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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방인의 오순절 (행 10: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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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에는 ‘이방인의 오순절’이라 일컬어지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오순절 사건이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성령의 역사가 임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원래 오순절은 히브리사람들의 한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오순절이 아주 독특한 의미를 지닙니다. 오순절 사건 그 때로부터 교회가 실질적 의미에서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그 전의 역사도 결국 이를 위한 준비의 역사였다고 하겠습니다. 내실적인 역사가 되겠고, 내적인 역사가 되겠고, 영적인 역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론적 의미가 실질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오순절에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절과 오순절의 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부활절 없는 오순절은 없습니다. 오순절 없는 부활절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신비주의에 속합니다. 그리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오순절이 없는 부활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적 사실에 불과합니다. 교회론적 실질적 의미를 거기서 창출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과 부활절, 부활절과 오순절은 기독교에 있어서 뗄 수 없는 두 중요한 사건입니다. 두 기둥과도 같이 기독교를 버티는 교리의 뿌리 부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순절 사건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을 위해서도 그와 같은 사건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이 사건과 예루살렘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비교해봅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고 하나는 가이사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즉 유대나라 수도, 유대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의 중심부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는 가이사랴에서-가이사랴는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어디까지나 로마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이방땅입니다. 그곳의 로마사람네 집입니다. gsk는 마가으 ㅣ다락방에서 이루어졌고, 하나는 로마군인의 집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마가의 다락방과 고넬료의 집을 비교해봅니다. 예루살렘에 있었던 오순절 사건은 사도행전 2장1절 이하에 있고, 가이사랴에 있었던 이 사건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사도행전 10장에 나타납니다. 우선 공통점이 몇가지 있습니다. 먼저 생각할 공통점은 ‘모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누구 한 사람이 골방에서 체험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론적 의미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여기서부터 독특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느 종교처럼 혼자서 산에 올라가 이른바 입산수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동체적 의미가 있고 교회론적 의미가 있습니다. 함께 모이고 함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함께 역사를 체험합니다. 바로 교회론적입니다.
오늘도 가만히 보면 개인적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혼자 기도하고, 혼자 산에 올라가 계시받고, 혼자 환상을 보고... 이런 얘기들을 하고 돌아가는데, 사실 이런 얘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은 백이십 명이 함께 체험한 것입니다. 오늘도 보면 고넬료의 가정에 모였던 사람 모두가 함께 체험을 합니다. 고넬료만도 아니고 고넬료의 가족만도 아닙니다. 그일가친척과 친구들까지 다 모여서 이 놀라운 체험을 함께합니다. 공동체적입니다. 교회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모였다는 것, 예루살렘에서도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여기서도 고넬료의 집에 모였습니다. 모인중에 사건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회에 모인다는 것, 함께 기도한다는 것,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도하고 함게 음성을 듣고 함께 체험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뻔째는 다같이 베드로의 복음, 다시말하면 베드로가 설교한 다음에 이루어집니다. 이 또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증거하고, 그 다음에 베드로를 중심해서, 베드로라고 하는 초대 교회의 중요한 인물, 예수님게서 친히 명령하시고 사명을 주신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마 16:18,19)”하셨던 그 베드로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루살렘의 첫 교회도 베드로가 설교하고, 베드로를 중심으로 모인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으며, 이제 고넬료의 집에서도 베드로를 청하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청했더니 베드로가 와서 설교하고, 그 설교 끝에 성령이 임합니다. 같은 사건입니다.
