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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선에 대한 심판 (행 0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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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나타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유감스러운 사건입니다. 성령 충만한 초대 교회에 왜 이런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 세속화된 교회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하고 유무상통 하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같은 유감스러운 일이 있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 부부가 세 시간 사이에 차례로 베드로 앞에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말 이들이 죽을 죄를 지었느냐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설영 죽을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이렇듯 죄지은대로 엎드러져 죽는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 형벌이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아예 안바치는 사람도 많은데 절반이라도 바쳤으면 됐지, 이것이 죽을 죄가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돈을 좋아하시고 재물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뇌물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유를 바쳤습니다. 절반을 바쳤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면 된다고 했는데, 십일조가 기본인데, 보십시오. 그 소유의 절반이나 바쳤으면 많이 바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절반을 바치고도 저주를 받아 죽어야 했단 말입니까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사람, 봉사한다는 사람, 헌금한다는 사람, 하나님 앞에 온 생을 바쳐 희생한다는 사람은 더더욱 오늘의 본문말씀을 깊이 이해하고, 이 말씀에 담긴 경고와 깊은 계시적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과 구약 여호수아에 나오는 아간의 사건을 비교해서 생각합니다. 사실 비교할만합니다. 성서학자 벵겔은 두 사건에는 유사점이 많다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신약교회가 시작될 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있었고, 구약에서는 구약교회라고 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아와 가나안으로 정복해 들어가는, 아주 큰 승리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바로 그 벽두에 아간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둘 다 굉장히 큰 사건입니다. 교회 시작의 벽두에, 하나님 사역의 벽두에, 하나님 축복의 벽두에 그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브루스는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속이는 사건이요, 하나님 백성의 승리에 대한 무궁한 발전을 가로막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시작되어 날마다 부흥하고, 수천 명 수만 명씩 그 수가 늘어나고,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충만한 은혜를 즐기고 있는 그 시각에, 무궁무진하게 온 세계를 향하여 부흥하고 발전해가야 할 계제에 왜 이런 일이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왜 이런 사건이 여기에 있어야 했느냐 하는 말입니다. 아나니아와 사비라의 사건만이 아닙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해들어갑니다. 이제 나라를 세우는, 꿈에도 잊지 못한 그 귀중한 역사 앞에 아간이라는 사람의 사건이 생겨서 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습니다. 나아가 그 사건은 가나안으로 정복해들어가는 엄청난 역사를 저지하게 됩니다. 얼마나 유감스러운 사건인지 모릅니다. 두 사건 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과 아간의 사건에는 또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재물의 얼마를 감추고 있다는 점이 같습니다. 아간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탐내어 취했습니다(수 7:21).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소유를 판 값의 얼마를 감추었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1, 2절).” 여기서 ‘감추다’를 헬라어 원문대로 직역해보면 ‘자기몫을 떼어 놓았다’ ‘자기몫을 챙겼다’라는 뜻입니다. 바치고자 했으면 먼저 다 바쳤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몫을 먼저 떼어놓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몫을 떼어놓는 행위, 이것이 바로 감추는 것입니다.
아간은 욕심쟁이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나아가 싸우면서도, 거룩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금덩이가 번쩍하니까 이것 숨겨놓았다가 나중에 한몫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욕심에 매여서 정신을 못차린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원인입니다. 그런가하면 아나니아는 위선적인 죄를 짓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빙자하여 자기의 명예, 자기의 위신, 자기의 체면을 챙기려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어떤 점에서 계시적 사건입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우리 모두를 향하여,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은 대표적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일벌백계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들이 대표가 되어 당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들만을 볼 때에는 불행한 일입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모두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표적 사건입니다. 과거와 현재에도 그랬듯이 후세에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많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향한 경고적 대표적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서 주고자 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교회는 결코 영적인 낙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면 다 거룩하고, 다 은혜롭고, 다 진실되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광야교회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광야교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합니다. 지금 우리는 애굽과 가나안의 중간 과정인 광야에 머물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적인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 지상의 교회는 이렇듯 완전하다든가 거룩한 성역이 아닌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 안에는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무슨 잘못된 일이라도 생기면 크게 실망합니다만, 그럴 것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모습이니까요. 