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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흥과 새질서 (행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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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초대교회는 모든 교회의 대표격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속성도 그렇고, 교회의 구조도 그렇고, 교회의 의미도 그렇고, 교회의 사명도 그렇고, 나아가 교회 안에서 발생한 제반 문제도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에 대한 해결책 또한 모범적이요 대표적이라 하겠습니다.
이미 공부한 바와 같이 초대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영이 살아 역사하신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당신의 사람들을 고용하시어 쓰신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나름대로 모여서 이룬 친교단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크신 능력으로 친히 당신의 사람들을 불러 쓰심으로 이루어진 능력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는, 온 교인은 성령 안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항상 모이고 말씀을 배우고 찬송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보세요. 그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관념적인 것도 아니요 감정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그대로 생활화했습니다. 그래서 유무상통으로 나타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서도 칭찬을 받았습니다. 안믿는 사람에게서까지도 그러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날마다 부흥했습니다.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어나가는 것을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도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1절)”라고, 날로 부흥하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부흥하지 않는 교회-그것은 교회의 성격을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교회가 교회되면 부흥합니다. 교회면 본디의 속성을 가지게 되면 교회는 부흥합니다. 부흥 안되면 교회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본디의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교회는 부흥하게 마련입니다. ” 여러분, 성경에도 보면 계속 부흥하더라, 그 수가 더하더라, 날마다 더 많아지더라 하고 초대교회의 부흥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성격입니다. 폭발적으로 부흥한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은혜가 충만한 초대교회에도 문제는 있었습니다.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부흥하는 교회나 부흥하지 않는 교회나 문제는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같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느냐일 뿐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대표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 가롯 유다의 문제가 다 그같은 문제 거리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보는바 일곱 집사 가운데 마지막 사람인 니골라의 문제도 문젯거리였습니다. 다만 그같은 문제를 어떻게 잘 극복해나가느냐 하는 것이 과제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원망’이 문제로 드러나 있습니다.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원망을 합니다. 당연히 감사하고, 또 감사뿐이어야 합니다. 그러데 원망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까 ‘헬라파 유대인’이니 ‘히브리파 사람’이니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로 이 ‘헬라파 유대인-Hellenists과 ’히브리파 사람-Hebrews’ 사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문화적 배경에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입장에서는 같은데 입은 옷이 다릅니다. 쓰는 언어가 다릅니다. 살아온 배경이 다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여기 우리가 한자리에 모여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한 목적으로 다같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배경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호남 지방에서, 어떤 사람은 영남지방에서, 어떤 사람은 이북에서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인 가운데는 65퍼센트가 본 교회에서 예수믿은 사람이요, 35퍼센트가 다른 교회나 지방에 있다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35퍼센트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리교 출신, 어떤 사람은 성결교 출신, 어떤 사람은 순복음교회 출신입니다. 이렇듯 나름대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점만 확대해서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다른 점이 소화되지 않아서 가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헬라파 유대인이건 히브리파 사람이건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배경이 다릅니다. 소화되지 않은 그 문화적 배경 때문에 결국은 충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원래 유대사람들은 지금도 그렇지만 본국에 사는 사람들보다 해외에 나가서 사는 사람들의 수가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보면 본국에 사는 사람들이 한 오백만이 된다고 하면 밖으로 나가서 사는 사람들은 천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디아스포라’라고 일컬어지는 유대사람들, 곧 밖으로 나가 살고 있는 이 유대사람들은 각 나라에 흩어져 살면서도 자기네 풍속, 자기네 문화를 그대로 지키는 민족입니다. 핍박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로마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사람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대로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요, 문화적으로는 헬라입니다. 