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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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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사도 바울을 따라서 2차 3차 전도 여행에 함께 동참했고 나중에는 사도 바울이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로 호송되어 갈 때도 로마까지 함께 간 의사 누가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었든 시기를 학자들이 대략 57년과 62년 사이로 추정하므로 이 사도행전의 기록한 년대도 아마 그와 비슷한 62년 전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누가는 이 사도행전을 기록하기 전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누가복음을 먼저 기록하고서 그 다음 후편으로 이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이 사도행전을 누가복음의 후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사도행전을 온전히 이해할려면 먼저 예수님의 교훈과 생애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록인 누가복음서를 읽고 이해하고 나서야 이 사도행전의 뜻이 더욱 분명히 이해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복음됨의 성격을 사도행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의 목적이 바로 복음의 성격을 설명해 주는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사도행전은 전반에 거쳐서 복음의 연결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시고 가르치시고 많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에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 처럼 여겨집니다. 십자가에서 끝나고 부활에서 복음이 다 끝나고 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줍니다. 활기 넘치는 성령의 역사가 복음의 역사가 이 후편인 사도행전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복음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지든 사건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사성에 의해서 이루어졌든 것이 이제는 예수님의 영에 의해서 복음의 역사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생각한다면 그 목적에는 더욱 깊은 면이 있습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역사성을 지녀냐 한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리란 역사적이어야 하고 사실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발견했다거나 누군가 우리를 보고 해박하게 설명하거나 하는 추상적인 이치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는 역사적인 사실로 출발해야 합니다. 진리란 역사적이어야 합니다. 역사성을 지녀야 하고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사건이 사건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모든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사건은 전파되어야 하고 증거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 사건을 믿으면서 그 사건의 효력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그 진리의 생명성, 그 진리의 역사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특정입니다.
여기에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증거되어가는 것입니다. 줄기차게 만방에 전해지고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까지 전해집니다. 그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귄한 사실이 사도행전에서 시작됩니다. 보시는대로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부딧치는 사건이 오순절 사건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그 오순절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사도행전은 누가복음과 연결해서 부활절과 오순절 관계를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를 너무 어렵게 설명해서도 안되겠습니다 마는 너무 쉽게 이해하려 들어서도 안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정도로는 알아야 합니다. 부활절없는 오순절은 신비주의에 빠집니다. 주관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가 하면 오순절없는 부활절은 객관성에 치우치게 되어 결국은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순절과 부활절을 함께 해석해야만 합니다. 부활절없는 오순절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순절없는 부활절 역시 어떤 역사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두 사건을 함께 이해함으로써 비로소 기독교의 진리가 확고하게 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내용은 그 촛점이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십자가와 부활이 엄연한 사건, 소중한 사건이 이제 오순절을 통하여 증거되고 오순절을 통하여 믿어집니다. 그리고 오순절을 통하여 우리는 모두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절과 오순절은 뗄래야 뗄수 없는 아주 중요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를 빌려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부활사건이 신앙 사건으로 화하기 까지에 오순절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역사가 있고야 부활 사건이 신앙사건으로 바꾸어지고 그렇게 될 때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비교해 보면 어느 교회에서나 모든 교리를 고루 고루 전합니다마는 그 중심에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 카토릭 교회에서는 주로 십자가에 역점을 둡니다.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에서는 부활에 더 역점을 둡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개신교에서는 성령의 문제, 오순절에 더 역점을 두는 편입니다. 이렇듯이 각각 특정이 있는 것입니다.
신학적 목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게는 큰 수수께끼가 하나 있습니다. 정작 유대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떠나 이방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큰 수수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그 이유를 유대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유대사람들은 예수믿는 사람들을 끈질기게 쫒아 다니면서 철처하게 핍박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이같은 사실을 누누히 증거합니다. 얼마나 끈질긴고 하면 남의 동네에 까지 따라가서 핍박할 정도였습니다. 제 돈을 써가면서 훼방합니다. 사도 바울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예수 믿기 전까지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든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오려고 다멕섹까지 가든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살리려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죽이려고 간 것입니다. 그토록 극성스럽고 악착 같았던 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그렇듯 핍박함으로 기독교는 이방으로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기독교를 핍박한 데에는 하나님의 높으신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만일 예루살렘에서 기독교가 고스란히 수용되고 말았다면 아마도 기독교는 땅끝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핍박과 환난이라는 것이 기독교를 멀리 흩어지게 했고 온세계로 전해지게 했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입니다. 기독교가 땅끝까지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핍박을 통해서 입니다. 핍박이라는 것에 실려서 기독교가 땅끝까지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교에서 환난과 핍박을 결코 배제할 수 없습니다. 환난과 핍박은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시초에서 부터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아주 놀라운 선교적 역사 의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의 세계성을 일깨워줍니다. 복음은 결코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고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되기까지 숱하게 이방종교에 부딧치고 이방철학에 부딧치고 이방 문화에 부딧치면서 그럴 때마다 어떻게 변증해 나갔느냐 하는 귀중한 방법을, 그 비결을 그 생명적 역사를 사도행전은 누누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음이 전파될 때에 그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불교는 우리 종교요 기독교는 서양종교라고 생각하는 것 처럼 무식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불교가 인도 종교지 어떻게 우리 종교입니까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 같아서 미안합니다만 사실 불경은 인도 말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보니까 인도말로 된 불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문으로된 불경을 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오리지날이 아닌 것입니다. 불경은 인도말로 되어야 합니다. 원래 석가모니가 인도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불교도 국산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교는 서양종교요 불교는 우리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무식하기 짝이 없습니다.