세 번째, 마가으 ㅣ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사건은 성령의 불과 같은 모양으로 혹은 불과 같은 혀로, 그리고 바람처럼 임합니다. 아주 신비롭게 임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보니 성령이 위로부터 내려왔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44절)”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45절)”-역시 인간들의 노력으로나 어떤 형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임하는 초자연적 사건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예루살렘에서나 고넬료의 집에서나 똑같은 것이 ‘방언’입니다. 성령을 받은 다음에 방언을 하더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된것이나 가이사랴에서 된것이나 똑같은 의미의 방언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저러한 사건을 놓고 볼때에 그 주체는 성령이라는 것을 알수 잇습니다. 베드로도 고넬료도 다 성령의 역사에, 그 강한 역사에 고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고넬료가 특별한 사람 아니요 베드로도 특별한 사람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 하나님의 크신 선교적 역사에 들리어 쓰임받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또 그렇게 모이도록 한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이 집에 담대히 들어가서, 규례를 어기고 이방사람집에 들어가 유숙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수 있도록 용기를 가지게 한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게 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게 한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친히 주도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셔서 된일입니다. 베드로의 뜻에서도 아니요 고넬료의 생각에서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전적으로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 사건들임을 잊지 말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몇가지의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먼저는 성령이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로마군인도 있고 그들의 아내들도 있습니다. 그 자녀들도 있습니다. 친척들도 있습니다. 친구들도 있습니다. 아시는대로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집안식구와 친구들이 다 고넬료와 같이 경건했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다같이 도덕적으로 선행을 하고 때마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었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고넬료의 청함을 받고 와서 고넬료를 중심으로 모인 그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 이 점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경건에 앞선 사람도 있고 뒤진 사람도 있어요. 도덕적으로 정결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고넬료가 초청했을 때에 마다 않고 이집에 왔어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고 우선 왓어요.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나니 모두에게 성령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의미 심장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여기 모여앉았습니다. 여러 모습의 사람이 함께요. 도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식으로나 저마다 달라요. 얼굴이 다른 것만큼 다릅니다. 그러나 지금,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할 때에 다같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특별한 의미가 이에 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 함게 성령을 체험합니다. 우선 외모가 다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중심만을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나는데, 여기 모인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힘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공간과 그 시간에 있다는 것으로가 아니라 있으면서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게서 친히 비유해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옥토와 같은 마음밭에라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절)”하는 마음밭-‘그러니 말씀하십시오’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초라한 사람이지만 베드로라고 하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턱 팔짱을 끼고 안자아서 저 목사가 무슨 말 하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목사님한테 책 한권 사다 드려놓고 속으로 ‘보셨나’하고 앉았어요. 나중에 만나보면 자기가 준 책에 나오는 말이 안나오더래요. 그래 섭섭했다 해요. 저는 “당신 그것 때문에 시험들었소”하고 말았던 일도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어떤 분은 목사님한테 선물 드린게 있으면 줄곧 거기에 신경을 써요. 쉽게 얘기해서 넥타이를 선물하고나서는 늘 그 넥타이 맸나 안맸나 보자 하고 쳐다봅니다. 정히 고역입니다. 선물한 분이 섭섭해할까봐 저는 그 넥타이를 한번 매고 나가봅니다.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슴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듣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철학을 듣자는 것도 아닙니다. 강단에 서신 저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동시에 믿음입니다. 지금의ㅣ 이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로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과 나와의관계를 하나님의 관계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전이라고 하는 이 집을 하나님의 집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이 시간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시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분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보는 것이 달라요. 육신적인 귀와 마음의 귀, 영적 귀가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이런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는 겸손합니다. 그는 단순합니다. 특별히 인간적 욕망에 대한 소원이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대로 돈벌겠다든가 출세하겠다든가 병 고치겠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없어요. 아무런 용청이 없어요. 오직 신령한 말씀, 그것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 소원 들어주세요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같은 인간적인 욕망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깨끗이 비워가지고 베드로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래서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들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전적으로 들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전적으로 말씀에 의탁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든지 순종하고, 그대로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마음입니다. 