헬라문화가 지배합니다. 그런 상황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정치 하에 안정을 누리고 살지만 문화적 철학적 언어적으로는 헬라문화권에서 삽니다. 그래서 성경은 히브리말로 읽지 않고, [칠십인역]이라고 헬라말로 번역된 성경을 읽습니다. 히브리말은 잘 모르니까요. 그저 가끔 쓰는 몇가지 일상용어나 쉬운 히브리말은 구사할 수 있어도 소위 academic language로 사용하는, 학문적 언어로 사용하는 것은 헬라말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헬라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일 수밖에요, 또한 로마정치에 대하여도 상당히 유연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건하게 히브리사람으로 히브리종교에 충성합니다. 그런 사람으로 대표적인 이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인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히브리사람’은 해외에 나가지 않고 본국에서 삽니다. 본국에 살면서 아람어를 사용하고, 전통적으로 유대사람들의 율법에 대하여 엄격하고 고집스럽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보수파라 할 수 있습니다. 생활풍습에 대해서까지 그렇습니다. 또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데에 아주 보수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문화한 것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보수적 개념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렇듯 같은 예수를 믿고 성령 충만하여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이 두 문화권은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말이 다르고 풍속이 다르고 생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여기에 나타나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히브리파 사람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은근히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히브리파 사람들은 본토인입니다. 그래서 난민생활을 하다 온 헬라파 유대인들을 무시했던 것입니다. 차별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얼마나 멸시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차별대우를 했습니다. 실제로 차별대우를 했는지, 아니면 차별대우를 한다고 느꼈는지, 그런 것은 알수 없으나 이 문제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큰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구제 문제입니다.
언제나 이 구제사업이 문제입니다. 구제사업이라면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 문제요 또 하나는 분배문제입니다. 여러분, 코끼리도 죽을 때에는 저 죽을 곳을 찾아가 죽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귀소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헬라파 유대인들도 멀리 나가 살다가 나이많아 노인이 되면 고향인 예루살렘에 와서 죽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당한 비용을 준비해 가지고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겠다고 예루살렘에 찾아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살게 됩니다. 그러면 돈이 모자라게 됩니다. 결국은 구제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나가 돌아다니다가 다 늙어가지고 뭣하러 왔나, 예루살렘이 공동묘지인줄 아나’하고 시끄러워집니다.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이것은 보통 구제가 아닙니다. 매일 구제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원래 금요일이 되면 유대사람들은 모금을 합니다. 북을 치고 그릇을 가지고 다니면서 구제를 위하여 모금을 합니다. 죽 돌아다니면서 모금을 해가지고 저녁에 이것을 나누어줍니다. 이렇듯 모금한 것을 일주일에 한 번씩 나누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제를 매일했다고 합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주는 매일 구제를 하는데 넉넉하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그날에 필요한 것 만큼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매일 구제의 관습이 다시 이어졌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1절로 16절을 보면 이 문제가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과부’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도 ‘과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자기의 과부들이 구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디모데전서로 돌아가봅시다. 디모데전서는 어떤 과부가 참과부인지를, 또 참과부가 교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 열락같은 것에는 미련이 없이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 늘 기도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사는 사람이 참과부라고 말씀합니다.
둘째로, 친척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자녀들이 있다면 당연히 그들에게 효도를 받아야지 교회의 구제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친척들이나 자녀들이 없는 사람만이 참과부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한 번만 시집을 갔던 사람이라야 참과부라고 합니다. 한 번 시집갔다가 남편이 죽었다고 다시 가고 했던 사람은 또 시집갈 소질이 다분하기에 참과부가 될 수 없습니다. 단 한 번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던 사람만이 참과부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봉사정신이 있어야 참과부입니다. 남의 발을 씻길 수 있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철저하게 남을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대접받으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야 합니다. 남은 생을 오로지 봉사하는 데에 깨끗이 바치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참과부입니다.
