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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린도에서의 사역 (행 18: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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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전도행선지를 아덴에서 고린도로 옮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머물면서 전도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과 11절을 읽겠습니다.
아덴은 우상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는 음란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덴은 정치와 철학과 예술의 발상지입니다. 그러나 해변에 있는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도시로서 방탕과 쾌락과 물질과 음란을 상징하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때 그당시의 사람들은 음란한 사람이다. 말할 정도로 고린도도시는 그런 성격을 가진 도시입니다. 그리고 아프로디테라는 신전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약 천여명의 종교적 창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에 바울이 도착을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유럽으로 들어오게 하시고 고린도에서 사도바울에게 동역자 몇사람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복음은 혼자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협력하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있으면서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가 첫 번째로 그들은 동역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유명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2-3절,
이본문에 보면 아굴라라는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만 다른 성경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로 되어 있습니다. 이여자가 굉장히 영향력이 많았던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항상 여자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복음에 굉장히 열심히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글라우디로 칙령에 따라서 로마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여기에 재미있는 일들이 몇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바울과 직업이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로마에 살다가 상업지역까지 오게 됩니다. 그들은 ㅈ복음전도하는데에 전업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헌신된 그런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전문적인 목회자가 아니라 전교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님을 직업보다도 더 사랑하는 그래서 어느 때에는 직업을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요구됩니다. 이 부부가 충성스럽게 사도바울을 도와서 세계 복음화에 앞장서는 아주 중요한 사도행전의 모델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브리스길라와 아와 같은 부부들이 많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바울만 가지고서 다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직업이 같았는데 성경에 보니까 장막을 만드는 업이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당시에 개념으로 보면 단순히 텐트를 만들었다기 보다는 가죽제품을 만드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당시 고린도 교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교회가 조직적으로있지 않았기 때문에 성도들의 헌금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례비나 선교사의 사례비를 드리는 그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들도 시간이 나면 일을 해서 돈을 벌고 복음을 전도하는 그런 형태의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도바울의 전도의 개념을 가지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선교사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후에는 성도들의 헌금을 통해서 복음전도에 힘쓰게 됩니다.
4절,
주중에는 천막을 만들고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서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합니다.
직업을 위해 복음사역이 있는가 복음을 위해 직업이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성경에서 이런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직업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 직업이 우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직업의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돈버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주객이 전도되는 수가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부수적으로 적당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직업이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우선순위가 바뀌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직업을 가질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해서 직업을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 수도 있고 주님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5절,
두 번째 만나는 사람은 실라와 디모데가 베뢰아에서 내려옵니다. 그래서 다시 합류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하므로 바울에게는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돌아와서 같이 합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고 말합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항상 말씀에 붙잡혀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붙잡혀 있습니까 돈에 붙잡혀 있습니까 성공에 붙잡혀 있습니까 다달라요. 사도바울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사실을 전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었스니다. 그것을 위해 직업이 존재했고 그것을 위해서 그의 인생이 존재를 했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예수는 메시야다.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그는 이런 사실을 곳곳에 다니면서 전합니다.
그것을 누구에게 접합니까 유대인에게 먼저 전합니다. 사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역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언제나 먼저 찾아가는 것은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 대해서 그렇게 복음을 열심히 간절한 마음으로 전하는데 짝사랑이에요. 안믿을뿐더러 반항을 하고 대적을 합니다. 얼마나 바울이 속상하겠어요. 이방은 열정적으로 감격하는데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믿어요.
6절,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얼마나 속상했으면 이 말을 했겠습니까 옷에 먼지를 다 털어버리고 나는 너희의 피값에 대해서 깨끗하다. 너희의 머리에게 돌아갈 지어다. 하고서는 나는 간다. 사도바울은 자기 동족들의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삶은 다 구원시키고 자기가족은 구원 못시키는 사람 심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피눈물 나는거에요. 예수님께서도 자기 고향에서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세 번째 동역자들을 보게 됩니다. 7-8절,
아마 디도 유스도라고 하는 사람은 고린도에 살고 있던 사람인데 그를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집은 마치 회당옆에 있어서 그리스보라는 회당장과 친했던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유스도라는 그리스도인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고, 거기에 자주 왔다갔다하는 회당장을 만나게 되었고, 그 회당장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 회당장이 예수를 믿게 되었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스보에 대한 기록은 온 식구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부모님은 예수를 믿지 않고 홀로 믿고 있는 사람들, 얼마나 어렵고 힙듭니까 그들은 항상 부러운 것이 부부가 함께 교회에 오는 것, 온 식구들이 함께 교회에 오는 것이 늘 부럽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참 몰랍게 온 가정이 예술ㄹ 믿게 되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도 온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16장에 나오는 간수의 가정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온 가정이 예수를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보라는 회당장에게는 또한가지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그사람 때문에 고린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축복이 따르기를 바랍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고린도은 일년 반동안 차분히 고린도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결과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9-10절,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를 했을 때 편안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9절, 10절에 주님께서 밤에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보여줄 정도면 굉장한 갈등과 고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통해서 고린도라는 곳이 어떤 곳이며 그곳의 영적 상황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압니다. 여러분 참으로 부패하고 음란하고 패역한 그곳에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갈등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 주님이 밤에 환상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첫 번째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
왜 두려울까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해가 다가올 때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한다고 키가 한자나 자랍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열심히 두려워합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고 드려워 할 때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믿는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근심걱정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핍박이 있다할 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라.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기를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 메시지는 침묵하지 말라. 복음을 선포하라. 복음을 전하면서 내가 손해를 볼 것 같을 때는 굉장한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령이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할 말을 해라.”
세 번째 메시지는 “나는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처럼 좋은 메시지는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민수기 23:19에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셨다면 그 약속은 확실한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 주와 맺은 언약은 영불변하도다.” 여러분도 이런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다.”
사 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네 번째 말씀은 “너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너를 훼방할 자가 없을 것이다.
로마서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됨이니라.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이 믿음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번째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 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고린도에 일년 육개월을 두셨을까요 왜 그렇게 부패하고 패역한 도시 속에 살게 하셨을까 하나님의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 백성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니느웨성에 있는 12만명의 사람들을 하나님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1절,
일년 육개월을 그들 가운데서 거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자기가 필요한 곳에서 일년 육개월을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더좋은 고슬곳으로, 더 좋은 지장을 찾아서 떠나시겠습니까 아니면 내가 필요한 곳에 희생하며 머물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결정을 합니다. 그러나 복음 중심으로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주의 복음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내가 더 좋은 직장과 더 좋은 월급이 있을지라도 안갈 수 있다. 일년육개월, 바울에게는 그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는 겁니다. 있으라 하시면 있는 것입니다. 하라하시면 하고 하지 말라 하시면 안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중심이 무엇을 중심하고 있느냐 여러분의 이익이냐, 하나님의 영광이야 여러분의 편안함이냐 아니면 불편함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냐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복음에 사로잡히게 하시사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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