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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이 쓰시는 사람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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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989년도 새 해에 서리 집사님으로 봉사하실 분들이 임명하는 날입니다. 임명에 앞서 저는 이번 에 임명되는 분들이 참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이다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당나귀이지만 주님에게 귀하게 쓰임을 받았던 종려질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는 그래도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그렇다면 당나귀 보다는 다 귀하게 쓰임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이시간에 [주가 쓰시는 사람] 이란 설교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무엇보다도 우리는 사람이나 물건이나 다 누가 그것을 사용하느냐, 누가그 사람을 쓰느냐에 따라 그 값이 변한다는 것을 먼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유럽에가면 유명한 경매장이 많이 있읍니다. 그런데 그 경매하는 내용을 보면 나폴레옹이썼던 숫가락, 빗, 뭐 심지어 잠옷까지 등장을 합니다. 요는 사용했던 분이 유명하기때문에 그가 지녔던 용품들까지 유명하여 그 역사적인 값까지 계산이 되어서 고가로팔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꼭 같은 요리사인데 청와대에 있으면 대중식당에서 일하는 요리사와도 전혀다른 권한을 가집니다. 하야트나 힐튼호텔, 신라호텔의 요리장쯤 되면 시시한 사장부럽지 않습니다. 운전기사도 보니까 사장님을 모시면 전무를 모시는 운전기사에게큰 소리로 호령을 하는 것을 보았읍니다. 문제는 누구 밑에서 일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만 해도 배운 것이 없는 변변찮은 어부였읍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쓰임받으면서 그는 기독교의 핵심인물이 되고 말았읍니다. 이 세상에 베드로보다 더 잘나고 더 배운 사람이 얼마든지 있지만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에게 쓰임받았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임명되는 집사님들은 에이 그 까짓, 그 흔한 집사직 하고 시시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그의일군으로 임명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집에가서 잔치는 못차려도감사하시고, 하나님, 제가 내년에는 열심으로 봉사하겠읍니다. 하고 결심하는 오늘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 그러면 이제 우리는 나를 쓰시는 원하는 분이 누구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주님은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역사의 주인이시며 우리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높으신 분이 우리를 쓰시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본문 3절에 보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 고 했읍니다. 본문에 나오는 당나귀는 벳바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별것없는 당나귀였다고 생각됩니다. 뭐 잘 생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당나귀보다 더 큰 것도 아니고 이렇다할 것이 전혀 없는 보통 당나귀입니다. 그런데 이 당나귀가 유명해진것은 주님에게 쓰임을 받았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주님에게 바로 쓰임만 받는다면 여러분들은 뭐 잘난것 없어도,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주님에게 쓰임받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88년도에 이미 쓰임받는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집사로 임명받은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쓰임을 받았다해도 충성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있으나마나한 집사가 될수 밖에 없읍니다.
집사중에는 세 종류가 있읍니다. 교회에 없어서는 안될 꼭 있어야 할 집사,다음에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있으나마나한 집사, 세번째는 교회에 유익보다는해를 주는 말성꾸러기 집사가 있읍니다. 과연 우리는 88년도에 어떤 종류의 집사였는가를 살펴보면서 이 시간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누가 임명하랬나 자기들이 마음대로 정해놓고는 뭘 그러느냐고 이렇게 말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이 집사의 임명은 외적으로 보면 당회가 결정하고 당회장이 발표를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이 쓰시기 위하여 주의 종을 통하여 임명했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따라서 좀 자기자기 마음에 안들어도 우리는 순종해야 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래서 엡 5: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고 하였읍니다. 사실 민주화를 부르짖는 현대사회에서 복종하라는 말은 얼마나 기분나쁜말인지 모릅니다. 누가 감히 복종하라는 말을 할 수 있읍니까 따라서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신앙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였읍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지요.

3. 그러면 주님이 쓰신다고 했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1]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다시말해서 주님이 쓰신다고 했을 때우리는 즉시 보내야 즉 즉시 응답해야 합니다. 주저할 필요가 없읍니다. 세상일은깊이 생각하기 위해 시간을 두고 천천히 결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도 실수 할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하는데는 시간을 끌 필요가 없읍니다.
끌다보면 그 동안 사탕이 와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래서 격언에 오늘의 할 일을내일로 미루지 말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주저할 필요가 없읍니까 우리 보다 우리의 장래를 더 잘아시는 주님이 결정한 것이요, 우리를 누구보다 더 사랑하시는 주님이 결정한 것이므로 여기에는 잘못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즉시 아멘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을한다고 결정하는데는 실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저하는 것이 실수고, 안하는 것이실수 입니다. 그러므로 즉시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즉시]란 말이아주 많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읍니다.
