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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포로된 자 (행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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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포로된 자’-사도 바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포로가 되는 바로 그 순간에 대한 기사를 오늘의 본문에서 읽게 됩니다.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울을 바울되게 했다. 그리스도께서 사울을 바꾸셨다. 그리고 바울은 세계를 바꾸었다. 역사를 바꾸었다.” 이 말은 그리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바울이라는 사람의 역할이 엄청난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인류역사에 끼친 그 영향은 절대적이라 할만합니다. 특별히 인류문화에 끼친 영향이 큽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이렇게 바꾸어 놓은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의 제자요, 종이요, 사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도 바울이 사울이라는 극악한 사람으로 있다가 한 순간에 확 바뀌어서, 회심을 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같이 드라마틱한 변화는 그리 흔한 일이 아닙니다. 그 변화의 순간은 180도로 확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미적거리지도 않았습니다. 전할 때에는 화끈하게 전합니다. 너무 표현하는 것도 같으나 그것이 바로 바울의 인간성입니다. 그는 진실하고 충성됩니다. 그 점이 좋은 점입니다. 어떤 분은 보면 돌아가기는 돌아가는데 돌아갔다 돌아왔다 하기를 얼마나 하는지 알수 없습니다. 기왕 믿으려면 화끈하게 믿을 것이요, 안 믿으려면 깨끗하게 집어치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도대체가 자는 건지 조는 건지 알수가 없어요. 좋지 않은 것입니다. 박해할 것이면 차라리 화끈하게 박해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야 돌아올 때에도 화끈하게 돌아옵니다.
우리 가정 주부들 가운데서는 “어휴, 우리 남편 어떡하죠 글세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몰아요. 교회한번 갔다오면 성경책을 찢고 난리가 나는데,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는 분이 있어요. 저는 이런 얘기 들을 때마다 대답을 이렇게 합니다. “잘돼갑니다. 얼마 안남았으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그 사람 예수믿을 거요. 믿었다 하면 정말로 믿어요. 믿을때가 됐어요” 그런데 어떤 분은 그와 대조적입니다. “제 남편은 마음이 착해서요. 주일마다 교회 가라고 헌금도 주고 집도 봐주고 해요. 교회는 안나가지만 믿는 사람보다 나은 것 같아요”합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남편은 10년이 가도 안믿어요. 도대체가 소극적인 사람입니다. 사람됨이 죽에다 물 탄것같아서 영 시원찮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주 적극적인 인물입니다. 예수믿는 사람 잡아죽이다가 확 돌아가지고 예수를 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단 돌아버린 다음에는 요지부동,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변하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순교할 때까지 어기차게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참 멋있는 사나이, 멋있는 인간입니다.
바울의 그 회심하는 장면이 본문에 있습니다. 과연 큰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마도 어느 마을 어느 장소에 가서 전도하든지 이 이야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가 자꾸 반복되니까 성경에서는 좀 삼간 것이 아닌가 싶어요. 사도행전에는 세 번 나타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그 당시에 되어진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고, 그 다음에는 사도 바울이 돌아다니면서 전도한 것에 대한 이야기가 두 군데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2장 4절로 16절이나 26장 18절 등에 보면 사도 바울이 스스로 경험한 일을 쫙 이야기합니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해서 딴 사람이 되었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바울은 아마도 어디에를 가나 이 이야기는 꼭 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실인즉 이 이야기 빼놓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바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바울되게 하고 바울의 복음이 복음되게 하는 기초가 바로 그같은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그의 회심 장면이야말로 요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그 회심에 대하여 오해가 좀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제대로 이해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신 주님의 명령 안에서부터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복음이 온세계로 전파되어야 하는데, 바로 그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는 하나님의 선교적 경륜, 그 큰 뜻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 자체를 너무 크게 보아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만방에 전하고자 하시는 역사에 많은 사람을 고용해 쓰시는데,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바울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곧 기독교는 바울의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종교입니다. 어디까지나 그리스도교지 바울교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의 한 사람 바울이 열심히 일한 충성된 일꾼의 하나였다는 사실은 명심해야 됩니다. 이런 말을 하는 데는 신학적으로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을 너무 과장해 가지고 예수교냐 바울교냐,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바울교와 예수교의 차이가 좀 있는게 아니냐 하고 쓸데없는 논란을 벌이는 사람도 있기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바울의 회심에다 너무 강점을 두는 나머지 바울을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스스로가 회개한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께서 회개시킨 것입니다. 