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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드디어 로마에 들어가다 (행 28:16-28)

첨부 1


사도행전에 마지막은 바울이 로마로 입성하는 것으로 끝을 냈습니다. 그가 팡파르를 울리면서 입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으로 초라하게 입성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로마 입성은 사도행전이라고 하는 이 책을 규정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어떤 책인가를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의 입성은 개인적이었고, 초라한 것이었지만 유럽 전체가 변하는 그런 입성입니다.
어떤 한 개인의 삶이 그저 세상에 태어나서 배우고,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에 가고 결혼하고 잘 살다가 세상을 떠날 수도 있지만, 어떤 한 사람의 생애는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생애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로마의 입성은 유럽 전체를 뒤흔들어 놓는 영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입성이었습니다.
16절,
로마에 들어갔는데 바울을 지키는 그 군인이 바울을 계속 따라다니지 않고 바울을 자유롭게 놔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신용을 얻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는 자유롭게 예수님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굉장한 축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축복이란, 참된 기쁨이란 감옥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부자가 되었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건강하냐 병들었느냐가 아닙니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가 아닙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큰 기쁨과 축복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리스도를 전하고, 말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주어진다면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삼일 후에 신분이 높은 유대인을 초청해서 자신의 처지를 말합니다.
17-19절,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유대인들 중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불러서 자신을 변명하고 자기의 삶을 설득을 합니다. 자기가 민족을 배반했거나 조상들의 규모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는 복음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했습니다. 타협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그가 할 수 있는 겸손을 다합니다. 머리 깎으라면 머리를 깎습니다. 머리 기르라면 머리를 기릅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제사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런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갈등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겸손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들이지만 그가 인간적으로 복음이 훼방 받지 않기 위하여, 자기 체면 같은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는 열심히 자기를 변호합니다.
간혹 예수 잘 믿는 사람은 자기가 예수 잘 믿는 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례히 행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가 아닙니다. 복음이지. 복음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신분이나 처지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겸손하게 자기의 입장을 설명합니다.
‘내가 민족을 배반하거나 우리 조상이나, 우리 민족들의 규모를 내가 흩으러 놓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20절입니다.
내가 이렇게 죄인이 되어 로마에 온 것은, 내가 돌아다니면서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는 이유는 한가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다. 내가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에 쇠사슬에 매였다. 그럼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메시아이신, 인류의 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다시 똑같은 결론에 돌아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외에는 나는 모든 것을 분토로 여기겠다.” 그가 지식이 없어서도 아니요, 관심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고상하신, 참으로 인류의 왕이신 참 메시아이신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예수 외에는 모든 것을 다 감추어 버리겠다.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원한 가치, 참된 진리를 붙잡은 것입니다.
21-22절,
유대인들은 바울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아 우리는 편지 받은 일도 없고 이스라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시끄럽게 하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아는데 너의 사상이 무엇인지 들어보자’라고 반응을 합니다.
이 말씀에 참 위로가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점은 ‘뭐든지 부딪쳐 봐라.’입니다. 선입감, ‘저 사람은 전도가 안될 것이다.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할 것이다. 저 사람은 나를 반대할 것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가 하고 싶던 일들을 주저 할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변명하는 것도 이런 뜻이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부딪쳐 보니까 당신의 얘기를 좀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두드리세요. 안된다고 포기하지 말고 또 두드려 보세요. 저 사람은 전도 안 될 것이라고 포기하지 말고 또 두드려 보세요. 하나님이 그 사람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켜 놓은지 모르는 겁니다. 과거로 현재를 다 규정하지 마세요. 바울은 그렇게 두드렸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주시는지 모릅니다. 안되면 또 부딪치고, 안되면 또 부딪치고,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좀 들어보자’
23절,
일자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바울이 있는 곳에 왔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울은 강론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 전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딴소리 안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도행전이 끝나는 31-32절을 한 번 보십시오.
거기서 무엇을 가리켰습니까 첫째는 하나님 나라요,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십자가만을 말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부활만을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다른데 관심이 많아요. 다른데 관심이 많으면 중요한 것에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자기를 제한시키는 겁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상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지 알아요.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옵소서.”우리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이 욕심을 가지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썩어질 것을 보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죠. 이것을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전할 때 그 앞에 표현들을 보십시오.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했던’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은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세 오경의 율법은 예수님을 말하고 있다. 선지서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를 전하지 않고 예수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교파를 전하지 않고 예수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교파나 교단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을 전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어떤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이름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관심이어야 하겠습니다.
바울이 이런 설교를 하니까 두 가지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24-25절,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마가복음 16:15-16 보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복음을 전하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현실입니다. 이성의 문제가 아니고 영적인 문제입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복음에 대해서 귀를 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오면 마음을 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들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결과는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런 내용을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을 했는데 그 내용을 사도행전에 쓰고 있는 겁니다.
26-27절,
이사야가 오래 전에 이 문제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아무리 전해 줘도 망할 사람들은 안 들어요. 망할 사람들은 꼭 망해야 속이 시원해. 말을 안 들어요.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고, 성령의 음성을 전해 줘도 너무너무 답답하게 안 들어요. 자기 백성들이 포로에 잡혀가서 뼈아픈 고통을 겪을 것을 말해 줘도 백성들은 안 들어요. 그걸 보면서 바울이 이사야의 예언을 말하는 겁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것은 반어법의 표현입니다. 결론은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말해도 안되는구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사람이 되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 쪽에 서지 마십시오. 어떤 때는 두 세계 속에서 왔다갔다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도 있고, 성령 체험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편에 서세요. 이성과 지식과 경험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있고 안 믿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 분명히 서세요. 두세계가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있고,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28절,
사도 바울은 유대인에게의 이 복음이 이방인에게 흘러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8절은 사도행전 전체의 결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메시아를 보내도 그들은 메시아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복음을 이스라엘이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이 어디까지 왔습니까 여러분과 나에게까지 왔고, 이 복음은 온 세상으로 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복음이 오면 온 세상이 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요, 이것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사도행전 전체 요절이 무엇입니까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오순절 날에 성령이 오셨고 교회가 생기며 복음이 증거 되고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옴으로 복음이 온 세계로 퍼져 갔습니다. 결국은 성령이 임하여 능력을 받고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사도행전의 중심 메시지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어떤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까 큰 교회입니까 작은 교회입니까 조직이 잘된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크던 작던, 능력을 받아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땅끝까지”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듣지 못하는 온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까지를 의미합니다.
29절,
(없습니까) 없으니까 없다고 써 놨지요.
그러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있습니다.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큰 논쟁을 하며 물러가더라” 그들 사이에 상당한 논쟁이 있더라. 이것이 개역에는 빠져 있습니다.
30-31절,
제일 감동적인 부분입니다. 이 엄청난 복음이 바울에 의해서 세계의 수도라하는 로마에 전해지는 데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셋방, 이것이 감동적인 것입니다. 죄수가 셋방에서.
사도 바울은 큰 장소에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건물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는 건물에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제도에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큰 교회가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있는 교회가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교회가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셋방살이 하는 사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셋방에서도 큰 일은 일어납니다.
2년 동안 셋집에서.
그 거대한 로마가 하루아침에 기독교 국가로 변화된 것은 사도 바울에게 셋집에서 조용하게 교육받았던 사람에 의해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큰 것이 큰 일은 아닙니다. 조용하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실된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빛처럼 소금처럼 스며들어간다면 일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30-31절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쓰고 있고, 내가 사도행전을 쓰고 있고,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귀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모든 세상에 미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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