[2] 다음은 2절의 말씀대로 풀어서 주님께로 끌로 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얽매어 있읍니다. 가정에 얽매어 있고, 직장에 얽매어 있읍니다. 환경에 얽매어 있읍니다. 사실 우리는 교회일을 할 만큰 한가한 사람이 없읍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풀어서 주님께로 끌고 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풀어야 합니다. 첫재로 죄의 끈을 풀고, 둘째는 세상의 끈을 풀고, 세번째는 이기주의의 끈을풀고, 네번째는 구슬의 끈을 풀고, 다섯번째는 고집의 끈을 풀어야 합니다. 여러가지의 끈에 꼭 꼭 묶여서는 주님께 올 수가 없읍니다. 그런데 그냥은 안 끊깁니다.
성령의 검으로 끊어야 비로서 끊깁니다. 말씀의 검으로 끊어야 이 단단하고 두꺼운줄이 끊깁니다.
다음은 주님께 끌고 가야 합니다. 누구나 교회일을 하고 싶은 사람별로 없읍니다. 다 편하게 믿고 싶고 편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간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주님께로 끌고 가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 보니 모두가 하나같이 황우고집을 가지고 있읍니다. 교회가 당신은 어떤 부서에서 봉사하는 것이 필요하니 그렇게 하십시요 했을때 순종하는 분 별로 못보았읍니다. 꼭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취미대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면 좀 고집을 꺽고 양보할줄도 알고 자신을 죽일줄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일하는 동기가 주님을 위해서요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이 라면 우리는 자신의 주장대로 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나를 쓰시는 분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복음송가대로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7절의 말씀대로 자기들의 곁옷을 얹고 그위에 예수님을 태워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이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저에게 목회를 쉽게 하기 위해 어떤분들을 업으라고 주변에서 말하는 분들이 없지 않아 있읍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저는 인간을 업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 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주님을 업습니다. 인간을 업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라고 할 수없읍니다. 바울은 갈 1:10 절에서 분명히 선언했읍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고 했읍니다. 여러분, 제가여러교인들의 비위나 마추는 그런 정치적 목회자가 되기를 바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람 비위를 마추는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위를 마추는 목회자가 되도록여러분들이 기도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유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태울려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당나귀 위에 얹어야 합니다. 겉옷은 계급장과 같습니다. 자신의 체면의 옷입니다. 나의 옛 사람의 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벗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사장노릇 하려고 하는 사람,전무노릇 하려는 사람은 예수님 못태웁니다. 교회에 와서는 다 양인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겸손한 주님을 태우려면 계급장을 떼야합니다. 체면의 옷을벗어야 합니다. 옛날 이승만 대통령은 정동 감리교회에 나왔을 때 목사님이 이 앞에와서 앉으시지요 라고 했을 때 거절하면서 저는 여기 대통령으로서 온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왔읍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바로 그런 자세 없이는 안됩니다. 총현교회에 아주 돈 많은 집사 사장이 계신데 그분은 우리나라에서도 알아주는 연탄회사 사장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 회사에 과장님이 바로 충현교회 장로님이셨읍니다. 회사에서는 장로님이 사장님에게 머리 한번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만교회에 오면 이 집사님이 과장 장로님에게 절대로 순종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와서는 사회에서의 계급장을 다 떼고 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계급장을 다 떼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회의 계급장을 떼지않고 그대로 가지면 은혜도 못받고, 덕도 안되고 자칫하면 구원도 못받습니다. 더구나 주님에게 쓰임을 받을 수는 없읍니다. 겸손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쓰시지 않기때문입니다. 모세를 쓰실 때도 그를 겸손하게 만든후였고 베드로 를 쓸 때도 그를겸손하게 만든 후였읍니다. 이사야도 그렇고 성경의 모든 인물이 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능한 사람은 쓰시지만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안쓰기 때문입니다.

4. 주님을 등에 태우고 주님에게 쓰임을 받았을 때 어떤 상급을 받는지 살펴보겠읍니다.
[1] 먼저 무리들에게서 찬양을 받습니다. 9절에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소리질로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라고 했읍니다. 주님을 등에 태우면, 주님에거서 쓰임을 받으면 세상에서 무리들에게 찬양을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등위에 탄 주님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던 못난이가 당나귀를 찬양합니까 그러나 등위에 주님을 태우면 무리들이주님 때문에 찬양을 합니다. 우리는 다 당나귀처럼 천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좀 잘났다고 해봐야 당나귀 인생입니다. 별것 아니예요 별것아닌 것들이 여기저기다니면서 당나귀 냄새 피워서는 안됩니다. 나는 감추고 주님이 나타나야지, 내가어떻게 주연입니까 등위에 계신 주님이주연이고 나는 그를 업고 다니는 조연이요엑스트라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박수치니까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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