를 깨끗이 씻여서 다락에 올려 놓고 그 다음에 몇 사람이 뛰어가서 옆의 롯다로 갔습니다. 거기는 베드로가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때 8년된 중풍병 고쳤다 함을 듣고 베드로에게 찾아 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한테 일단 와주십시오. 이런 여자가 죽었는데 당신이 와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거기서 베드로를 데리고 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존경과 사랑과 무엇인가 이 죽은 여자를 위해서 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를 다시 데려와서 죽은 자를 살릴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는지 이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무덤에 묻을 수 없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믿을 것인가만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것인가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여러분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사느냐 생각하십니까 내가 사는게 조금 화려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사치 스럽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내가 먹고 마시고 사는 것이 분수에 넘친다고 생각 하지 않으십니까 물론 그럴 그만한 자격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만한 돈도 있고 지위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누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한 여자를 보게 됩니다. 조건 없이 남을 도와주고 사랑하고 선행을 베푸는 이 여자. 베드로가 도착했을 때 다락방에 올라 가 보았습니다. 그 때 그 주변에 과부들이 울고 서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한 옷가지를 줍니다. 그것은 그들이 같이 지었던 도르가가 만들었던 속옷과 겉옷입니다. 이 속옷과 겉옷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히 과부들과 함께 도르가가 격려해서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우리가 추울 때 옷을 지어주기 위하여 정성스럽게 만들었던 속옷과 겉옷일 것입니다. 아마 이 옷을 보여준 것은 선행을 기억해 달라는 것 일 겁니다. 이 여자는 평소에 이렇게 살았다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가난한자를 도울 때 돈 몇푼 던져 줍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도울 때 시장에서 옷 몇 개를 사서 주면 끝나는 것입니다. 내가 고생할 것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가난한 자를 위하여 입혀줄 옷을 꾸미고 만들고 정성껏 지어서 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무슨 물건을 많이 주느냐 그 사람이 얼마나 편리하게 해주느냐에 구제에 진정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같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 애정과 내기도와 내사랑이 거기에 묻혔다는 것입니다. 온누리 교회 많은 구제품이 옵니다. 그것을 그들에게 절대로 그냥 주면 안됩니다. 빨아서 다려서 꾸며서 그렇게 정성스럽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깃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여자는 그렇게 했습니다. 겉옷과 속옷을 지어서 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부들이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교회의 모습 성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내 주변을 잠깐 훓어 보면 여러분의 집에 오는 파출부가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도와주는 분들이 그런 분들 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제일 낮은 자리의 사람을 만나 이야기해 보면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분들과 만나서 커피 한잔을 나누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바로 그 마음.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얼마나 많은 돈을 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애정과 사랑을 가졌느냐는를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제와 선행은 결코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죽을 때 몇 명이나 울까요 여러분을 기억하고 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선행과 구제는 조건이 없어야 하며 이유가 없어야 합니다. 대상이 누구냐를 따져서는 안됩니다. 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이것은 마치 마가복음 5장 35절이하의 말씀 중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렸을때의 모습과 흡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속옷과 겉옷을 받아 들였을 때 그리고 많은 주위의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우는 모습을 보았을때. 그리고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는 한 여인을 보았을때. 베드로의 마음은 겉잡을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다 나가라고 말했습니다. 다 나가라! 그리고 그는 이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했습니다. 무슨 기도를 했을까요 하나님 이 여자를 살려 주십시오. 그것은 보통기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간절하게 기도 했을 것입니다. 주님 이 여자가 이렇게 선행을 베풀고 이렇게 구제를 했는데 정말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이렇게 도와준 여자인데. 이 여자를 살려 주십시오. 여러분 베드로가 아무리 미련하다고 그래도 말이죠. 죽은 자가 어찌 살아납니까 어떻게 시체한테 그런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그는 시체를 보고 있었지만 그는 시체를 보고 있지 않고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으며, 죽은 다비다의 시신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다비다를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품에 살아 역사하는, 천국에서 뛰어노는 다비다를 그가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난 후에 베드로는 시체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제 정신이 아니예요 지금. 내가 보기에 제정신이 아니예요. 아니 제 정신이면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은지라. 나는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믿습니다. 하나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상징도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이런 일은 나는 지금도 있을 수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정말 우리가 베드로 같은 기도를 한다면 정말 우리가 다비다 같은 선행과 구제가 있었다면 그런 일이 있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비다야 다시 일어나라! 나는 이러한 사실 앞에 이런 기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한국을 생각하고 서울을 생각하며 죽은 다비다와 같은 그런 절망감을 느끼며 누가 교육 문제를 해결 할 수있고 누가 사회의 타락과 경제의 위기를 누가 해결 할 수가 있겠습니까 과연 통일의 문제를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누가 해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말할 수가 없을까 이 불가능에 도전할 수가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41절 42절을 보겠습니다. 시작!-여기서 우리는 이 기적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켰습니다. 성도들을 불러서 그의 산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이 소문을 듣게 되었고 살아난 다비다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많은 사람들이 누구를 믿더라 주를 믿더라! 베드로를 믿더라가 아닙니다. 주님께 돌아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이 교회자체가 우상이 되면 안됩니다. 온누리교회가 좋기는 하지만 온누리 교회 자체가 우상이 되면 안됩니다. 온누리 교회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선행과 구제가 중요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의 선행과 구제는 다 사진찍는 선행과 구제인 것입니다. 자 웃으세요. 찰칵! 내가 얼마 냈다. 다 많은 사람들은 선행과구제를 하고 재정보고를 받습니다. 썼나 안썼나 잘썼나 이게 보통 우리의 구제입니다. 그런 구제는 하나님이 기억 안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억할 구제를 하십시오. 하나님 만이 아는 당신의 아내와 남편이 모르는 그런 구제를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그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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