그리고, 60세 넘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젊은 과부는 다시 시집을 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과부들을 ‘참과부’로 교회 명부에 올려서 매일 구제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부들은 교회에서 그 생활을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부들은 온전히 교회에 봉사하고 기도하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것이니 그들을 구제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말씀을 보세요. 교회에서 과부들을 명부에 올려 구제하는 데에 히브리사람, 혹은 히브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우선이 되고 아마도 헬라파 유대인들은 빠졌던가봅니다. 이것이 불평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1절)”-여기서 우리는 구제의 문제에는 언제나 원망이 따른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질이 오고가는 데에 원망이 없지 않습니다. 분배에 늘 문제가 따르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원망이 어디에 있느냐 입니다. 주는 자에게는 원망이 없습니다. 받는 자에게 원망이 있습니다. 가끔 구제를 한다거나 좋은 일을 한다거나 할 때에 보면 받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그러면 주는 사람이 낙심을 해가지고는 안주면 그만 아니냐 하고 물러서려고 합니다마는 그러지 마십시오. 원래 받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주는 사람이 무슨말을 합니까 주는 사람은 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꼭 받는 사람 편에서 말이 많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원망하는 사람은 받는 체질이라는 것이 됩니다. 받는 쪽에 속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말이 많은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 좀 내고 칭찬을 받으려 하고, 무엇을 좀 주고 인기를 얻으려 하는, 이같은 받으려는 마음이 있기에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려는 마음으로 주고 깨끗이 돌아가는 사람에게는 원망이 없습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이 집을 위하여, 이 식구들을 위하여 평생을 바치겠노라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원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받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은근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안바라는 척하면서 바랍니다. 여기에서 원망이 비롯합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무엇인가 받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잊지 말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러니 핑계할수 없습니다. 정말로 100퍼센트 베풀려고 하는 사람은, 바치려고만 하는 사람은, 주려고만 하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내 명예까지, 내 마음까지, 내 기분까지 다 주어 버리는데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주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받는 사람이 말이 많습니다. 보세요. 저들은 과부에게 구제하는 것을 받으면서 왜 더 주느냐 덜 주느냐 하고 말이 많았습니다.
네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공평입니다. 사실, 공평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공평하다, 공정하다, 공의롭다-추상적으로는 말이 됩니다. 요새도 보면 저마다 공의와 정의를 부르짖습니다마는, 아무리 보아도 어느 쪽에도 정의는 없습니다. 공평이란 그렇게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똑같이 만원씩 주면 공평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한 사람은 80세요, 한 사람은 60세입니다. 한 사람은 걸어 다니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누워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똑같이 줄 수 있습니까 이야기가 다르지요. 똑같이 만원씩 주는 것은 공평이 아닙니다. 누워 있는 사람에게 더 주고,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덜주어야 합니다. 이렇듯 공평이란 현실적으로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공평이란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통하는 것입니다. 저마다 객관적이라 하고 가장 정의롭다 합니다마는 주관적 의견은 그대로 차이가 있고 분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평이란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공평입니까 깊이 한 번 실제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본문말씀에서도 저들은 구제문제를 놓고 저마다 자기들 기준으로 이야기합니다. 나는 가난하니까 더 받아야 한다. 나는 이방인이니까 더 받아야 한다, 나는 집도 거처도 없으니까 더 받아야 한다. 너는 집도 있고 자녀도 잇으니까 덜 받아야 된다.... 저마다 할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결국은 공평을 잃고 평형을 잃음으로 불평이 생기고 원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은혜 가운데서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바꾸어지지 않는 한 바르게 세워나갈 수 없습니다. 보세요. 초대교회에 이 구제의 문제로 말미암아 원망과 불평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 해결 방법을 봅시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먼저 저들은 우선 순위를 정합니다. 교회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집니다. 헬라어로 ‘케리그마’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라고 하는 ‘전도’ ‘친교’ ‘봉사’가 그것입니다. 저들은 이들 교회의 기능 가운데
첫째가 ‘전도’라고 그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제하기 위하여, 봉사하기 위하여 전도를 뒷전으로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전도가 없는 친교만을 이루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빠져나간 친교는 전혀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저들은 맨먼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무엇이 최우선인지를 결정했던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구제 문제로 시끄러워졌을 때에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불러놓고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2절)”-전도가 먼저인데 어찌 구제하는 데에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쓰게 되었느냐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잘못이라고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결정함으로 해결의 열쇠가, 그 실마리가 찾아지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어차피 다 할수는 없습니다. 다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그것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 해결 방도로 저들은 상당한 용기를 가지고 과감하게 양보를 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평에 대한 해결로 사도들은 일곱 집사를 세웁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전부가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헬라식 이름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불평을 하므로 ‘당신들이 구제하라, 당신들이 분배하는 것을 책임져라’하고 그 책임자로 헬라파 유대인들을 세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보함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양보를 하지 않으려고 하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본래 구제는 사도들의 책임하에 있는 일이지만 과감히 양보를 합니다. 불평하는 바로 그들에게 맡깁니다. 이것은 저들의 불평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먼 나라에서 와가지고 이렇게 고생하는 이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 이유 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잘알고 있을 것이니 저들의 일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세 번째 방법으로 사도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해오던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분담시킵니다. 일임을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 혼자 다 맡아서 하려니까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요샛말로 독재하니까요. 그러니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다 할수도 없고요. 지금 사도들은 분담을 함으로 그 불평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각각 나누어서 일을 하면 문제가 없습니다.
