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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고보의 변론 (행 1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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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교회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논쟁은 구원이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도 필요하지만 모세의 율법을 동시에 지킴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냐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은 아주 심각한 것이었기 때문에 논쟁이 지나서 다툼까지 되었고, 이 문제는 안디옥에서는 해결을 볼 수가 없어서 사도들이 있는 예루살렘에까지 이 문제가 이송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내가 좀더 뭔가를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든지, 선행을 해야 한다든지, 금식을 해야 한다든지, 이런 율법적인 행위들을 해야만 완전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냐. 하는 논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이 문제가 이송이 되었을 때 유대인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바리새인 중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믿는 것도 좋지만 할례를 행해야한다, 예수 믿는 것도 좋지만 모세의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사도들과 장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거치고 사도 베드로는 일어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어떤 율법의 행위를 첨가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정말 참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구원되는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바나바와 바울이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통하여 하신 일을 간증을 합니다. 이것이 12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안디옥 교회의 목회를 통해서 그들이 발견한 것은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찾아오셨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원이 되어 주셨고, 성령의 역사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관심을 가질 수가 있을까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역사할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셨지만 전혀 제사를 모르는 이방인들에게서도 하나님은 역사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제한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한 분들은 자기가 믿는 방법이 하나님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기의 경험, 자기의 지식, 자기의 방법 안에 하나님이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의 생각과 경험밖에 하나님이 계실 때에 그들은 수용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경험과 생각 안에 가두어 놓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에 가두어 놓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은 엄청납니다.
이렇게 바나바와 바울의 간증이 있고 난 후에 총회장격인 야고보선생이 결론을 짓습니다.
13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야고보를 ‘기둥과 같은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결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14절, 15절에 야고보가 정리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큰 내용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이 이방인을 부르시는 사건. 이방인은 절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할례도 받지 않았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임하고, 기적이 임한 이 사건은 구약에 없었죠.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이 처음으로 직접 하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전통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믿을 수가 없지요. 베드로에게 이일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 받은 일은 사람이 만든 사건이 아니고 인간이 조작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의 예언과 약속대로 그 약속의 응답과 성취로서 지금 처음으로 하시는 일이다.
두 번째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이일은 무작정, 예고 없이 하나님이 생각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들의 예언대로 이루어 진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말한 것도 그들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체험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결정할 때 개인의 경험과 환상을 가지고 결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과 예언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아모스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이 바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이루어졌던 현장의 사건과 베드로가 경험한 모든 내용과 놀랍게도 모두 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구약에 있는 메시지와 지금의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구약 아모스서에 나타난 예언은 어떤 것입니까 16절, 17절이 그 내용입니다.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왜 다윗의 위를 폐하시지 않으시고 영영히 두게 하십니까 그것은 다윗의 그 자손에서 메시야를 나오게 하시고 그 메시야를 통하여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아모스 선지자는 오래 전에 기록을 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런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사건이었다. 아모스서에는 이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야고보는 이제 교회를 대표해서 두 가지 일을 결정을 합니다. 19-20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전통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탣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 왔던 교리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를 괴롭히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괴롭히기 쉽습니다. 예수를 주지 아니하고 다른 것들을 주게 됩니다. 율법을 계속 강요하면 예수 안 믿습니다. 윤리를 가리킵니다.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이것을 베드로 적으로 말하면 ‘네 조상도 너도 하지 못했던 능히 메지 못하는 멍에를 이방인에게 메게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아주 굉장한 결론입니다.
은혜 받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지는 것입니다. 내가 박살나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 받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틀렸구나’ 이것 깨닫는 겁니다. ‘내 주장대로 되는구나’가 아니고 ‘내 생각이 모두 잘못되었구나’ ‘내생각들이 모두 어리석었구나’ 이런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야고보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으로 다 끝나느냐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0-21절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의 살아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술담배라는 말로 생각해 봅시다. 술담배를 끊어야만 구원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술담배를 먹어도 구원이 있습니다. 잡수셔도 괜찮습니다. 술담배를 끊어야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나는 담배를 피우는데’ 합니다. 그래도 구원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내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좋아하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구원과 술과 담배는 전혀 상관이 없는가 술과 담배를 끊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술과 담배를 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우상 숭배하고 그렇게 세상적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이 행동이 바뀌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이제 구원을 받고 보니 구원받은 자의 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거지로 살았을 때는 거지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깡통 들고 돌아다니는 것. 그러나 왕이 됐을 때는 왕자의 생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둑으로 살 때는 도둑의 문화가 있습니다. 사기꾼의 문화가 있습니다. 깡패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니 깡패의 문화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고 술담배의 문화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의 이야기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구원받은 자 의 생활이 있는 것이다.
그럼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우상 숭배에 사용되었던 제물이나 음식이나 그런 물건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쉽게 하면 옛날에 섬기던 우상 문화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문화 속에 들어가면 다시 우상 숭배로 돌아가기 쉽기 때문에, 영적으로 위협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섬기던 우상 숭배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두 번째 음행에서 빠져나오라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가 있는 곳은 꼭 음행이 있습니다. 음행을 하게 되면 우상 숭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음행을 피하라.
세 번째는 목메어 죽은 것과 피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다 금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결정을 하고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 뿐만 아니라 두사람을 더 선택을 해서 안디옥 교회에 보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22-23절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25절,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고는 27절을 보니까 편지를 보낼 뿐만 아니라 말까지도 전하게 됩니다.
편지와 똑같은 말을 하는 데 28절입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잘되리라’ 이것을 순종하면 교회가 평안하게 될 것이다. 하고 그 부분을 마치게 됩니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거나 할례를 행하라고 하지 말아라.
두 번째는 그렇지만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있다. 우상 숭배의 생활을 벗어버려라. 음행을 버려라. 정결한 생활을 하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참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28절의 성령과 우리는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렇게 논쟁 끝에 드디어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할 때에 한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의 이 결론은 야고보가 내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베드로가 내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사람들이 토론해서 만장일치로 내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누가 한 것입니까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성령과 우리가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지금 여러분이 어떤 일에 결정을 했다고 합시다. 그럼 그것이 누구의 생각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생각입니까 아니면 성령의 생각입니까 혹 성가 대원을 한다고 합시다. 나오다가 안나와요. 하나님이 그만 두라고 해서 그만두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의 이런 저런 상황 때문에 그만두는 것입니까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일을 결정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신의 결정이냐 성령의 결정이냐 이겁니다. 분명히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논쟁을 했습니다. 토론을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결론을 내릴 때에 ‘나만 한 것이 아니고, 성령님이 우리가 함께 결정을 한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님과 함께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이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를 하지만 만약에 성령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봅니다. 정말 우리의 결정이 성령님의 결정입니까 아니면 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결정입니까
베드로전서 4:7-11에 아주 귀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성령님의 생각이 곧 내 생각이고 내 생각이 성령님의 생각이 되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려면 성경을 많이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게 되면 그 사람의 머리 속은 완전히 성경으로 가득차있겠죠.
두 번째는 기도를 많이 하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속에는 성령님의 생각이 끊임없이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말을 들을거냐 성경 많이 읽는 사람의 말을 들으십시오. 어떤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일거냐 기도 많이 하는 사람. 나이가 어리고 많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의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모든 결정이 성령님의 결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만민중앙교회가 살아나려면 새벽 기도회가 살아나야 합니다. 정말 무릎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면 이 교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성령님의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역과 아무리 많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다 헛될 것입니다. 성령님과 우리의 생각이 같아지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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