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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브로 전도여행 (행 13: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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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디옥 교회는 다섯 명의 영적 지도자가 있었는 데 이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성령의 음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그 음성을 들었을 때에 그들은 즉시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고, 금식을 하며, 결국에는 순종을 했는데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여 보낸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13장에서 보는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 파송 사건은 사도행전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를 2명 파송했다’ 그것이 무슨 중요한 일이냐 할지 몰라도 이것은 세계 선교에 문을 여는,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공식적인 시작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를 낳고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했다는 구조가 사도행전의 구조이며, 모든 지상의 교회의 구조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경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면 바나바와 사울이 어떻게 선교를 했는가 그들의 행동은 가깝고 익숙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배를 타고 어디로 갔습니까 구브로라는 섬으로 갔는데 이곳은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행4:36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 족속인이 있었는데 요셉이라. 사도들이 바바바라고 불렀습니다. 자기의 고향이니 얼마나 익숙하겠습니까 자기가 자라난 곳인데.
두 번째 구브로라는 곳에 살라미라는 항구가 있었는데 그 도시에 이들이 갔습니다. 거기 가서 어디를 찾았습니까 유대인의 회당을 찾았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에게 유대인의 회당이란 익숙한 곳입니까 익숙하지 않은 곳입니까 굉장히 익숙한 곳입니다.
세 번째 그들이 데려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마가라 하는 요한입니다. 이는 골4:10에 보면 바나바의 생질, 친척입니다. 친척이니 얼마나 익숙하겠습니까 고향입니다. 유대인 회당입니다. 수종드는 마가라 하는 사람은 친척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선교 전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는 팀워크라는 것입니다. 먼저 선교하기 전에 선교하려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서로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선교를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살라미에서 바보라는 섬으로 가게 됩니다. 6절, 7절,
바보라고 하는 섬에서 일어난 일은 선교사가 선교지에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 무슨 사건에 부딪히냐에 대한 전형적인 예를 보게 됩니다. 선교지에 가면 무당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그 지역의 토속 종교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무속 신앙을 만나게 됩니다. 6절에 보니까 바예수라는 거짓 선지자를 만나게 됩니다. 이름은 예수의 아들이라 해서 이름은 좋은데 무당입니다.
또한 그 다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꼭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토속 종교를 만나게 되고, 예수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기오 바울을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총독인데 총독은 로마의 원로나 황제가 임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총독이라고 하면 권력이 있는 통치권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 자기 예하에 박수 무당을 데리고는 있지만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자 했습니다.
세 번째 무당이나 전통 세력은 복음에 대해서 도전을 하고 방해를 합니다. 8절을 봅시다.
이 박수는 엘루마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서기오 총독이 예수에 관심을 갖자 예수를 못 믿게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해는 여러분의 집에도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려고 하면은 그 집의 주변 사람들이 못 믿게 난리를 치는 거에요. 이게 괜히 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장난입니다. 이상한 일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난리를 치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도행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때 바나바와 사울은 어떻게 대처를 했습니까 이점이 중요합니다. 9절, 10절을 보십시오. 여기에 귀신을 좇아 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잘 보시고 가정에 직장에 사회에, 그리고 내안에 있는 귀신들을 모두 내어 좇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속에도 있어요. 이상하게 은혜 받으려고 하면 속에서 난리를 치는 영이 있어요. 비비꼽니다. 새벽기도 갈려면 “꼭 그렇게 믿어야 되냐” “기도는 앉아서 낮에 해도 되고, 집에서 해도 되는데 꼭 그렇게 갈 필요 있냐” 그게 꼭 우리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렇게 별나게 믿는 사람 별 볼 일 없더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게 귀신 소리입니다. 비판하고, 욕하고 자기 안에 방해하는 세력이 막 나옵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째 그 순간에 바나바와 사울이 굉장히 놀라운 행동을 합니다. 그 순간에 주저하지 않고 직선적으로 말을 합니다. 엘루마 속에 있는 더러운 귀신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서 귀신을 추방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9절을 보니까 “성령이 충만하여” 귀신을 좇아 내려면 첫째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도 안하고, 기도도 안하고 귀신 좇아 내면 귀신이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너나 잘해’ 귀신이 영물이라 여러분이 기도 안하는 것을 잘 알아요. 