광야교회이니까요. 교회는 영적전쟁 마당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악마와 더불어 싸우는, 죄와 더불어 싸우는 곳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여러분, 교회는 영적인 낙원이나 성역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는 배신자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절)-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교회 안에 사단의 역사가 들어와 있다고 말씀함입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합니다. 많지도 않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초대교회가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험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아니, 메시아가 자기 제자에게 속다니, 자기 제자에게 팔리다니, 말도 안된다. 어떻게 그럴수 있느냐’라는 비난의 소리와 함께 많은 시험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공부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 1장에서부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라고 성경을 통해서 해석해놓고 사도행전이 기록됩니다. 가롯 유다의 사건이 초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의 하나였습니다. 이 의문점에 해답을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안에 배신자가 있습니다. 없어야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배신자가 있을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나 가롯 유다가 될 수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열심히 믿는다는 사람, 교회를 위하여 일을 많이 한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배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간혹 보면 교회에 불미스러운 문제를 일으키는 교인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아니, 그분이 몇십년 동안 교회에 얼마나 열심히 봉사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믿었는데 그럴수가 있어”하고 깜짝들 놀랍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열두 제자 가운데서 가롯 유다는 남달리 신용이 있어서 전대를 맡아 회계를 보았습니다. 그런 그였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래 믿었다. 교회일을 많이 한다. 봉사에 열심이다 하는 것이 결코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절대 가롯 유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럴 분이 아닌데’ 합니다. 오히려 오래 믿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이미 사단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마귀가 들어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대로 사단이 내 마음에 가득하여 그만 시험에 빠지고 만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시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또한 아름답고 선한 초대교회에도 어두운 면이 있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초대교회는 유무상통하는 교회입니다. 서로들 자기에게 있는 것을 팔아서 아깝지 않게 사도들에게 가져다 바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진정 은혜가 충만한 모습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 이러한 행위, 이러한 순간 속에서도 어두운 면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6, 37절을 보십시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앞에 두니라.” 바나바라고 하는 평소 존경받는 사람이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많은 존경을 한몸에 받았을 것입니다. 저렇게 큰돈을 바치다니, 저렇게 귀한 일을 하다니, 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한 일로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그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있어진 사건이라는 데에 교훈이 있습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한다. 교회는 위선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교회에는 이런 시험이 얼마든지 있을수는 있으나 그것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는 교훈이 이 사건에 담겨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의 설립 벽두에 이같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다시한번 여기에 나타난 사건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해석해 봅시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요. 삽비라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격국은 은혜롭지도 아름답지도 않았습니다. 이름만 좋았을 뿐, 은혜도 아름다움도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삽비라가 예쁘게 생겼던 것 같습니다. 아나니아도 남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처럼 의젖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다운 사람이요 준엄하고 존중을 받을만한 인물로 출중하게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 ‘아름다움’이라는 뜻깊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실은 둘 다 이름과는 반대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통하여 여덟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특수한 죄입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그 속에 이미 악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 악은 세상에 있는 악이 아닙니다. 교회안에 들어가 있는 악입니다. 믿는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악입니다. 그것은 악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있는 악이 아닙니다. 선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악입니다. 악한 행동을 하는 마음 속의 악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의 마음 속에 역사하는 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특수한 죄입니다. 선행을 위장한 죄입니다. 나아가 이것은 성도들을 타락시키는 사단의 고등 술책입니다. 여기에 성도들이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둘재로 생각할 것은 이들이 얼마나 감추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재물의 일부를 감추기는 했지만 그것은 남의 것을 훔친게 아닙니다. 제것을 훔친 것입니다. 도둑질치고는 참 이상한 도둑질입니다. 제 물건을 가지고 시험당하는 것입니다. 보시다시피 남의 물건을 가지고 갔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물건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함으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내 물건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함으로 어떤 의미에서 도둑질하는 것이 되어버렷습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탐욕입니다.