이미 그렇게 결심이 돼 있어요. 이런 마음으로 듣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더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 할 때에(44절)”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 할 때입니까 이것은 성경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에서 성경론을 한 10여년 동안 가르쳐옵니다. 전후 30년 동안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성경론 강의를 하는 가운데서 아주 핵심적인 부분으로 인용하는 말씀의 하나가 이 말씀입니다. “이 말 할 때에” 그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셨다 합니다.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느냐, 그 점입니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동시적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점입니다. 성경은 말씀과 함께 동시적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경론에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논리적으로 이렇게도 말합니다. 성령은 창작적인 영이 아니다, 성령은 독창적인 영이 아니다, 성령은 홀로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은 꼭 말슴과 함께 협력적으로 역사한다.-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번도 성경을 본적도 없고 들어본적도 없는데 빈손으로 입산수도 하러 산에 올라갔다. 산에 올라가 조용히 명상하고 기도하는 중에 어느 때엔가 하늘로부터 문득 성령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도 알고 성경도 알게 됐다-이런 얘기를 얻어들은적이 있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 산에 올라간다 해도 맨손으로 올라가서 그냥 엎드려 “주여”하면 되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렇지를 않습니다. 꼭 성경을 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저는 산에가는 사람보고 꼭 부탁을 합니다.. 30분 기도하고 30분 성경보고, 1시간 기도하고 1시간 성경보고 1시간 기도하라고 알겠어요 기도하는 것과 성경보는 것이 제대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산에 가서 기도하는 분들이 처음에는 성경을 읽는듯하다가 조금 덜 읽고, 또 조금 덜 읽고 하다가 덮어놓고 말아요. 베게하고 누워버려요. 성경이 베게구실밖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직통으로 알아요”합니다. 직통으로-이게 병입니다. 그때부터 병드는 것입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가버립니다.
성경은 말씀과 함께 역사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신학적 용어를 쓰며는 얘기가 잘되거든요) 말할 때에는 객관적 계시, 주관적 계시라고 합니다. 성경은 객관적 계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은 전부 객관적 계시입니다. 십자가의 사건도 객관적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도 객관적 계시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주관적 계시입니다. 한사람 한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받은 계시를 성령이 임해서 주관적으로 수용케하는 것입니다. 믿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역사입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성찬식을 할 때에 떡을 놓고 기도를 합니다. 기도함으로해서 이떡이 지금 거룩한 떡으로 의미를 갖게됩니다. 이제 이것을 받아 먹어야 하겠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받아 먹을때에 효력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되거든요. 받아먹는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약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좋은 약이 여기에 있다 하더라도 내가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먹어서 소화해야 소용이 있지요. 반대로는 내가 아무리 좋은 약을 먹으려 애를 쓰고 마음이 확 열려 있다 하더라도 약이 있어야 먹는 것이지요. 좋은 약이 있어야 먹습니다.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할수 있습니다. 객관적 계시가 없는 주관적 계시는 신비주의에 빠져요. 그런가하면 주관적 계시가 없는 객관적 계시는 효력이 없어요. 역사적 사릴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사와 주관적인 역사가 언제나 함께합니다. 동시적으로 역사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그 장면이 잘 나타나 있어요.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라고 합니다. 말씀하는 바로 그 시간에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의 사건으로 말한다면 여러분이 어디가서 골방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바로 성경말씀 들고 있는 이 시간에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것을 다 체험했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말씀 듣고 있는 이 시간에 내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이상하게도 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적중해 들어오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낟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영이 치유되고 몸이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생각할수 없었던 큰 은혜를 생각하게 되고, 그토록 불평불만으로 차있던 심령이 감사찬송으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토록 나약하던 사람이 새로운 용기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하는 역사, 말씀을 듣는 역사, 말씀을 믿게 하는 역사, 말씀이 효력을 내게 하는 역사가 다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말씀 없이 말씀 듣는 역사가 이루어지겠습니까 말씀 듣는 역사가 없다면 그 말씀은 겉돌고 말아요. 들었지만 소용없어요. 그대로 흘려지고, 이해도 느낌도 없이 잠시 머물렀다 사라지고 말아요.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말 할대에”라고 하는 말씀을 중히 생각하게 됩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바로 십자가 사건을 말씀함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잘살고, 어떻게 복받고, 세상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게서 어떻게 십자가에 돌아가셨고 어떻게 부활하셨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세상철학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 성경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듣자고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잊지 말것입니다. 어떤 분은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어요. 이것 역시 중생하지 못한 탓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하는 사람인데,“아 우리 목사님은 밤낮 케케묵은 성경이야기만 한다. 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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