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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개국과 의료교육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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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전래된 19세기 중엽의 한국 정세는 국내적으로 대원군과 민비, 개화파와 보수파의 대립 갈등으로 정치가 난마와 같이 엉크러진 상태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쇄국 정책이 무너지면서 1876년 일본과의 수호조약이 체결됨을 계기로 뒤이어서 미국과 영국, 러시아,프랑스 등 여러나라와도 교섭을 개시하여 은둔국의 고립은 깨어지고 밀려드는 열강의 세력을 응대하기에 힘겨운 처지에 있었다.

일본 세력의 진출에 대하여 보수파의 반항으로 일어난 사건이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고 친일 개화파의 쿠데타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이었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정치는 물론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숨막힐 정도로 앞길이 막혀있는 정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틈바구니를 뚫고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키고자 혼신의 몸부림이 일어나 있었음도 부인하지 못한다. 개국은 되었지만 이것이 곧 기독교 선교를 위한 허락은 아니었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한미수호조약 내용에 있어서도 한국 공개항(共開港)에서 민주시민의 교역권, 거주권, 등을 인정하는 최혜국 대우를 보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독교 선교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다만 문화관계의 조항 속에 (양국의 생도가 서로 왕래하면서 언어와 문화를 합습협력하므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하자)라고 있는것이 고작이었다. 한미조약 조항중에 한국 정부가 가장 좋아한 내용은 제1조에서 (미합중국은 한국의 정치적독립과 영토적 보장을 아끼지 아니한다) 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외구세의 침투가 극심한 시기이었느고로 이조항으로 미국으로 부터의 후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H.B.Hulbert,American Policy in the Case of Korea, The New York Times,March 5,1916.

1883년 11월 체결된 한영수호조약에는 서양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종교예식을 거행할 수 있다고 하는 조문이 삽입되었다. 이는 기독교 선교를 바라보는 진일보의 상황이었으며 한국정부는 비록 제한된 지역내이기는 하였지만 외국인의 신앙 행위를 인정한 셈이 돼버리고 말았
다.

1884년 6월 24일, 일본에 주재하고 있은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 (Rebert S. Maclay) 목사는 서울을 방문하였을 때 김옥균을 통하여 고종을 알현하였으며 7월 3일 [한국내에서 학교와 병원사업을해도 좋다]고 하는 윤허를 받았다.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Vol,Lx No 8, 1895,P289).

이때 학교와 병원사업만이 허락된 것은 기독교의 종교적 요소가 아닌 서양의 문명적 요소의 수입만을 희망한 사정을 알게하고도 남는다.김옥균도 그러한 방향으로 원하였던 모양으로 [세밀한 내용의 결정은없었으나 곧 사업에 착수해도 좋다]고 하는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였다. (R.S Maclay, 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Vol 9.No 8, 1895,P287)

매클레이 목사는 일본으로 돌아간 즉시로 미국 감리교 외지선교본부를 향하여 희망에 찬 서신을 발송하였다. [먼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부터 시작합시다. 제반 사정을 미루어보눈대로 한국에서의 기독교 선교 사업은 성공을 거두게될 것은 확실합니다]라고 하였고 [학교사업은 대환영을 받을 것이며 병원사업이야말로 시급한 요구입니다] 라고 하여 조속히 선교사업을 개시해달라고 촉구하였다. (Annual Report of the Missionaut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for 1884,PP 204-205)

이어 한국주재 미국 푸우트 (Lucus H.Foote)공사도 본국 국무장관에게 [매클레이 박사가 떤나후에 고종 국왕의 말씀을 들어 보는대로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데 지장이 없을 것이며 은연중에 장려하겠다는 뜻까지 보이셨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감리회보, 1934년 6월 10일부, P6) 오랫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걸고 박해와 싸운 수많은 성직자와 성도들의 눈물과 땀과 피의 대가가 이제서야 이루지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1세기가 넘는 기간에 천주교의 가시밭의 길이 있었으며 피어린 순교의 죽음이 뒤따랐으며 또한 프로테스탄트 선교 선구자들의 희생과 한국인 개척 전도자들의 대담하고 충성스러운 헌신의 노력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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