탐심이 커져서 이것이 어느 한계에 도달하면 질투가 됩니다. 무엇을 가지고 싶은데 결국 가지지 못하게 될 때에 우리는 질투하게 됩니다. 탐심과 질투는 마치 자매와도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탐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욕심과 시기 질투를 뚝 떼어버리고 예수믿어야 제대로 믿을 수 있습니다. 탐심과 질투를 마음에 품고서 예수믿는다면 계속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선한 일을 해도 시험에 빠집니다. 선한 일을 하는 동안에도 자신도 모르게 이 일을 해서 내게 돌아오는 이득이 얼마인가를 생각합니다. 남이 하는 선행을 시기합니다. 내가 하는 선행을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다 탐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의 소행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건강과 운동의 관계에 대하여 기술해놓은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니 성인병을 예방하려면 적절한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명심할 것은 같은 운동이라도 질투심 많고 경쟁심 강한 사람이 하는 운도은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옳은 말이다 싶더군요. 승부욕이 강한 사람은 운동을 해도 무조건 이기려고만 하기에 쉽게 열을 내고 얼굴이 노래지고 합니다. 그리고 앉아서는 남이 지기만을 바라고, 남이 실수하기만을 바랍니다. 남이 잘할 때에는 박수칠 마음이 전혀 없다가도 남이 실수하면 좋다고 박수칩니다. 이런 심사를 가진 사람은 운동을 해도 무효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공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남이 못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시험치는 날이면 공부 잘하는 친구가 감기에 걸렸으면 좋겠다. 심지어는 오다가 차사고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못된 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시기 질투 정욕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면 무엇을 해도 말썽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은 남이 한시간 기도하면 나는 두시간한다. 남이 열흘 금식하면 나는 이십일 금식기도 한다.-이렇게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선한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기가 아주 불순합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탐욕이 문제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탐욕에 대하여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소유를 팔았습니다. 처음에는 다 바칠 마음으로 판것같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 바나바처럼 바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돈을 한움큼 손에 쥐고보니 그 마음이 확 바뀝니다. ‘이것을 다 바쳐 이것을 벌려면 내가 일생토록 일을 해야 하는데’하는 생각에 반을 떼어놓고 바치게 됩니다. 보십시오. 그들은 소유를 판 값의 반만 가지고 사도들 앞에 나갑니다. 정 그렇다면 처음부터 “이것은 반입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고 바쳤으면 좋았겠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 바치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반만 바치면서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미 내 몫을 떼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팔아놓고는 내 몫을 먼저 챙겼습니다. 그리고는 다 바치는 것처럼 했습니다.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문제에 대하여 아주 심리학적으로 분석하여 말씀합니다. “땅이 있는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4절)” 참으로 멋진 말씀입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더냐, 팔아도 되고 안 팔아도 되는데 누구 팔라고 그러더냐, 안팔면 그만이지 왜 팔면서 시험에 빠지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땅은 마음대로 할수있었는데 돈은 마음대로 할수없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 번 추리해보십시다. 아마도 그들은 땅을 팔때에는 그것이 비싼 땅인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팔때에는 보니 아주 비쌉니다. 생각보다 돈을 많이 받았습니다. 여기에서 탐욕이 생긴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라고 꾸짖습니다. 어째서 자유를 빼앗겼느냐,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 거룩한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왜 사단에게 빼앗겼느냐, 욕심에게 빼앗겨 자유를 잃었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자유로 시작했으면 마지막에도 자유로워야지 어째서 여기에 인색한 마음, 아까운 마음, 아쉬운 마음이 따랐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탐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위선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돈으로 거룩한 명예를 사려고 했습니다. 바치기는 바쳤으면서 다 바쳤다는 칭찬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바치기는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면서 칭찬을 사람들로부터 받으려고했습니다. 결국 그들이 마음을 쓴 것은 하나님도 아니요 성령도 아니요 그리스도도 아니요, 오로지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일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 교회의 행정원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던 교회는 교역자들의 수고하는 것 혹은 심방하는 것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보고하게 합니다. 물론 그 목적은 교회행정의 파악에 있지만 때로 보면 그것이 구속이 됩니다. 오늘 어느 집 심방을 갔다고 하면 저녁에는 그 결과를 문서로, 구두로 목사님에게 보고하게 합니다. 매일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는 그런일이 없습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하루에 한 사람을 만나도 좋으니 하나님 앞에 성실해야 한다. 사람을 만나도 좋고 안만나도 좋고, 심방을 가도 좋고 안가도 좋으니 하나님 앞에 성실해야 한다.’ 보고를 받으면 어떻고 안받으면 어떻습니까
오래전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에 저도 보고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때에 보니 교역자들이 일곱집 심방했습니다. 열집심방했습니다. 하고 보고서를 써오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한집 심방간 것에 불과합니다. 한집에 심방가면서 그 근처의 교인 가정들을 잠시 들러본것입니다. 물론 숫자로는 맞지만 실제로 심방한 것은 한 가정인 것입니다. 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왜 이런 형식적인 보고를 계속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어느정도 성실하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기 싫은, 잘못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시험입니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하나님 앞에 성실히 일하고 사람들에게 신경을 안씀으로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 안한다고, 일하는 것 못 봤다고, 성과가 없다고 비난합니다. 사실 일은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하는 것에 노력이 더 많이 들어갑니다. 마음도 더 많이 쓰이고 수고도 더 많이 들어갑니다. 사실 실적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어쩌다 일이 잘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 수고함으로 잘되기도 하고, 많이 수고했는데도 불구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수고한 땀과 노력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실적만을 가지고 말합니다. 결과만을 가지고 말합니다. 이것처럼 잘못된 비판은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선교사 한분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선교본부에서 너무 까다롭게 따지니까 선교하러 나가 일하는 시간의 절반을 편지쓰는 데에 보내게 된다고 말입니다. 보고서 작성하느라 선교사업을 해야 할 그 귀중한 시간의 절반을 흘려보낸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짓입니까 왜 이레야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 자신을 나타내려고, 사람에 대하여 신경을 쓰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고 일할 것입니다.