바울 그가 어느날 문득 귀중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이 사람이 좋아서, 인간이 워낙 적극적이고 휼륭한 성격의 사람이어서 잘못된 길을 가다가 돌아서서 바른 사람이되었다.-이같은 인간학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변화시키신 것이지 바울 스스로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것입니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회심을 가능케 한 동력은 바울 스스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큰 뜻을 위하여, 그 선교적 사역을 통해서 이 사람을 특별히 고용하신 것입니다. 언제나 주체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잊지 말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그의 편지 가운데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은 자다, 어디까지나 나의 주인은 나를 보내시는 그리스도다.-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빼면 바울은 없습니다. 그 점을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회심할 때의 모습을 너무 과장해가지고 위대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가 안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가 새사람이 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강권적으로 역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그 유명한 회심은 하나님의 역사이지 바울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드시 명심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흔히 나의 회심과 바울의 회심을 비슷하다고, 동격으로 생각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방탕하고 술먹고 돌아다니다가 예수믿어 술도 안먹고 담배도 안피우고, 깨끗한 사람이 됐다. 바울이 중생한 것처럼 나도 중생했다.-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좀더 지나친 사람들을 보면 전과 한 10범쯤 되는 사람이 감옥에 오래 있다 나와서는 “제가 바울처럼 회심하였습니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바울이 술먹고 방탕하다가 돌아선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탕자 됐다가 돌아온 것도 아닙니다. 타락한 생활하다가 깨끗한 사람으로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부도덕한 인간에서부터 도덕적인 인간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바울은 어디까지나 비기독교적인 생활에서 기독교적인 사람으로 바뀐 것일 뿐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12절이나 13절에 보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하고 말씀하면서 스스로에 대하여, 그가 받은 사명에 대하여 자신을 천명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라고, 충성과 진실성이 없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핍박한 것도 자기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을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중생은 나름대로 이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는 순간에 ‘아, 이게 아니구나’ 깨달았기 때문에 확 돌아간 것입니다. 결코 부도덕한 생활에서 도덕적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거듭 말씀하거니와 우리가 혹 어떤 때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부도덕한 생활을 하다가 문득 회심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바울의 회심과 같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하는 것은 은혜적인 일입니다. 좀더 깊이 말씀드리자면, 신학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바울의 회심은 은사적인 것입니다. 거기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한 사람을 예수믿게 하시려고 하신 일이 아니고 바울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큰 사역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 장면은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쓰시는 장면이지 한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는 유의 작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말하면 은혜적 사건이라기보다 은사적 사건이었다는 점을 신학적으로 정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바울은 ‘알지 못하고’ 있던 시절에 딴에는 하나님을 위하여, 율법을 위하여, 또는 이스라엘의 전통을 위하여 예수를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그 순간에 180도로 돌아서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네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심리학적인 오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심리학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그는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 데 가담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증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죽는 사건을 옳다고 확신하고, 또한 그 사건에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울의 마음에 아무래도 미심쩍은 점이 있었습니다.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죽어 마땅하고 죽여 마땅한 그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것이니 죽는 당사자는 당연히 죄인처럼 죽어야 하거늘 오히려 의인처럼 죽는 것이 아닙닙니까 여기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 욕을 하면서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돌던지는 사람들도 ‘맞다, 맞아, 너는 죽어 마땅하다’하고 칠텐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얼굴이 오히려 천사와 같고, 더욱이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까지 하다니...
