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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그리스도 (눅 09: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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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하여 벳세다 빈 들녘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사건을 공부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제자의 도를 가르쳐 주신 사건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3년간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과 제자 양성의 결산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의 신앙고백의 의미가 무엇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도리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깊이 배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무리들의 신앙(18-19)

1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늘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① 복음 역사가 병 고치는 일 중심이 되었을 때 따로 기도하시고 영적인 방향을 분명히 잡으셨습니다.(눅4;42-44)
② 그리고 열 두 사도를 세우실 때는 산에 가셔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사도를 세우셨습니다.(6:12)
③ 그런데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또 따로 기도하셨습니다.(18)
이 때는 제자들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때요(9:1-10) 오병이어로 오 천명을 먹이신 사건이 있은 바로 직후였습니다.(9:11-17) 요한복음에는 오병이어가 있으므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자(요6:15)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공생애를 마치고 승천하실 기약이 가까이 온 것을 아셨습니다.(51) 그러므로 어느 때보다도 세상에 남아 복음 역사를 계승해야 할 제자들과 이들의 교육 강화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제자 훈련의 방향을 잡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첫째의 질문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18下) 입니다. 이 질문은 세상 사람들의 메시야관을 묻는 물음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관을 묻는 장소를 말하여 주지 않고 있습니다만은 마태복음은 가이샤라 빌립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에 3년 동안 몰려오는 수 많은 양 떼들을 섬기며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또 천국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년 동안 목자의 상한 심정으로 섬겼고 또 제자들을 내보내 전도를 했습니다. 이러했을 때 양들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가슴에 새기고 있는지 또 제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복음이 심겨졌는가를 알아보는 갈릴리 사역의 총평가라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의 대답은 매우 중요하고 또 그 사람의 신앙이 달려 있고, 이 대답에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에 따라 영생이 판가름납니다. 예수님께서 무리가 나른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시니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며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고 하나이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례미야가 하나 더 첨가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는 견해는 각기 다 달랐습니다.
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세례 요한과 꼭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 하였고(마3;2, 4:7) 또, 헤롯은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하였으므로 관가에서 부터 이 소문이 나므로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고 모두들 생각을 했습니다.
② 또, 더러는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한 번 말하면 우로가 있지 않았습니다.(왕상17:1-7) 또 사르밧 과부를 가루 한 움큼으로 3년 6개월의 가뭄을 이기게 하고, 갈멜산에서 바알선지 450명을 불로 응답 받아 죽이고, 또 엘리야는 죽지 않고 불수례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죽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야이로의 죽은 아이를 살리시고, 중풍병 들린 병자를 걷게 하시고,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고 열 두 바구니를 거두니까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를 예수님이 엘리야 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라 했습니다.
③ 또 마태복음 대로는 예례미야라 했습니다. 예례미야는 양 떼들을 위해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린 눈물의 목자요, 선지자였습니다. 예수님도 백성에 대한 상한 심령으로 여러번 우셨습니다. 멸망해 갈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를 몇 번을 안았더냐” 하시며 우시고,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셨습니다.(요19:35, 눅19:41) 이런 예수님을 보고 더러는 예례미야라고 했습니다.
④ 또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이 예수님의 단면만 보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엘리야, 예례미야,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도 예수님을 단면적으로 알고, 그는 위대한 사상가요, 위대한 교육가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또 예수님을 사대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아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학생들 같으면 예수님을 U.F.O를 타고 온 외계인으로, 그래서 E.T같은 존재로 생각합니다. 또 어떤 분은 예수님이 복이나 주는 분으로 예수님을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을 분명히 알고 돌아갑시다.
요한복음 17:3절에 “영생은 곧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심을 아는데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 교회에 다닌다, 교회의 member가 되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요, 내가 오래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요, 내가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요, 내가 교회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교회 헌금을 많이 하고 충성을 많이 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전도사님이 전도를 나갔습니다. 전도를 나가서 이 집 저 집을 전도하는 가운데 어느 집 대문 앞에 섰습니다. 대문에는 교패가 뚜렸이 붙어 있고 집이 깨끗했습니다. 전도사님이 정중하게 서서 초인종을 누르니까 안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전도사님은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지 않고 묻기를 “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여자:우리 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어머니는 권사이고, 오빠는 장립집사고 올케는 집사입니다. 그리고 저는 교사와 성가 대원입니다.
전도사: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여자:우리 집은 전부가 모태 신앙이고 3대째 교회를 나갑니다.
전도사: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여자:우리 집은 모두 교회에 충성을 많이 하고, 교회 성가대, 교사, 선교회 어디든지 우리 집이 빠지면 안됩니다.
전도사는 여전히 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시는가를 묻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묻기를 아퀴나스야 네 속에 무엇이 있느냐 물으면 내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Ⅱ. 베드로의 신앙 고백(20-21)

