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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그립바 앞에서 (행 26: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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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2년 동안 갇혀 있었는데 총독이 바뀌었습니다. 벨릭스 총독에서 베스도 총독으로 바뀐 것입니다. 벨릭스 앞에서도 재판을 받았고 베스도 앞에서도 재판을 받았지만 죄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는 재판이 가이사 재판으로 넘겨 가게 되었는데 재판권은 없지만 유대인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바울이 또 서게 되었고 자신을 변호하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26장의 내용입니다.
1절,
사람은 언제든지 자기를 변명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또 변명할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물론 그런 기회는 자기를 변명할 수 있는 기회로 100% 활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여기에 보면 예외였습니다. 그럴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자신을 위해서 변명하지 않고 그 기회를 100% 주님을 전도하는 기회로 사용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그럽게 들어 달라’는 말은 끝까지 들어 달라는 뜻입니다. 이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사도 바울의 가슴은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을 변명할 기회가 생긴 것이 아니라, 이제 또 한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쪽 보다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쪽을 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자신을 소개를 하는데 자기의 과거를 잠깐 요약을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자신의 어떠했나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당신들처럼 나도 율법과 조상에 충성한 사람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4-5절을 봅시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젊었을 때 엄격한 율법 훈련을 받았다. 그는 가말리엘 학파에서 훈련을 받았고 엄격한 바리새인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지금도 까만 옷을 입고 엄격한 훈련을 받습니다.
이런 자신이 과거에 엄격한 삶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지금도 얼마든지 유대인들이 나를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서 재판을 받고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소망 때문에,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소망 때문에 이렇게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6-7절,
재판을 받는 이유는 한 가지 문제 때문인데 한 가지 문제는 유대인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 소망, 바로 메시야 대망 사상인 것입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굶주림 속에서도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한 소망 메시야라는 그분을 그들이 기다려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셨고 12지파가 간절히 밤낮으로 소망했던 그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가 믿는 예수가 메시야냐. 구약에서 약속하신 소망이신 메시야냐. 유대인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부활함, 부활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못 믿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에요. 부활하고 나니까 그분이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거에요. 그래서 소수의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그 사람들은 이분이 메시야다. 이분이 부활했다. 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엄청난 사건이에요. 이것은 자기 종교 전체의 뿌리를 흔들어 버리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8절을 봅시다.
지금의 이야기가 8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우리와 같이 생활하던 그가 구원자란 말인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바울도 바울되기 전에는 똑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믿을 수 없었던 메시야. 예수가 자기에게 나타난 것을 직접 경험한 거에요. 그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후로부터 사울은 자기의 인생을 바꿔 버렸습니다. 이분은 그리스도다. 이분이 메시야다. 이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하나님이 다시 살린 그분이다. 이런 일 때문에 이런 것을 믿지 못했던 유대인들에게 핍박과 고소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흥분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고, 모함하고 감옥에 집어넣은 것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래서 아그립바 왕에게 이러한 사실들을 다시 한번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9-10절,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사도 바울은 자기도 예수를 핍박했다. 순 사기꾼. 순 엉터리.
나사렛의 한 청년이, 그 사람이 우리의 메시야라니. 그는 믿어지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고’ 이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이단을 생각하는 마음하고 똑같겠지요. 이런 사람들은 죽여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생각을 하고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데에 힘쓰게 된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11-12절,
국내에서만 이렇게 하지 않고 외국에 가서 예수 믿는 동족 유대인들을 다 잡아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나 바울을 죽이려고 먹지도 않고 바울을 죽이려는 40명의 사람이나 똑같은 거지요. 바울이 그 사람들보고 웃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나도 옛날에는 너희와 같았다. 그렇게 미워하고 그렇게 분해했던 그 사람이 자기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는 그 때 자기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13절,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그 때에 정오에 강렬한 한 빛을 보았다는 거에요. 이것은 지중해에 정오에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떤 빛이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그 빛은 자기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있던 동료들까지 함께 경험을 했다는 겁니다. 그 빛을 만난 순간 그들은 다 쓰러지게 되었다. 이것이 주님의 빛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얼굴이에요. 빛보다 더 강한 빛이 있는 주님의 얼굴이에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하얀 주님이세요. 그런 주님의 모습이 왔을 때 사울과 동료 사람들은 빛으로 알았어요. 그러나 빛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였어요.