스데반의 그 얼굴, 그 음성을 사울은 잊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훼방했고, 성전을 훼방했고, 율법을 훼방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하고 돌을 던졌지만 죽는 장면에서 본 그 모습과 그 음성은 사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 강렬한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종의 반작용으로 잠재의식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점점 더 악해져갑니다. 극악해져요. 얼마나 악해졌는지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는 거리가 무려 140마일입니다.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일주일은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가다가 자고, 자다가 가고... 이렇게 가면 일주일이 걸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러 가는 길이 일주일이어도 있을수 있는 얘기다 있을수 없는 얘기다 할 판인데 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거기까지 가는 것입니다. 시쳇말로 악질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믿는 사람들이 피신해서 다메섹으로 간것입니다. 도망간 사람들을 악착같이 뒤쫓은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도 극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듯 악한 일을 하려고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었습니다. 율법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라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도 이제는 핑계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았어요. 마음 속에 스데반을 죽였다고 하는 가책, 의인을 죽였다고 하는 가책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악착스러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압니까 ‘노(No)'라는 말을 한번 하면 ’노‘가 되지만 ’노,노‘하면 예스(Yes)'가 된다는 말입니다. 어디로 가라 하는데 “안가겠습니다”하면 안가겠다는 것이 되지만 “안가요,안가”하면 그 사람은 갈것입니다. 이점을 알아야 해요. 혹 남편이 저녁늦게 들어올 때, “그 여자하고 차 마셨수” 하고 대드는데 “안마셨어”하면 안마신 것 이지만 “아니야, 아니라니까”하면 그 여자하고 마신 것이 됩니다. 그것이 심리적인 반사작용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에게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이놈아, 네가 의인을 죽였어”하는 양심의 소리가 자꾸만 속에서 끓어오릅니다. 이것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느 사람들이라면 이런 때에는 대개 술을 마십니다. 맨정신으로 있기가 괴로우니까요. 그런데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점점 더 악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믿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겠다는 것이지요. 하나 죽이는 것으로 멈추고 기다리면 되겠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도망간 사람들을 쫓아 그먼길을 갈 생각까지 했다는 것은 바울의 마음 속에 이미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반증입니다. 스데반의 선교와 그 신앙과 그 교리에 벌써 끌려가고 잇었다는 반증입니다. 이것이 잠재의식 속에, 혹은 무의식중에 나타나 발광을 하게 된 것이다.-이렇게 설명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심리적인 차원에서 말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까무라친 것도 심리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해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바울의 그 회심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건이지 교리가 아닙니다. 동시에 계시입니다. 계시적 사건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명심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신령한 예수님께서 나타나 사울이라는 사람을 일대일로 만나주시는 순간입니다. 그 장소와 시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장소는 다메섹 도상입니다. 지금 다메섹에는 많은 교인들이 피신해 있습니다. 그 다메섹에 거의 왔을 때, 노상에서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로막으시는 것입니다. 숨어 있는 기독교인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시간입니다. 동시에 사울을 사로잡는 순간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시간입니다. 바로 정오입니다. 정오라고 하는 그 시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환상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그가 기다려왔었던게 아닙니다. 기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고 가던 길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밖의 일이 생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꿈이 아닙니다. 환상이 아닙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분들을 봅니다.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듣고, 또 사건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때에 우리가 기도를 많이 하고 명상도 하고 하면서 주님을 한번 뵈었으면 합니다. 어떤 분들은 오래 금식도 하고, 또 허약해진 가운데서 정말 꿈을 꿀수도 있고 환상을 볼 수도 있습니다. 사울의 일은 이런 이야기하고 전혀 다릅니다. 계시를 받고 환상을 보고 꿈 한번 꾸고 “아, 주여”하는 유가 아닙니다. 바울이 경험한 것은 대낮에 된일이지 밤에 된일이 아니요, 혼자서 된 일도 아닙니다. 여러 사람들이 보는 데서 된 일입니다. 벌건 대낮에 말입니다. 느닷없는 사건이 닥친 것입니다. 환상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실로 친히 나타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됩니다.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윈시종교의 특성입니다. 그런 일은 많습니다. 꿈에 자기 남편이 어떤 여자하고 데이트하는 것을 보아놓고는 이게 보통 꿈이 아닐거야, 이건 아마 계시일 거야, 이래놓고는 생사람 잡는 것 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입니다. 환상은 어디까지나 환상일 뿐입니다. 혼동하지 말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것은 꿈도 환상도 아닌, 엄연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것입니다.