무리들의 신앙관을 타진하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제자들의 그리스도관을 물어 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가르치시고 눈물과 겸손으로 섬기신 다음 제자들에게 학년말 시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질문은 실로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가이사라에서 두번째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따릅니까 예수님을 잘못 알고, 믿고, 따르면 평생 교회를 다녀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잘 배워야 합니다.
구원은 들음에서 납니다. 성경을 잘 배우고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데서 구원을 얻습니다. 딤후 3:14절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느니라”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 부름을 받았을 때에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므로 많은 고기를 잡고, 예수님의 권능과 전능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3년을 가까이 따르며 많은 것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이를 만지시며 고쳐 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시요, 중풍 병자의 죄를 사해 주신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도 알았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또,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놀라운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이 처럼 베드로는 예수님과 24시간 함께 거하며 인격적인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물으실 때, 바로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시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7,18)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는 것만은 꼭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습니다. 뭐 능력을 못 행해도, 방언을 못해도, 귀신을 못 쫓아내도, 축복을 못 받아도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라는 것만 알면 이 사람이 행복한 자요, 복 받은 자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요한 웨슬레는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인 줄 알았으나 자기의 구주인 줄 모르고 선교사로 갔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령 아버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임하셔서 예수님이 여러분의 개인의 구주로 영접 받으시는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란 말입니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그리스도(CHIST 혹은 MESSIAH)시라는 고백입니다. CHIST란 헬라어이고 MESSIAH는 히브리어인데 “기름 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왕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렇게 기름을 부어 위임(委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왕으로, 선지자로 위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러 보내신 유일한 중보자에 대한 고유명사이겠습니다. 제사장, 선지자, 왕은 모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들이요,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① 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없애는 일을 합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대속죄 일에 백성의 모든 죄를 지성소에 가서 없이합니다. 어떤 죄를 지었던지 다 용서 받습니다. 그 기간은 1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우리의 죄를 온전히 단번에 없애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막2:5, 히10;10,12)
②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사망 권세를 파하시고 승리하신 영원한 왕이시요,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실 만왕의 왕이시요, 왕 중의 왕이십니다.
③ 예수님은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선지자들은 오실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예언을 했습니다만, 예수님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선지자로서, 선자들이 예언한 율법을 온전히 이루려 오신 율법의 완성 자로 오신 선지자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으로 부터 제사장으로, 왕으로, 선지자로 위임을 받은 그리스도로서 기름을 부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하였습니다.
또 요한 1서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자니”했습니다. 뭐 큰 역사가 없어도, 병이 낫지 않아도, 큰 축복을 받지 못해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중생 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Ⅲ. 제자의 도(道)(21-23)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했을 때,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21)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로마의 속국으로 살아온 관계로 해방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인 메시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 천명을 먹이셨을 때에도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 했습니다.(요6;15)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게 되면 민중들은 예수님을 세상 임금으로 받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복음 역사를 다 이룰 수 없고, 일직 알려져 잡혀 죽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경계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한 제자들에게 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제 삼일에 부활하실 것을, 분명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 바가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제자의 도(道)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⑴ 첫째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했습니다.
자기 부인(He must deny himself)이란 자기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믿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부정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5) 이사야 55:8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우다 책망을 받았고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꾸중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면 안된다고 자기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의 길이란 내 생각을 뒤로 미루고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⑵ 둘째, 제자의 길이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 <아무든지>라고 하였으므로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제자들이라고 특혜가 없습니다. 목사라고 특혜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① 먼저 자기 생각을 뒤로하고 주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하며 ②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쫓는 것입니다. <나를 쫓으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이겠습니다. 예수님에게 날마다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삶이겠습니다.
파리와 모기와 하루살이가 한 나절을 즐겁게 놀다가 해가 지는 황혼이 되자 파리가 하루살이에게 “우리 내일 다시 만나서 놀자”고 합니다. 그 말에 하루살이가 “내일이 뭐니”하고 묻습니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모릅니다.
여러분,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내일이 주어지는 것이지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그날그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제자의 길입니다.
⑶셋째, 역설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제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목숨을 잃으면 살리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한 부자가 있어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생각하기를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영혼에게 이르되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할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부자여 오늘밤에 내가 네 영혼을 부르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눅12:13-21)
중국과 일본으로 왔던 카토릭의 대전도자 사비에르(Francis xavier)는 그의 스승 로욜라(Ignatius Loyola)가 25절 말씀을 반복하여 들여 줄 때에 감격하여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내려오는 한문 글에 천금불여일신(千金不如一身)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 생명은 천금으로 주고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겠습니다. 예수님은 천하를 주고도 생명은 바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귀한 생명을 구원하는 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데 있고, 이 예수님을 믿어 얻은 구원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목숨을 잃으면 풍성한 삶을 누릴 것입니다.

199

4.

8. 2

8.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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