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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하신 하나님 (출 34:29-35)

첨부 1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 얼굴은 하나님의 영광이 광채를 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광채가 났다’라는 말은 히브리 성경 중 이곳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것으로 광선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된 것을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한 사건을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그 광채나는 얼굴을 두려워서 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백성들 앞에 서게 됩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오늘의 서신서 본문인 고린도후서에서 다른 각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백성에게 나아 올 때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타난 것이 됩니다.
이집트에서는 제사장들이 쓰는 가면이 있었는데 그 가면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신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어서 제사장은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가면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적으로 생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이스라엘의 계약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계약의 중재자로서 특별한 역활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2-4:2
(고후3: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3: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3: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4: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본문에서 바울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후 얼굴에 나던 광채와 그것을 수건으로 가렸던 사건을 해석합니다.
이 사건을 보는 바울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모세를 그리스도와 동일한 유형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도들 혹은 그들의 사역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모세의 사역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자신의 얼굴의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백성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려고 수건을 가린 것과 비교하면서 바울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고 담대히 열어 보인다고 말합니다.
14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복음을 들을 때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이를 거절하는데 이는 옛 계약을 아직도 수건을 가리운 채로 읽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모세가 쓴 수건은 안에서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소경 됨을 상징합니다.
바울이 교회 안에 알려진 영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에 주목합시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주의 영광 주의 영광을 연결시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는 더이상 수건을 쓰지 않은 채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여 보며,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 9:28-36
(눅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눅9: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눅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눅9: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눅9: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눅9: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눅9: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눅9: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의 변형은 기도하시는 중에 시작되어 하나의 압축적인 종교적 경험으로 발전됩니다.
전통적으로 이 산은 다볼산으로 추측되어 왔으나 요즈음의 주석 학자들은 헬몬산을 유력하게 꼽습니다.
또 다른 극단적인 접근은 이 사건을 지리적인 의미에서 어떠한 산으로 추정하기보다는 도리어 메시야로 서의 자신을 하늘의 영광 속에서 발견한 하나의 환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이것은 예수님의 신비적 경험으로 자주 인용되어 왔습니다.
산상 변모 주일이 마지막 주현절 다음에 오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예수님께서 지상의 사역을 감당하시던 일로부터 변화하여 이제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현현자로서 고난의 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점진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변형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후에 나타나고 있으며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눅9:22) 는 예수님의 말씀 뒤에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변형 사건 중에도 예수님의 죽음이 예견되고 있는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1절의 ‘예루살렘’은 누가의 신학을 따른 후대의 첨가로 여겨지며 33-36절에서 베드로가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했다”는 구절 등을 살펴볼 때 이 변형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1.하나님의 현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신 곳은 변화 산과 갈보리 산에서입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듯이 주현절이란 명칭은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즉,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 안에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변화 산에서 하나님의 가장 영광스런 모습을 드러내셨으며 갈보리 산에서는 인간을 위하여 고통받는, 인간과 연결된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어 보여주셨습니다.(눅23:34)
(눅23:34)“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쌔”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을 때 인간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변화 산상에서 제자들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올바로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2.가려진 수건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얼굴의 광채로 인하여 모세를 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우고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게 되는데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주목하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수건이 가리워져 있었다고 말합니다.(고후3:14)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면 인간은 그것을 바로볼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 사이에는 언제나 수건이 놓이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변화 산상에서 예수님의 현현도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이제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성령의 강림 이후에 있은 고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고후3:17)
특별히 바울은 예수님의 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현현을 기념하는 주현절은 따라서 하나님의 변화 사건을 주의 깊게 명상하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수님의 궁극적 현현, 즉 십자가 사건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을 대망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산상 변모 주일은 이제 주현절을 넘어서 오순절을 향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주님의 행적, 주님의 고난,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 예수님의 부활, 에수님의 승천 순으로서 성령 강림까지 이루어집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부르시고 그들을 사용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씌워진 수건을 벗겨 주셔서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하여주옵소서, 성령으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 안에서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살아 계신 예수님의 광채가 우리 마음에 비취게 하셔서 주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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