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원하시는 이름 (행 04:1-12)

첨부 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사건을 공부했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이 사람은 사십 년이 지나도록 앉은뱅이로만 살아왔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나름의 문화를 토대로 한 종교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자나 환자에 대하여 가지는 나쁜 교리도 그것입니다. 사람이 병드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그래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환자를 불쌍히 여기기 보다는 멸시하고 무시했습니다.
환자나 병자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풍조는 다른 여러종교에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라든지, 불교를 보면 그렇습니다. 부모가 숱한 고생을 한다고 합시다. 자식은 그 고생을 전생에 죄를 지어 받는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업보는 당하고 있는 것이기에 내가 구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부모에게 효도하거나 도움을 주는 마음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렇고 보니 누가 고생을 한다거나 병에 걸렸다거나 해도 당연히 업보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보니 세상에 구제할 일도 없고 불쌍히 여길 일도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종교라고 하는 것이 이렇듯 무섭습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세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를 보고 예수님께 처음 입을 열어 무엇이라고 질문합니까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절)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사람들이 병자나 환자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병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시각입니다. 우리도 장애자나 병자를 불쌍히 여기고 똑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가끔 보면 소경을 만나거나 할 때면 재수없다 라고 말하거나 느기는 사람이 있어요.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의식의 뿌리에는, 맨 밑바닥에는 이런 좋지 못한 종교적 편견이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마는 부모도 형제도 다 그를 버린 것 같습니다. 그저 사람들이 성전 미문에 메어다 놓으면 하루종일 거기에 앉아서 구걸로 목숨을 연명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서다가 그를 보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이, 성령이 임하시어 그 앉은뱅이를 일으키게 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에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섭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베드로를 칭송하고, 앉은뱅이에게 축하의 말을 해줄 법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렇지를 못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 사건을 놓고 시비가 벌어집니다. 이때에 베드로가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9절) 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착한 일 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앉은뱅이를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일으켰습니다. 공개적 치유입니다. 공개적으로 나타난 능력입니다. 바로 이 사건을 두고 시비가 벌어집니다.
호사다마 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했으면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선한 일을 했다고 해서 칭찬만 들을 것이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 어떤 선한 일에도 비난이 있고 시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사실을 잊은 채 내가 좋은 일 했는데 왜 말이 많으냐 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행한 착한 일에도 시비가 따랐는데 우리같이 부족한 사람이 하는 일에 시비가 없겠습니까 그 어떤 아름답고 선한 일에도 시비와 비난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왜 시비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한편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으면 한편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대립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영광이 돌아가는 일이 저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한번 그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생각해봅시다. 이 앉은뱅이가 몇 년동안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저 돈 한푼 주는 것이 고작입니다. 별다른 구제의 방법이 없습니다. 특별히 제사장도 많은 날 동안 들며날며 그 앉은뱅이를 보아왔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적선을 했는지는 모르나 그 역시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다른 구제의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제 하찮은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가 권위있게 일어나라 하는 한마디로 그 앉은뱅이를 일으킵니다. 그러니 그 제사장의 체면이 뭐가 되겠습니까 성전의 책임자는 대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은 높은 지위의 사람입니다. 긴 옷을 입고 영광스럽게 제사일을 행하면서 높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일은 베드로가 행했습니다. 베드로가 높임을 받는 순간, 영광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각, 제사장의 체면은 말이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사는 순간, 명예가 훼손되고 인격과 권세가 격하하고 추락하는 순간입니다.
때로 보면 이 사람에게 칭찬이 돌아갈 때에 저 사람에게는 부끄러움이 돌아가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동생을 칭찬하게 되면 형이 부끄러워지고, 형을 칭찬하면 동생이 부끄러워집니다. 여러분, 자녀에게 한 번 누구네 집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또 일 등을 했다는 구나 라고 말해보십시오. 아마도 그 아이는 나 들으라는 소리구나. 공부 못한다고 나무라는 소리구나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치가 너무 빨라서 걱정입니다. 이 사람을 칭찬하는 순간 저 사람은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제사장처럼 성전에서 봉사하는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 이 사건은 아주 결정적이요 치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크게 부끄러워지는 사건이었습니다.
본문말씀 1절로 4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성전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 이튿날까지 가두었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왜 체포된 것입니까 앉은뱅이를 일으킨 그 사건의 정치적 파급효과가 너무 컷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섰다는 사건은 개인이나 교회나 사회에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때에는 그 파급효과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게 되고, 그 지지를 이용하여 다른 정치적 사건을 일으킬 것이라고 저들은 지레 겁먹은 것입니다.
