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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된 근심 (고후 0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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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은 정신적인 많은 스트레스로 정신적인 질환 혹은 신경질적인 질환으로 괴로움을 겪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을 평안히하여 즐겁게하면 모든 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하고 뼈를 마르게한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한숨 쉬고 억눌려 고민하는 자를 부르셨다. 편히 쉬게 해주신다고 하셨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니 내가 주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라 하셨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면 두가지 근심을 대조시켜 말씀하고 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인들을 무섭게 책망하였다. 그 일로 고린도 교인들이 근심하게 되었을 것을 염려하였으나 그 근심되게 한일로 저들은 새로와졌다. 그래서 바울은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그 근심하게 한일로 저들은 더욱 새로운 성장과 깨달음과 새로운 삶의 형태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하는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였으니 여기에 사는 근심과 죽는 근심이 있다. 복된 근심, 불행한 근심이 있는 것이다.

1. 복된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된 근심인 것이다. 1)자신의 모습을 보고 근심하는 사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외롭고 거룩한 사람이요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처럼 행세하라 인간의 나약함이 얼마나 한가. 바울은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자신의 모습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하였다.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다윗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긴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순간에 범죄 하는 나약한 자였다. 그는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눈물로 부르지 졌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주님을 버리지 않고 죽음도 함께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담대한 제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혀가서 심문받으실때 조그마한 계집아이 앞에서 세번씩이나 저주하면서 부인했다.
이렇게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근심하며 하나님께 진실된 회개와 그의 약속된 은혜를 믿고 간구하는 삶은 복있는 사람이다.
2)골육,친척 때문에 근심하며 우는 자
바울은 자기 친척의 구원 때문에 근심이 있었다. 내게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교훈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나의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 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향을 찾고 부모형제를 만나 그동안 생활에 쫓기며 고달펐던 마음을 함께 기쁨과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도 귀하나 부모형제 친척들의 구원문제 때문에 불철주야, 노심초사하는 그 근심이 귀한 것이다. 그 근심은 가족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고 또한 자신의 어떠한 희생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증거하며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질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이다.
3)멸망한 죄악의 도성을 보고 우는 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 입성하실때 성에 가까이 오셨을때 저 성의 멸망의 참상을 내다 보시며 우셨다(눅19:41) 롯은 소돔성의 죄악을 보며 근심하였다(벧후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고 기록하고 있다.
에스겔서 9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중 먹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하라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그 성을 멸망시키시고 날 그 표를 받은 자들은 그 저주와 멸망의 날에도 보호를 받고 안전한 것을 말씀하셨다. 폭력과 강포가 거리를 누비며 권력으로 치부하며 불법을 자행하는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할 것이기에 이러한 세상은 근심하며 부르짖는 근심과 눈물의 사람은 복이 있는 것이다.
4)인류구원을 위한 근심 곧 하나님의 근심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겠느냐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나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이셔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을 하루같이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이러한 심정을 마음에 품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며 울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복음을 증거하는 성도의 삶이 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근심은 기쁨으로 그 눈물은 즐거움으로 바꾸어 주실것이며 그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기념이 되게 하실것이다.

2. 멸망에 이르는 근심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자. 그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동분서주 바쁘게 있는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돈을 벌까 어떻게 출세할까 어떤 정권을 잡을까 어떻게 내 욕망을 채울까 하는 일들로 걱정 근심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아닐까 어떻게 인생을 즐기며 행복할까 하는 욕망이 차 있다.
악인의 형통은 참된 형통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며) 의아해 하는 시편기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시73성경본문생략)
이들은 인생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동분서주하며 분방했던 삶의 종말은 인생의 허무와 수고의 후회와 영원한 멸망을 탄식할 뿐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책망하여 저들에게 근심하게 한 일로 많이 염려했으나 근심케 했던 일로 결과적인 면에서 볼때 전에 무성의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바울의 설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바울을 적대하는 자들에게 이제는 무죄를 주장하며 변호하는 자들이 되고 바울을 적대하는 자들의 수치스러운 행동에 의문을 품게 되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바울의 책망도 두려워 할줄 아는 자들이 되고 바울을 보고 싶어하고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맺기를 갈망하며 이제는 죄를 배척하고 바울의 교훈을 지키기 위해 열심을 가지며 과거에 죄가 침입하도록 방관했던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자들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기뻐하였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것이 없는 회개를 이루어 구원에 이른다. 세상근심은 명망을 이룰뿐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철난 자식은 부모를 위해 염려하고 걱정 할줄을 안다. 부모를 위해 건강이나 생계나 삶에 대하여만 아니라 부모님 마음속에 걱정하고 계신 심정까지 이해하며 걱정을 하며 그 근심을 덮어드리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의로운 삶을 위하여 천척가족의 구원을 위한 걱정 죄악의 관영으로 멸망의 날의 모습 앞에 하나님의 걱정 근심의 심정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눈물도 아픔도 함께하는 성도의 삶은 후회스러운 사람이 아니다. 부족을 회개하며 보다 더 거룩한 삶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삶으로 자라 영원한 축복의 세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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