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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증인의 길 (행 05: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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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모습, 그 방법, 그 결과를 그림을 보여주듯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저들은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설교를 하든 성경을 가르치든 적어도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모든 일에는 증거적 성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증거’라고 하는 말은 엄격히 따져 말하면 가르친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증인이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증인은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본대로 들은대로 말할 뿐입니다.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내가 직접 보고 들었습니다.-그것뿐입니다. 여기에 자기 인격이나 자기 철학 같은 것은 전혀 개입될 필요가 없습니다.
법정에서는 증인은 자기를 설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재판장이 묻는 대로 대답만 하면 됩니다. “그 자리에 있었느냐”하면 “있었습니다”하고, “보았느냐”하면 “보았습니다”라고, “들었느냐”하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자기가 체험한 것만을 말하면 됩니다. 자기 의견이나 자기 철학을 내세우고, 나아가 무슨 설명을 하고 ...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증거라고 하는 것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증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사건이 그에게 현실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Actualize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건이 있습니다. 분명한 사건이 있습니다마는, 그 사건을 모르고 있는 한 그것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엄연한 사건이요 중요한 사건입니다 마는, 내가 모르는 것이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려야 하고 믿게 해야 합니다. 믿어야 그 사건이 나에게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선물을 사러 갑니다. 준비하러 갑니다. 그런데 정작 선물을 받을 당사자는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이제 누군가가 이것을 알려야 합니다. 알릴 뿐만 아니라 믿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건화 하는 것입니다.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것이 믿어지는 순간부터 선물 받을 사람은 받을 때를 기다리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듣지 못했을 뿐더러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있을 때에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건에 대한 믿음이 중요합니다. 때문에 누군가가 전해주어야 하고 믿게 해주어야 합니다. 증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이 일에 증인이요(32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파하고 증거하여 믿게 하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마르튀스’라고 하는 이 ‘증인’은 영어로 옮기면 martyr가 됩니다. 순교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대로 자기의 생명을 바쳐 피를 흘려 증거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순교적으로 증거하는 사람이 증인인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나아가 순교를 하면서 증거하는 것입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서 말하자면 증인은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죽으면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증거하겠습니까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만나보았습니다. 라고 증거합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기 때문에 아깝지 않게 순교를 할수 있습니다. 순교만이 부활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순교를 하겠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나도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이겠다고 하면 ‘아니오’하고 펄쩍 뒤로 물러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난 92년 10월28일을 휴거일로 정한 사이비 종교단체들 때문에 사회적으로 얼마나 혼란스러웠습니까 그 휴거일을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 보십시오. 사실 그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당신 가진 재산 다 내놓으시오”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정말로 믿는다면 무엇인가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부활의 증거는 바로 순교로 통합니다. 부활의 증인은 바로 순교자입니다. 순교자만이 부활의 참증인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기에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생명이 아깝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것,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 번 덜컥 넘어가는 것일 뿐입니다. 부활을 믿는데 죽음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이러한 믿음으로 초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조금도 거침없이 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순교자입니다. 순교로써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증인의 자격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증인에게는 직접경험이 필요합니다.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으로 아는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인에게는 내가 증거하는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과 함께 죽을 각오가 안되어 있다면 직접 보고도 못봤다고 합니다. 귀찮으니까요. 같이 말려들어가서 이러고 저러고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요즘 사람들 보면 고발정신이 너무나도 희박합니다. 문제는 내가 위하여 증거하는 분을 정말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분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저분을 위하여 내가 본 것을 말하지 않을수 없다.-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증인은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비겁하면 증인이 못됩니다. 내가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도 참을수 있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성령께서 임하심으로 권능을 얻고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음으로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체험이 확실해졌습니다. 자기가 받은 체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아가 용기가 생겼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이로써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같이하면서 부활에 대하여 듣고 배웠지만 잘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같이 죽을 각오도,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께서 신령한 용기를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부활을 증거하는 방법과 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함에 표적이 따랐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는 그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지명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표적이 따랐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이적을 행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벌덕 일으켰습니다. 이런 표적이 사도들에게 따랐습니다. 얼마나 희한합니까 사도들의 그림자가 덮이는 것만으로 병이 낫는다고 하니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렇듯 저들은 권능의 사람, 표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굉장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이런 능력의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놀라울까요
그런데 보십시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그렇듯 능력이 있고 이적을 보이는 사도들에게 핍박이 따랐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들을 체포하려고 할 때에 군인들의 손이 부러진다든가, 누가 사도들에게 욕을 할 때에 그가 벙어리가 된다든가 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적과 함께 핍박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옥에 갇혀 매를 맞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매를 맞을때에 기적이 나타났다면 얼마나 좋아요 때리려고 할 때에 그 팔이 부러지고 욕을 하려고 할 때에 벙어리가 되고 한다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런 기적은 없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적이 있고 표적이 있다지만, 그것은 내 편함을 위하여, 내 안일을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이적이 얼마나 굉장했으면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 그림자에 조금 덮이는 것만으로도 병이 나았겠습니까 이렇듯 놀라운 표적을 보이는 이적의 사람이 되었지만, 굉장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핍박은 여전했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매도 맞았습니다. 그리고 계속된 핍박으로 마침내는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이렇듯 확실한 표적과 함께 증거하는 그 복음을 마땅히 모두가 믿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안믿을 사람은 끝까지 안믿습니다. 교육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설교학적으로, 어떻게 하면 복음을 보다 효과적으로 잘 전할수 있을까 노력해도 그런 사람들은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그야말로 있는대로 노력을 다하면 되겠거니 하지만 보십시오. 안될 사람은 끝까지 안됩니다. 이렇듯 권능을 나타내고 귀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도, 사건 자체가 그렇게 명백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감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이를 부인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낙심하지 말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반응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것입니다. 모두가 믿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만을 열심히 할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복음전파에는 언제나 심판적 요소가 따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겠지만 안믿는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교역자로서 가지는 생생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모두가 믿고 모두가 회개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 가운데도 안믿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복음은 전해야 하고, 전해져야 합니다. 많지도 않은 열두 제자의 하나가 가롯유다 입니다. 그렇듯이 베드로와 요한이 큰 능력을 나타내고 복음을 전하는데도 그것을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반대자는 있게 마련인가 봅니다.