언젠가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교인 이라는 것이 참 이상합니다. 말로는 봉사한다 봉사한다 하면서도 실제는 그렇지도 않아요” 그분이 하는 말인즉, 자신이 교회 회계를 17년 동안이나 해왔답니다. 참 오래도 했지요. 이제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냥 그만둔 것이 아니라 예배당을 새로 짓게 되어 건축 회계로 옮겨 앉으면서 그만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7년동안 해온 일반 회계를 그만 두려니 섭섭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농담으로 “1년하고 그만뒀으면 섭섭하지 않았을 텐데 17년이나 했기 때문에 섭섭한 것입니다.”라고 한마디 해주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도 보십시오. 남전도회나 여전도회의 회장들 보면 1년씩 그 일을 맡아 해오다가 그만 두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하면 잘 할수 있을 텐데.. 지난해는 연습삼아 했는데..” 그만두려고 하니 섭섭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만두는 것을 잘 할줄 알아야, 제때에 그만둘줄 알아야 휼륭한 것입니다. 나 혼자서 모든 일을 하려고 하면 불평이 끊이지 않습니다. 보기에는 나보다 후배요 미숙한 것 같아도 그에게 일을 맡겨야 합니다. 남에게 일을 맡길줄 알아야 합니다. 혼자서 다 하려고 하기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이 볼 때에 이 일곱 집사들을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일임하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맡긴다고 하는 데에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기능적입니다. 나는 이것을 하고 당신은 저것을 하시오. 나는 전도를 하고 당신은 구제를 하시오, 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맡길 수 있을 때에, 분담할 수 있을 때에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맡겨서 해결하면 능률적이 됩니다. 나 혼자서 하면 아무래도 비능률적입니다. 이 일을 하는 동안에 저일을 못하니까요. 그러나 여럿이 함께 하면 일시에 아주 능률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 봉사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든지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은사를 주셨기에 나에게는 가장 자신있고 가장 쉬운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가장 쉽고 가장 즐겁고 가장 자신있는 일을 맡아서 그 일만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면 부엌에서 일하는 데 소질이 있습니다. 그렇거든 그 일만 열심히 할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중요하니까요. 뭐든지 좋아요. 가르치는 것은 가르치는대로 말입니다. 뭐든지 나로서 할수 없는 일은 하려고 덤비지 말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나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통하여 일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효과적인 부름입니다. Effective calling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인도해놓은 뒤에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르쳐야지요, 재판해야지요, 인도해야지요.. 모세는 너무 많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장인 이드로가 와서 보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러다가는 큰일이 나겠더라구요. 아무 일도 안되겠어요. 일처리가 제대로 안됨으로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때에 이드로가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그대와 그대와 함께한 이 백성이 필연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수 없으리라(출 18:17,18)” 그리고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웁니다. ‘그들로 일을 처리하게 하고, 저들로 안되는 일은 네가 맡아라’하고 일을 분담시키는 것을 볼수가 있습니다. 아주 지혜롭지요. 이렇게 하니까 능률적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혼자 하려고 드니까 아무것도 안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처럼 큰 교회일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 분담해서 자기일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당회장인 저 혼자 어떻게 모든 일을 다 합니까 그것은 말이 안됩니다. 분담의 능률-이것을 우리가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는바 네 번째의 해결 방법은 전체 합의로 일을 처리하는데 있습니다.