예수님게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마 6:3,4)”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계 기도하라(마 6:6)”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참으로 심각한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람 앞에 보이려고 하는 구제는 하나님께로서 상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보십시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의 일을 빙자해서 사람 앞에 칭찬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근본 동기는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이 목적이었지 하나님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았을뿐, 그 목적과 중심과 동기는 자기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이처럼 큰 죄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도둑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납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큰 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은 참으셨지만 당신을 우상화하려하는 것은 참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정면으로 침해하고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경건입니다.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경건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너무 마음을 썼기에,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데에 급급하여 자신의 소유를 다 바친 척했습니다. 다 바친 척 위장했습니다. pretend했습니다. 여기에 죄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번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집사님에게 긴히 할말이 있어서 찾아보았더니 안보입니다. 그날이 마침 주일날이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분들에게 부탁해서 그 집사님 좀 찾아보라고 했더니 교회에 안나왔다고 합니다. 그날 예배를 마친 다음에 공교롭게도 그 집사님이 하는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가게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주일 휴업’이라고 써붙여놓았습니다. 그런데 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가게를 닫는다고 해놓고는 나중에 알고보니 놀러갔더라구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예수 잘 믿기 때문에 주일날은 장사하지 않습니다 하고 ‘주일 휴업’을 써붙여 놓고는 낚시질을 간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짓입니가 하나님을 속이는 일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여섯 번째로 그들은 진실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속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을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가 되는지 모릅니다.
일곱 번째로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니라가 머리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절)”라고 말씀합니다. ‘함께 꾀하여’-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사실 거짓말도 IQ가 110은 되어야 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워낙에 어수룩한 사람은 거짓말도 못합니다. 하는 거짓말마다 들통나고 맙니다. 그러니 머리좋은 것 자랑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IQ가 190이 넘으면 감옥에갈 소지가 있다고 합니다. 노력이 없고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만 믿기 때문입니다. 머리 회전이 이렇듯 빠른 것은 어찌보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거짓말할 때에만 그 머리가 잘 돌아감으로 소위 말하는 완전범죄를 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대개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바보짓을 하고 맙니다. 똑똑한 것 같으나 헛똑똑한 것이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땅을 판 값의 일부를 감추어놓고는 다 바친 것처럼 위장했습니다. 근사하게 위장했습니다. 그리고는 요새로 치면 집사님 장로님 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머리가 참으로 잘 돌아갔습니다마는, 결국은 그 잘못이 들러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공모를 했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1,2절)” ‘우리끼리만 알자’하고 둘이 공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느 시간에든지 ‘우리 둘만 압시다’라느 sakf을 하는 순간에 그 인격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우리끼리만 알자’라니요. 잠시는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에는 백일하에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다 드러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우리끼리만 알자, 우리 둘만 알고 남들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말자-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악이 되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어느 교인 가정에 심방을 갔을 때입니다. 모두 모여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밖에 거지가 와서 자꾸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그 집 주인이 평소 버릇대로 자기도 모르게 제 앞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이에게 “애야, 나가서 엄마 없다고 해라”라고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나가서 “엄마가 엄마 없다고 하래요”라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망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짓말하는 것이 워낙 체질이 돼놔서 제가 옆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짓입니까 여러분, 거짓말하고 공모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남을 죄짓게 하는 죄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궁합이 잘 맞는 사람들입니다. 둘 중 하나만 똑똑했어도 그렇게는 안됐을 것입니다. 둘 중 하나만 진실했어도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정신을 차렸다면 “여보, 그게 무슨 소리요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소 어떻게 그런짓을 할 수 있소 안바치면 그만이지 바치면서 시험당할 것 없지 않소”하고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쟀든 그들은 나쁜면으로 궁합이 딱 맞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궁합이 맞는다고 하니까 그것이 사랑이겠거니 생각합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욕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장’이라고도 일컫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데에 함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거짓말하는 데에 공모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가와서 잘못된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그 잘못을 지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상할까봐, 옳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은 그 자체로 무서운 죄가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공모한 죄가 있었습니다.
여덟 번째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의 영적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교회의 영적 권위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사도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절)” 이 한마디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엎드러져 혼이 나가 죽게 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교회의 영적 권위, 그리스도의 권위, 하나님의 권위를 온전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온 교회가 두려워하게 되엇습니다. 경건을 찾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살고, 겸손하게 살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축복입니다마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위선자에게는 그대로가 심판인 것입니다. 남들이 다 좋아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그 시각에 그 두 사람은 죽어야 했습니다.
여러분, 치유만이 표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심판도 표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바로 그 산 증거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듯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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