무릇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그 근원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입니다. 교인들을 섬깁니다. 교인들을 위하여 수고합니다. 그러나 교역자의 마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에 있는 것이지 교인을 섬기는 데에 있지는 않습니다. 몰론 교인들이 투표를 해서 목사님을 모셔오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에도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시어 여기에 온 것이라고 생각할뿐, 그 마음은 역시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두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신앙으로 교역에 임하는 것입니다. 교인의 비위를 맞추고 교인에게 봉사하려고 복음을 전하고 목회활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분명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29절) 하는 베드로와 및 사도들의 말씀대로 저들은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휘파코에’라고 하는 이 ‘순종’은 신약성서 전체에 걸쳐서 네 번밖에 안나오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철저하게 아무 이득없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와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섭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절대적으로 순종하면서 그 결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저들은 늘 수직적 관계에서 역사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잊지 말것입니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어디에서든 우리가 누구를 섬긴다고 할 때에 그것을 섬기느니 뭐니 하며 드러내지는 마십시오. 봉사를 했는데 그것을 알아주느니 안알아주느니, 효과가 있는니 없느니 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렸는데, 애당초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섬긴 것이 아닙니까 이 사람을 사랑해서 무슨 득을 보겠다고 작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수직적 관계에 있어야 합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 절대순종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그들은 이에 아무 존건 없이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어떻게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근본적인 증거의 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하고 절대순종 하다보니 여기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많은 오해와 파생되는 불이익이 많았습니다. 사도들 자신이 핍박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밖에도 많은 복잡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들이 열심히 부활을 증거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들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모여드는 사람들로 나중에는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로마로부터 많은 정치적인 오해를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공동체를 이용하여 정치적인 혁명이나 반정부적인 음모를 꾸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민란이나 반로마적인 혁명이 일어나기 쉽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품고 있던 참에 예수님을 가리켜 왕이라느니 메시야라느니 하는데 로마황제가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당연히 문제가 되지요.
일정 말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찬송가에 ‘예수 이름 권세요’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왕이시오 만왕의 왕이시다’하는 간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일본은 우리로 하여금 그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일본 황제가 있는데 어떻게 예수가 왕이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그 부분에 전부 종이를 붙이게 했습니다. 교회에 들어갈 때에도 찬송가를 펴보이고 그곳에 종이가 붙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유독 그 찬송만은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해방된 다음에는 매주일 그 찬송만 불렀습니다. ‘예수 이름 권세요, 만왕의 왕...’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니 로마황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여기 왕이 있는데 감히 누가 또 왕이라는 것이냐 하며 이것을 정치적으로 문제 삼았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할 때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자 할 때에는 이런 오해가 생깁니다. 사실 이것이 오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참으로 큰 오해입니다.