의견을 내놓고 모두가 좋다고 여길 때에 그렇게 합니다. 합의한다고 하는 것에서 새질서가 창출됩니다.
다섯 번째로 생각할 해결책은 모든 것을 신앙 안에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신앙의 토대위에 행하면서 집사를 세웁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집사로 세웁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문제가 시끄러워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누구냐고 묻지 마십시오. 성령 충만한 사람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은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헤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로서 온 지혜를 받은 증거를 가진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비난을 듣는 사람은 안됩니다. 하자가 있는 사람은 안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는 사람, 사회적으로 덕있고 칭찬받고 신뢰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들은 이런 사람을 집사로 세워서 구제하는 일을 맡게 했습니다.
본문말씀에 따르면 저들은 일곱 집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왜 일곱이냐,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먼저, 당시 예루살렘이 일곱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기에 한 구역씩 맡게 하기 위하여 일곱 집사를 세운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곱이라는 숫자가 거룩한 숫자이므로 집사의 수도 이에 따른 것이 아닌가하는 학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오히려 단순한 필요에 의하여, 실제적 필요에 의하여 일곱 집사를 세우지 않았는가 하는 학설도 있습니다.
집사를 헬라어로 ‘디아코노스’라고 합니다. ‘봉사’는 ‘디아코니아’라고 하며 ‘봉사한다’는 ‘디아코네인’이라는 동사로 표현됩니다. ‘디아코노스’ ‘디아코니아’ ‘디아코네인’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봉사한다’는 뜻의 ‘디아코네인’은 식탁에서 수종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디아코노스’라고 하는 ‘집사’는 식탁에서 수종드는 사람, 곧 웨이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편안히 식사하도록 왔다갔다 하면서 수종드는 것입니다. 심부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봉사입니다. 내가 집어먹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보면 다른 사람을 먹이는 척하면서 자기가 먹습니다. 그렇기에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식탁에서 수종드는 자세로 섬겨나가는 것이 바로 집사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그에게 기도하고 안수하니라(6절)” 일곱 사람을 택하여 기도하고 안수한 뒤에 집사로 세웠다고 합니다. 구약의 출애굽기나 레위기에도 ‘안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안수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택한 사람에게 일임하는 것입니다. 위임하는 것입니다.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그에게 맡깁니다. 그런뜻으로 안수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직분을 맡은 사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봉헌의 의미가 안수에는 담겨있습니다. 그 인격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봉헌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할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옵소서’하고 거룩한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안수에는 이러한 기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안수입니다. 사도들이 안수기도를 해서 일곱 사람을 집사로 세웠다-하나의 임직예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는 오늘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해결의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우선이냐를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 전하는 일이 최우선임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일 때문에 이것이 손해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것이 최우선적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 나머지는 제2, 제3의 문제로 그 위치를 확실히 할 때에 해결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구제니 봉사니 하는 것이 주목적이 되는 순간에 교회는 교회의 성격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성장학]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전도를 제쳐두고 교육이니 봉사니 하는 것에 열중하면 교회는 부흥할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든지 예배와 말씀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친교가 너무 앞설 때가 있습니다. 물론 친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친교 역시 말씀 다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일은 내가 해야 한다. 존경을 받아야 한다.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모름지기 주고자 하는 마음, 봉사하는 마음만 가지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직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모두가 한마음으로 바쳐나갈 때에 그 교회는 다시 하나가 될 것입니다. 능력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능률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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