여러분들이 예수를 잘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뒤에 가서 비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다 알아요. ‘너 어저께 죄지었지’ 이러고 나옵니다. “그러면서 날 좇아” 그렇게 나오면 대책이 없어요. 그러니 귀신에게 약점을 잡히지 말아야 해요. 그러니 귀신을 이기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있어야 합니다. 죄도 고백하지 않고 자기 안에 이런 더러운 것들이 많은데 귀신을 좇을려고 하면 귀신은 안 나갑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매일 말씀 안에서 성령 충만하라. 성령 충만하면 귀신은 아주 쉽습니다. 사람 대하는 것도 그래요. 기도 많이 하고 있으면 무서운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이 그렇게 안 무서워. 총들고 와도 안 무서워요. 교역자가 교인들이 무서우면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여기서 말하고, 저기서 말하고 그러나 기도하고 있으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이런게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하고 만나도 사람이 무서워졌다 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성령 충만하면 사람이 무섭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두 번째 성령 충만하여 엘루마라는 무당을 어떻게 했습니까 “주목했다”는 말이 참 중요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꼬리 내리는 개는 못이깁니다. 딱 째려봐야죠. 귀신이 있다. 꼬리 내리면 큰일나요. 등 돌리면 큰일납니다. 눈감으면 큰일납니다. 눈을 뜨고 싸우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해요. 지금 내안에 악한 세력이 있다이거요. 지금 내안에 욕심과 음욕과 타락과 이런 생각들이 오른다. 그러면 눈을 딱 부릅뜨고 직시해야 합니다. 싸우겠다고 하는 의지적 결정입니다. 약4:6절에 마귀를 피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저가 피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피해요. 아닙니다. 마귀가 피하도록 갈 때까지 주목하고 대적하고 공격하고 예수 이름으로 싸우는 겁니다. 우리가 쫓겨나서는 안됩니다. 마귀가 쫓겨나야 합니다. 우리가 분열되어서는 안됩니다. 마귀가 분열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귀를 싸우는 방법입니다. 다른 것은 그만두고라도 여러분 안에 있는 마귀를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꾸짖으라는 말씀입니다. “귀신이여! 떠나시기를 원합니다.” 이러면 안돼요. 귀신에게 호령을 해야 합니다. 소리지르고 명령을 하고 대적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탐욕, 사치스러운 생각, 시기, 질투, 미움, 음란, 호색 이런 것들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음란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의논하면 안됩니다. 명령을 해야 합니다. 꾸짖어야 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꾸짖고 야단쳐야 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너는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다. 너는 마귀의 자식이다. 너는 의의 원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자구나. 더러운 귀신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않겠느냐 그칠지어다.”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들도 하루에 한 번씩 내안에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내안에 들어오려고 생각하는 더러운 귀신은 물러갈 지어다!” 아침에 하루를 시작할 때 내 속에 들어오려는 마귀의 세력을 묶지 않으면 내가 하루 승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박사의 집이라 하더라도 서로 싸우게 하고, 시기하게 하고, 부부 싸움하게 하고, 화가 나게 하고, 부모님과의 관계를 흐트러뜨리려고 하고, 이런 모든 것이 다 마귀의 역사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묶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묶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집안에 예수님의 보혈이 흘러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이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찬송이 나와요. 아무리 험난한 시험이라 할지라도 사랑과 용서가 생겨납니다.
네 번째 귀신을 저주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사울이 굉장히 용감한 사람입니다. “눈멀지어다” 해 버렸습니다. 즉시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죽을 지어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봅시다.
막16:16을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은 도덕이 아닙니다. 윤리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영적 구원입니다. 영적 싸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가지 교훈은 9절을 다시 봅시다.
바울이라고 하는 말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입니다. 바울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이제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항상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극히 작은 자다.’ ‘죄인 중의 괴수라.’ ‘나는 지극히 연약한 인간이다.’ 나는 집이 있다. 돈이 있다. 이렇게 자랑하고 있을 때 자기의 능력과 실력을 자랑하고 있을 때 실패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연약한 자 중에 연약한 자 입니다. 자기 과시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일을 하신다.”라고 고백 할 때에 마귀의 시험에서부터 탈출해서 든든히 서 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집안에 있는 귀신들을 다 좇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귀신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다 묶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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