나아가 부활의 증거가 예수님을 죽인 자들을 정죄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28절).” 예수님께서 죽으셨으면 거기에서 그만 끝이 나야지 다시 살아나셨다고 한다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죄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듯 부활의 증거는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죽인자들을 정죄하는 결과를 가져오는것입니다. 때문에 사도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사두개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활을 증거한다는 것은 정면으로 사두개인들을 반대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물론 사도들은 사두개인들과 논쟁이나 펴자고 그런 복음을 폈던 것은 아닙니다마는, 예수 부활을 증거하다보니 자연 사두개인들의 교리를 반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핍박하는 사람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본디 바리새인들은 사두개인들과 공모하여 예수님을 핍박하고 초대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면면에는 바리새인들이 싹 빠져 있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내심으로 예수 부활의 복음을 반겼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을 안믿는 사두개인들과 이러한 점에서 대립되어 갈등상태에 있었습니다. 은근히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및 사도들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재판하는 그 자리에 바리새인들이 없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이 예수 부활의 복음에 대하여 더욱 민감한 반을을 보였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시기하여 그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17, 18절)...” 언제나 이 시기 질투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인기를 위하여 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니 자연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졌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저들을 존경의 눈으로 우러르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유무상통하며 구제하는 사회를 이루다보니 믿건 안믿건 간에 모든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과 및 사도들에 대하여 높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기가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인기가 높아졌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의 인기가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애초에 이런 의도를 가졌던 것은 아니지만 복음을 전하다보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인기를 잃어버인 사람, 실추당한 사람들이 저들을 시기 질투할 수밖에요. 불이익을 당하고 보니 예수믿는 사람, 특별히 사도들을 핍박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옥문을 열어주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투옥되었다가 석방되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어요. 투옥된 뒤에 천사가 문을 열어줄 바에야 애당초 체포 안되게 할 일이지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매도 안맞고 수모도 안당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투옥되고 매를 맞은 뒤에 옥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이 옥문 역시 항상 열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에는 열리고, 어떤 때에는 안열립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대로 즉게 만듭니다. 보십시오.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그가 목베임을 당할 때에 그목을 베던 사람이 장님이 되었던가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데반도 돌에맞아 죽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부를 때에는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늘 옥문이 열린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로마 감옥에 갇혀 죽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관계 안에서 오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은 감격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번 옥문이 열리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다음에 또다시 감옥에 간다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대로 죽어도 괜찮습니다.
가끔 이런 경우를 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많이 해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순간에 옆에서 조금 훼방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광적이구먼. 저렇게 기뻐하다가 며칠 뒤에 재발해서 죽으면 어떻게 할건가” 하고 미리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해줍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사흘 뒤에 죽는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오늘 나았다는 것을 체험하는게 중요합니다. 다음번에 다시 죽더라도 감사하면서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나은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시 병에 걸려서 죽을것입니다. 그래도 한 번 내가 기도해서 나은 그 체험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그체험을 가졌기에,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이제는 사흘뒤에 다시 병에 걸려서 죽는다 해도 좋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적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옥문이 항상 열렸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한 번 옥문이 열렸던 것을 경험한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다음날 순교한다 해도 그는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적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구하지 말것입니다. 너무 여러 가지 이적을 구하지 말것입니다. 한두번 경험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는 어던 고통을 맞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가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이적은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적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보는바, 사도들은 용기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의지적 용기는 아니었습니다. 순종적 용기였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20절)” 성전에 서서 공개적으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합니다. 참으로 강한 명령의 말씀입니다. 이에 사도들은 그 즉시로 따릅니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21절)”-새벽부터 성전에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대단하지요. 사람들이 얼마나 모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들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천사의 명령대로 새벽에 성전에 가서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지체하다가는 체포될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씀을 전하다가는 체포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니 급할수 밖에요. 갈릴리로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한복판에 서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을 향한 도전입니다. 지금 저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에 의지하여 성전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그것도 새벽부터 나서서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순간 저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저들은 이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감옥에서 고생한 뒤에도 곧바로 자신들이 체포되었던 그 자리에서 다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핍박자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본문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이라고 핍박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이란 산헤드린공회의원들을 말합니다. 그 수가 대략 70여명 됩니다. 그리고 다른 두 재판 기관이 있었다고 하니, 그들을 합치면 약 116명을 핍박자로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빠져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십시오. 사도들을 잡아다가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문을 열고 보니 사도들이 없어졌습니다.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될까 하더니(24절)...” 여기에 ‘의혹’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헬라어로 ‘디에포레오’라고 하는 이 말은 매우 당황하여 어지할 바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옥문도 그대로 잠겨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러니 놀랄수 밖에요. 당황할수 밖에요. 그러다가 성전에 서서 사람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들을 발견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희한하다’ 라고 분명히 저들은 한 번쯤 생각했을 것입니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더욱 악해졌을 뿐입니다. 더욱 불신앙으로 빠졌을 뿐입니다. 핍박자들은 다시 사도들을 체포했습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다시 체포는 했을지언정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해야 마땅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26절)”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결정적인 약점이었습니다. 이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할줄 몰랐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문제도 아니요 요한의 문제도 아닙니다. 지금 생각할 문제는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그 능력을 보았다면 이 시간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베드로에게 손을 못된다 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말씀은 본문 어디에도 없습니다. 물론 당황하고 의혹하여 어떻게 될까 걱정은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쳐다보는 사람은 용기가 있고,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은 비겁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잊지 말것입니다.
큰 기적을 보고도 저들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사도들은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증인이란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참으로 오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32절).” ‘순종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들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복음을 증거하라시기에 증거했더니 그 마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더욱 강하게 더욱 충만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문맥이 바로 그렇습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충만을 기다리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주제입니다. 그럼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이 다시 힘을 얻어서 더욱 크게, 더욱 용기 있게,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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