무릇 종교가 온 세계로 확장되어 나가면서 그 나라의 문화에 부딧치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이방철학, 이방종교, 이방문화가 만나게 될 때에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사도행전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해답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전파에 더없이 귀중한 지침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배워야 할 또한가지는 교회론입니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가 비롯된 바로 그 무렵에 기록된 것이니까요. 오순절 교회, 초대 교회, 교회의 오리지날입니다. 아주 근원적인 맨처음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 교회의 생생한 모습이 있고 본질이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선교가 무엇인지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선교되기 위한 증거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행전이요 복음의 행전이요 성령의 행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이 말하고 있는 멧세지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메세지의 첫번 요점은 교회의 의미입니다.
교회의 전신은 히브리 사람들의 회당입니다. 그리고 회당의 뿌리는 선민 사상에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을 통해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역사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선민 사상을 모아놓은 공동체가 바로 그들이 말하는 공회당입니다. 공회당이 그들의 공동체요 교회의 전신입니다. 이제 기독교로 오면서 교회가 생겨나는데 그 의미를 선민 사상에서 찾습니다. 거기에 뿌리를 둡니다. 교회가 진짜 선민이요 유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은 그림자에 예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닭게 됩니다.
오늘의 이 교회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림자로, 예표로 PROTOTYPE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진짜는 바로 교회다. 교회가 원점이다. 참승리자는 그리스도인이다. 참 하나님의 백성은 교인이다. 이렇게 설명되는 것입니다. 선민으로 택함받은 교회,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 이 오묘한 이치를 사도행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다소 어렵더라도 정신을 차리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메세지의 두번째 요점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이 오순절의 주제이니까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고 성령을 어떻게 받느냐는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사건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데서 부터 성령은 능력으로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닭는 기독교 교리는 철학이 아니요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능력입니다. 간혹 보면 밤낮 성경책을 붙들고 앉아서 성경공부한다고 하면서도 말만 많이 늘어놓을 뿐 자기 하나 중생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없이 성경 공부는 사람을 못쓰게 만드는 것 뿐입니다 성령이 반드시 함께 하여야 합니다 지식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것은 철학에 불과 합니다. 추상적인 이론에 불과 합니다. 성령을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를 받고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능력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데체 무슨 능력입니까 죄를 이기는 능력이요. 뭇사람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능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곧 능력입니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성령 스스로가 고용하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고용하여서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이점을 설명하는 것도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사람을 고용하십니다. 사람을 붙드시어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여러 곳에서 이 점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령에 이끌려 가고 성령에 이끌려 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문을 여십니다.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여시지 않으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여심으로 생전 처음만난 사람에게 딱 한마디 복음을 전했을 뿐인데도 그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바로 그곳에 교회가 섭니다.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사람, 인간의 언어, 인간의 문화까지도 다 고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간혹 내가 성령을 받아서 내 마음대로 역사하는 줄로 착각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하는줄로 생각합니다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나를 고용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대단히 깊고 큰 진리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우리는 성령에 이끌리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주로 후자를 말씀하십니다. 은사적인 성령의 역사가 바로 사도행전이 말하는 메세지의 주제라 하겠습니다.
세번쩨 메세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교회의 통일성입니다.
교회의 연합성입니다. 교회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사도신경)을 하번 보십시요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교회와... 성령과 교회를 하나로 연결합니다. 성령론안에 교회론이 있고 교회론안에 성령론이 있습니다. 성령과 거룩한 교회가 하나로 통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의 교회나 예루살렘 교회나 오늘의 교회나 내일의 교회나 교회는 하나입니다. 오직 하나의 교회를 말씀합니다. 분명히 그 뿌리가 하나입니다. 거룩한 하나의 교회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 말씀하는 주제입니다. 도처에 교회가 있고 여러 모양의 교회가 있습니다만은 결국은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요. 데오빌로여 하고 시작합니다. 데오빌로는 데오스 라는 말과 필로 라는 말이 합해진 것으로 전자는 하나님을 후자는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데오필로라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말이됩니다. 이에 대하여 여러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만은 일반적으로 이 데오필로라는 말은 한사람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었든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사람을 상대로 우리 교회에 대하여 변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기독교는 이런 종교입니다 라고 변증하기 위하여 데오필로에게 헌증된 글입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여기에는 변증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데오필로가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할 때에 여기에는 교육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써게 된 것입니다. 물론 궁긍적으로는 이 편지는 데오필로를 대상으로 삼았을 뿐 그 실은 모든 교회가 모든 교우들이 읽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의 편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의 복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 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시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1-3)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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