제사장, 성전을 맡은자, 사두개인은 한마디로 다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2절)... 기독교에 있어서 복음전파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러니 부활을 전할수 밖에요. 그런데 이 부활의 도로 말미암아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에게 큰 손해가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먼저, 저들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영혼불멸은 믿으나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리새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으나 사두개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교리적으로 이렇게 대립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제사장은 서로 다른 직책이지만, 그 보다는 사상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큰 차이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이에 반하여 제사장은 진보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정치와 타협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딴에는 좀더 깨끗하고 정결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은 로마의 권력과 타협함을, 가장 중요하게는 교리적인 믿음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들은 부활을 부정하나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믿었기에 서로가 적대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는 하나가 되고 연합을 했습니다마는, 저들은 이렇듯 만나면 싸우는 사이였습니다. 대립관계에 있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기분이 나쁘지만, 내심 부활의 전파는 좋아합니다. 자기편이니까요.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에게 봐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들이 지금껏 주장한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다. 부활은 있다. 천사도 있다 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때문에 제사장의 입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저렇듯 부활을 주장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세력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기들의 반대당이 득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이 부활의 도 전하는 것을 싫어했던 것입니다.
또한 당시의 제사장과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레위 족속 사두개인들은 귀족입니다. 또 부자입니다. 로마와 적당히 타협하면서 권력을 유지하고, 귀족의 신분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가며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기존 질서가 변혁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는 여당이 아닙니까 언제나 귀족은 여당편입니다. 정치가 흐릿하고 경제가 어둡고 해도 돈많은 사람들은 기존질서가 흔들리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은행에 저금해놓고 그 많은 돈, 정치가 흔들리면 다 휴지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어쩌고 저쩌고 해도 여당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야당편입니다. 옛날의 선거구호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사실 무책임한 소리요 위험한 소리입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심지어 공산당도 OK입니다. 공산당이 들어선다고 해서 이보다 더 못살라구 합니다. 그래서 까짓것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족은 그 개혁을 거부합니다. 안정을 원합니다. 될 수 있는대로 변혁을 원치 않습니다. 변화가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나타나서 저렇듯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다닙니다. 이것이 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아가 기존의 질서를 흔듭니다. 사두개인들은 기존의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귀족적 지위와 부를 지켜나가는데에 베드로와 요한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붙들어놓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누가 시켰느냐 함입니다. 가만히 보니 그런 일을 할 만큼 대단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고 틀림없이 배후자가 있을 것 같았던 모양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깨끗하고 정숙해야 할 성전이 더러워지고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제사장들은 이것을 과감히 치우지를 못했습니다. 성전이 장사꾼들로 말미암아 날로 침해되는 것을 알면서도 내몰 수 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권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더러움이 극에 다다랐으므로 예수님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어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13절) 서슬푸른 이 질타에 그 누구도 대항하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셨으니까요. 이미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터라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대로 다 쫓겨났습니다. 성전이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바로 그 시각, 제사장의 꼴이 아주 우습게 됩니다. 자기들이 해야할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으니까요. 잘못을 알면서도 하루하루 타협하고 지내느라 더러워진 성전을, 자기들이 개혁해야 했는데 못함으로 더러워진 성전을 예수라는 청년이 나타나서 개혁하는 것이고 보니 자기네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붙들어다놓고 질문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23절). 이것은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베드로와 요한에게 한 질문과 같습니다. 사실 저들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피해서 묻는 것입니다. 묻고 싶은 질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을 수 밖에 없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는 저의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뉘 이름으로 하느냐, 배후가 누구냐 하고 질문함으로 이 일을 반사회적 반정치적인 거사인양 끌어가려 합니다. 소란죄로 몰아서 정치적으로 처리하려 합니다. 종교문제를 정치문제로 돌리는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런 수법이 핍박의 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순교사를 한 번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죽이겠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고 하면 살려주겠다 할 때에 그 양자택일의 길에서 죽음을 택함으로 순교한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전부 종교적이요 신앙적입니다마는, 그 형식이나 모양새는 전부 정치적이었습니다. 소란죄, 반정부 반정치적인 죄로 몰아서 예수믿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돌려서 죽이는 것입니다. 로마에 반역했다, 왕을 배신했다. 이런식으로 옭아매어 죽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보십시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로마에 반역하여 일어난 정치적 운동으로 각색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도 그렇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 라고 묻습니다. 굳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 이라고 굴레 씌우는 것은 정치적인 문제로 꾸며 예수님을 쉽게 제하자는 음모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신다면 왕은 로마황제 한 사람밖에 없다는 그들의 정치에 반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했다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적 종교적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돌려서 핍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은 다시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8절) 라고 말씀합니다. 그 시각, 성령이 충만했다고 합니다. 이 충만 이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령의 일반적인 은혜에는 중생과 성화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중생하게 됩니다. 나아가 성령의 궁극적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특수한 것이요 사명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은사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다 라는 것은 가득찬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정신이 몽롱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신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닙니다. 흔히 착각하듯이 엑스터시를 경험한다는, 절정을 경험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계시를 받는 순간도, 환상을 보는 순간도 아닙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아주 맑은 정신입니다. 똑똑한 정신입니다. 그런데 간혹 보면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을 정신이 몽롱해지고 헛소리가 좀 나와야 하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충만하다 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먼저, 성령이 충만해짐으로 영적인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제는 어떠한 고난이 있다 해도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