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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행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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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말씀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고니온에서 일어난 일이 되겠습니다. 1절, ‘그렇게 말하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말하던 그것을 똑같이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그 예수를 전했고 똑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들이 그 메시지를 전할 때 오해도 있었고, 핍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한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은 환경에 따라 움직이지 않습니다. 목적이 없는 사람은 환경에 따라 인생이 흔들립니다. 환경이 좋으면 자기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환경이 나쁘면 자기인생이 불행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환경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나쁜 환경 때문에 그렇게 비참해 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성공 때문에 웃고 실패 때문에 좌절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인생은 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죽기까지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메시지를 위해서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2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몰라서가 아닙니다.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4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왜 바울이 자랑할 것이 없겠습니까 그는 지성인 중에 지성인이요, 학문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보면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면 성경의 대부분을 그가 썼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외에는 할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할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다 별게 아닙니다. 시시한 것에 너무 중요한 우리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돈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라도 중요하고 민족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과 그리스도와는 바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이 중요한 것중에 하나로 보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를 예언자 중에 하나로 보는 것처럼, 기독교를 모든 종교 중에 하나로 보는 것처럼, 사람들은 예수의 가치를 모든 좋은 것중에 하나로 타락시켜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자 중에 하나로 예수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어떤 장소에 가든지 그들의 가슴속에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은 예수였습니다. 예수를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감격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있는 처지에서 그분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감격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했을 때에 모든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하나님의 복음은 능력이 따릅니다. 사도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들의 눈은 반짝거리기 시작했고, 가물어 메마른 땅에 생명의 단비가 내리는 것처럼 그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이 교회에 이 복음이 필요합니다. 살아 있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를 전해야 합니다. 세상 어떤 이야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2절,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복음을 들었지만 정반대로 반응하고 거부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분명한 게 하나 있습니다. 메시지는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시간도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메시지를 주었지만 듣는 사람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이 있고 안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고 비판하고 힐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놀랍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일부는 예배드리는 것으로 기뻐하고 또다른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는 양강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아버지여, 주님의 날에 나를 기억하옵소서”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또한 강도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는 네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그를 저주하고 비판했습니다. 똑같이 예수를 보는데 어쩌면 이렇게 두 가지가 다를 수 있겠습니까 메시지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메시지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이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들은 복음을 듣기도 전에 이미 불순종의 영으로 가득 찼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의 깊은 곳에는 마귀의 영, 불순종의 영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이 삐뚤어져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반항하는 것입니다. 무슨 좋은 일에도 일단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보면 말할 때 보면 비비꽈서 얘기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긁으면서 말을 합니다. 속을 박박 긁으면서 말을 해요. 부정적인 것만을 보면서 비난해요. 왜냐하면 불순종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일이 생기기 전에 이미 마음이 삐뚤어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려줘도 듣지 않아요. 아마 하나님이 와서 들려줘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큰 교만이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 도둑질을 했다. 간음을 했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삐뚤어진 영이에요. 불순종하는 영이에요. 거부하는 영이에요. 받아들이지 않는 영이에요. 항상 그 사람과 만나면 싸워요.
모든 사람을 이 관점에서 보세요. 순종의 영을 가졌느냐, 불순종의 영을 가졌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불순종의 영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거부하는 영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비비꼬는 영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영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뭐든지 순종하고, 뭐든지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 두 가지의 사람이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복음을 들으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사람은 그것을 비틀고 거부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3절,
이런 불순종의 사람들, 반항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세가지를 볼 수 있는데
두사도가 오래 있었다. 그렇게 반항하는 사람이 있을 때 도피하거나 바로 떠나지 않고 오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3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 거역하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래 참아 줘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기합니다. 포기하면 그 사람은 더 나빠집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기다려서 그 사람을 구원하십시오. 야고보서 1:4에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인내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적극적으로 담대하게 주님 안에서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러면 저가 너희를 피하리라.” 뒤로 밀리지 말고 그들에게 담대하게 악한 영에게 불순종의 영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적과 표적을 동반한 은혜의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와 은혜의 말씀, 바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바울이 말할 때에 능력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이천 년전이나 지금이나 할 것 없이 똑같이 기적이 나타납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과 눈에 보이지 않는 기적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입니다.
4절,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두그룹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이든지, 유대인의 편이든지.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했을 때에 편이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편이 갈라지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복음인 것입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오면 사단의 세력들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중간이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생명의 복음이 전파될 때에 변화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변화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마10:34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복음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듭니다. 참된 복음은 사단이 있는 곳에 불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불을 끄러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극성스럽게 예수를 믿냐 꼭그렇게 해야 하냐 점잖게 해야 되지 않느냐 교양있게.’ 이렇게 모든 성령의 불들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말씀의 불들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잠잠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소리도 크게 지르지 말고 찬송도 크게 하지 말고, 성경책도 촌스럽게 큰 것 들고 다니지 말고 조그마한 것들고 다니라고 합니다. 예수믿는 것 다른 사람에게 얘기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습니까 사도행전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미친 사람들 같습니다. 수준이 낮아서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수준은 높은데 미친 사람 같습니다. 이런 불이 타는 열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열정이 있을 때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불이 필요합니다. 이런 불을 가지고 세상을 태워야 하겠습니다. 이런 불을 가지고 우리의 더러운 것들을 모두 태워 버려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이빨 빠진 호랑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발톱 빠진 곰을 생각해 보십시오. 불쌍한 곰입니다. 불쌍한 호랑이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노리개밖에 되지 못합니다. 우리들도 힘이 있는 사람들인데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적당히 세상의 것을 먹고 살려고 듭니다. 그러다 보니 이빨이 없어지고 발톱이 빠져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었습니다.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에 눌려 있어요. 세상에 눌려 있어요.
사도바울 자신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빨 빠진 사자나 곰처럼 날개 깃털이 다빠진 독수리처럼 너무나 세상의 쓰레기들을 먹고 세상이 주는 잠시의 유혹에 달콤한 것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이러고 사는 것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불과 같이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만민중앙교회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많이 커지지 않아도 얼마나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과 같은 불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5절-7절,
돌로 칠려고 달려들어서 그들은 도피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디에서도 무슨 일을 만나든지간에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기회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 기회들을 복음을 증거하는 데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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