14절,
이 빛을 보고 나서 모두는 쓰러졌어요. 여기 재미있는 말이 ‘히브리 방언’이라는 말이 나와요. 히브리 방언으로 들렸어요. 이것은 실제적으로 들린 음성이에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도행전 9장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부분에는 한 가지가 더 덧붙여져서 나옵니다.
그것은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고, 핍박하고, 감옥에 집어 넣으려고 하는 모든 행위는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다. 즉 이 말은 헛수고라. 돌을 차면 뭐만 아파요. 자기 발만 아파요. 나는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하는 이 일은 하면 할수록 네 발만 아픈 일이다.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일이다.
여러분, 우리가 잘한다고 하는 일,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일이 사실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었어요.
15절,
바울은 주님의 음성에 대해서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런 질문을 했습니다.
사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나와 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나는 네가 무시하는 예수다. 나는 네가 잊어버린 예수다. 나는 네가 두 번째로 놓은 예수다. 나야 너의 두 번째 밖에 안되는 예수다. 좋은 것은 다 네가 갖고. 보면 교회에 좋은 것은 내놓지 않더라구요. 좋은 시간은 내가 다 쓰고, 젊음은 내가 다 쓰고 주님 앞에는 늙음만 드리오리다.”
이게 다 똑같은 얘기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나를 네가 무시하고, 네가 나를 그렇게 없는 것처럼 여겨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최고로 생각한다. 이런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쓰러져 있는 사울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16-18절,
예수님께서는 청년 사울에게 몇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일어나 네 발로 서라.’ 주님은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똑같은 이 말씀을 하십니다. ‘일어나 네발로 서라’ 이 말은 두 가지 말로 합쳐져 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네 발로 서라’ 뒤돌아 서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한 목표를 향하여 일어나라. 우리는 이웃 때문에 주저앉게 됩니다. 뒤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 번째 말합니다. 네 발로 서라. 튼튼히 서라. 한 목표를 향하여 걸어라.
“(행26: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사환과 증인을 삼기 위해서. 사환은 종이라는 뜻인데 일꾼이라는 말입니다. 일꾼과 증인을 삼기 위해서 그렇다. 오늘 너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한 은혜를 경험한 것은 특별한 일을 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왜 특별한 은혜를 주십니까 보통 일 하지 말고 특별히 더 주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이렇게 경험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내가 너에게 특별히 나타나고 특별히 음성을 들려준 까닭은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해야 할 일 때문에 너는 나의 일꾼이요, 나의 사환이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세 번째 그러면 하나님이 바울을 부르시는 일에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방인을 부르시기 위해서다. 왜 이방인에게 보내는가 눈을 뜨게 해서 어둠에서 빛으로 오게 하는 이유다. 두 번째는 이방인들을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다. 세 번째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예수 믿고 죄사함을 얻어서 거룩한 무리를 만드는 데 있고, 그 거룩한 무리들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하여 너를 내가 이방인에게로 보낸다.
바울은 이유가 분명해 졌습니다. 오늘 우리의 살아가는 이유가 분명해져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는 그 시점에서 그는 자기의 존재 의미를 확인했습니다. 뭐든지 의미를 알면 쉬워집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 의미를 알면 삶이 기뻐지고 충만해 지고 그리고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을 빛을 보게 하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 주는 일,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니엘 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에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추리라”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는 자를 자유케 하는 일, 우상 숭배, 물질, 세상 정력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기업을 만드는 그런 일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사환과 증인으로 삼았다.
나를 핍박하는 것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신분 두 가지를 발견합니다.
첫째는 사환의 신분입니다. 사환, 옛날에는 사환이라고 불렀습니다. 종이라는 말을 대신해서 머슴이란 말을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머슴입니다. 머슴은 주인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머슴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개념은 우리는 예수님의 머슴이다. 머슴은 자신의 삶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로지 주인의 명령과 뜻이 있을 뿐입니다. 머슴의 대명사는 무엇일까요 순종입니다. 이유 없습니다. 순종입니다. 그리고 머슴은 자기가 무조건 순종하고 그 일에 대해서 기뻐해야 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이런 사람은 머슴이 못됩니다. 그리고 머슴에게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일하는 것만큼 대우를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머슴으로 사시겠습니까 괜찮겠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머슴으로 취급해도 괜찮겠습니까
또 하나는 증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삶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분을 높이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머슴으로 사는 것입니다. 머슴은 일꾼입니다. 하나는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종으로 시작해서 증인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이렇게 아름답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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