특별히 놀라운 것은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계시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환상을 보는 순간에 이 사건이 환상인가 아닌가, 현실인가 비현실인가를 알기 위하여 확인하는 모습을 본문에서 볼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성이 들려올 때, ‘주여 뉘시오니까’ 당신 누구요-대단한 사람입니다. 키가 좀 작았다고 하는데 작은 고추가 맵다고 하더니... 환히 빛이 내려옵니다. 순간적입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여기서 무슨 소리를 할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바울은 당차게도 ‘당신 누구요’하고 확인하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대학 다닐 때, 여름방학에 친구와 함께 고향에 가다가 들판에서 자기 옆을 나란히 걷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었습니다. 아닌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루터가 얼결에 무릎을 꿇고 떨면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성 안나여, 나를 살려주세요.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헛소리를 했어요. 결심한 바도 없는 소리를 한것입니다. ‘살려주기만 하면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한것입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사회로 진출하려 하다가 옛날에 무릎꿇고 했던 그 헛소리대로 수도사가 됩니다. 사진에 보면 루터는 키가 크고 좀 멀컹하게 생겼어요. 겁이 많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사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혼비백산의 순간에도 감히 “당신 누구요” 합니다. 대답하시는 분이 또 재미있어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하십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습니다. 사울이 예수님 핍박한 일은 없거든요. 예수님의 제자를 죽였지 예수님 자신을 핍박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를 핍박하고 있는 것이지 예수님을 죽이러 가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셨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도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너희를 핍박하는 자는 나를 핍박하는 것이요, 너희를 거역하는 것은 나를 거역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시간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사울은 여기서 무릎을 꿇고 맙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사울은 자기가 누구며,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내가 지금까지 한일은 예수님을 핍박한 일이었구나. 예수님을 대항한 일이었구나, 내가 지금 다메섹으로 가는 이 길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길이었구나’-그는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이 귀한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사울은 자기 정체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정체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무슨 말이나 무슨 변명이나 무슨 맹세를 할 여유도 주시지 않습니다. 거두절미, “너는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십니다. 대단한 말씀이지요. 사울을 포로로 해놓으시고 그 당장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구구한 설명이 필요없으셨어요. “잘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다시는 안그러겠습니다” 따위의 시시한 소리도 들으려 하시지 않습니다. 딱 붙들자마자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내가 할말이 있다.-그뿐입니다. 얼마나 일방적입니까 얼마나 강권적입니까 내가 너를 알아, 따라와-그런 얘기 아닙니까 강권적입니다. 절대적입니다. 가야 할길을 일러주십니다. 포로로 잡아서 쇠사슬로 묶어 끌고가는 것과도 같은 순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포로된 다음에, 그 후에 깊이 깨닫고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 보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라고 까지 고백합니다. 내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름받은 것 같지만 사실은 어머니 태로부터 나에게 주님의 계획과 뜻과 경륜이 계셔서 이제 부름받은 것이다.-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귀한 음성을 들을 때, 옆에 있던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옆에 있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보는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사울만이 직접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뵙는 장면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극적 장면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나 스스로가 믿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울은 거기서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연히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름받은 사람이 빗나간다면 살아남겠어요 바울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 강한 능력, 강한 그 뜻 안에서 부름을 받고 오늘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며, 내가 갈길이 어느 길인지도 그가 일러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묵묵히, 충성되어, 겸손하게 순종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뜻을 위하여,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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