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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신 10: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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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버지가 임종이 가까워지면서 여러 모로 불편하게 지내고 있지만 온 집안이 그를 극진히 떠받들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손가락에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출가한 딸이 와서 “그 반지, 돌아가신 다음에는 저 주세요”하고 부탁합니다. 아버지는 “오냐, 그러마”하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며느리가 시아버지 보고 “돌아가시게 되면 그 반지 저 주세요”하고 부탁합니다. 역시 “오냐, 그러마”하고 ‘약속’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 죽을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그 반지를 준다는 말 없이 그대로 끼고 있다가 죽었습니다. 반지 덕분에 그동안 효도 잘받고 말입니다. 그 반지 하나 얻어 가지려고 딸과 며느리는 아버지(시아버지) 생전에 열심히 잘해드렸던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확인해보았더니 그 다이아반지는 가짜더랍니다.
여러분, 효도하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유산을 바라고 효도한다면 이 얼마나 불쾌한 일입니까 우리가 선한 일을 한다고 하지만, 그 선한 일이 칭찬을 듣기 위한 것이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라면 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입니까 사람이 좋은 일을 하고 칭찬받을 수는 있지만, 칭찬받기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정말로 아름답지 못한 일입니다. 못할 짓입니다.
신앙의 구조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또하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믿고 그 안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적어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구하는 자기중심적 신앙 동기에서 떠나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신앙이 수단이 될 수 없고, 경건이 수단이 될 수 없고, 우리의 진실함이 결코 어떤 소원을 위한 방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 소원보다는 하나님의 소원, 내 기쁨보다는 하나님의 기쁨,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 12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윤리의 총 강령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의 생활 출발이요, 원칙이요, 기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공생애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많은 문제가 있었지마는 특별히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있습니다. 늘 이 문제 때문에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자기들의 욕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민족적인 욕구--나라가 독립되기를 바랐고, 개인적인 욕구--소원성취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드디어 메시야가 왔다고 하니까 ‘이제는 되었다’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우정승 좌정승 따지면서 자기 출세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내 중심, 내 욕망이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렇게 소원을 가지고 섬기다가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혹은 더디다고,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조금 뜻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렇지만 그 동기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하나님께서 형벌하시고, 하나님께서 저주하실까 무서워서,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벌벌떨면서 율법을 억지로 이렇게저렇게 지켜갔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아주 무서운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좀더 나아가서 어떤 분들은 선한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종교생활을 두루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목적은 보상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는 보상심리, 요샛말로는 기복신앙(祈福信仰)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보상으로 받아낼 생각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선한 일을 하고, 그렇게 애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합당치 않은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책망하시고 계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는 이런 마음 가지고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거든요. 율법의 본뜻이 하나님의 사랑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생각하느냐 진정한 믿음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계명도 있고 율법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고, 그렇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바른 자세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가 경외함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은 신임재 의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신다, 하나님께서 감찰하신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라며 항상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그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존재와 그 능력을 항상 생각하고, 생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입니다. 여러분, “신성한 두려움은 영혼의 문지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명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출 20:7)”--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그 앞에 나올 때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그 앞에 예배할 때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거리에서든 시장에서든 어디에서든 항상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경건,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된 의식, 그 생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군자가 두려워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천명이요, 둘째는 대인이요, 셋째는 성현이다.” 군자에 반대되는 소인, 즉 영 시원치 않은 이 사람들은 어떠냐, 천명을 경시하고 대인을 존경하지 않고 성현의 말씀을 업신여깁니다. 이것이 소인입니다. 적어도 군자라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워할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요. 그래서 천명을 두려워하는 것이요, 성현의 말씀을 소중히 여깁니다. 이것이 군자라고 공자는 설명한바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그 길로 행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버리고 주의 길로 행합니다. 세상은 넓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뜻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의 길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가슴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반가워하고 기뻐합니다.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합니다. 또한 그 자세는 항상 섬기는 자세입니다. 여호와를 섬깁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이 아니라 섬기려는 마음뿐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를 섬기는 것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또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말씀의 계명을 따라서 행동합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이 다섯 가지를 원하십니다.
이 다섯 가지를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면,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깊은 뜻의 말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13절)”--네 행복을 위하여, 깊은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계명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요, 나를 위한 것입니다. 내 행복을 위하여 은혜로 내게 주신 계명이라고 하는 인식에서 출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우리 부모님들이 자식을 위하여 잔소리를 합니다. 공부해라, 무엇해라, 또 무엇해라......이렇게 하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자녀들이 어떻게 생각하기를 바랍니까 누구를 위한 잔소리입니까 아마도 자녀들이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것이고, 내 행복, 내 장래를 위한 것이다’라고 소화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왜 나를 괴롭히느냐고 대듭니다. 달리 불효자가 아니라 이런 자녀가 불효자입니다. 무슨 말씀이 들려오든지 모슨 명령이 있든지 전부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시는 것이라고, 나를 사랑하셔서, 내 행복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요 명령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여주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Foof)’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사람들이 러시아에서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 고생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배경으로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면 정말 유대사람들이 어이없는 고통을 당하고 갖은고생을 다 합니다. 많은 핍박을 받습니다. 너무너무 살기가 힘들고 어려우니까 주인공의 부인이 뭐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자 테빗이라고 하는 그 남편이 다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딱 한마디 아내에게 묻습니다. “Do you love me (나를 사랑하오)” 아내는 이 말에 대꾸는 하지도 않고, 시집와서 25년 동안 힘들게 아이낳고, 어려운 살림과 핍박 속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자꾸 늘어놓습니다. 남편은 이 말들을 고스란히 다 듣고나서 아내에게 또 묻습니다 “I know that. But I ask you again. Do you love me(잘 압니다. 그러나 다시 묻겠소. 나를 사랑하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시집와서 25년 동안을 줄곧 갖은고생을 다 하고 또 이렇다저렇다고 떠들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많은 수고가 곧 사랑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아요. 문제는 지금 행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수고가 기쁘고, 이 수고가 자랑스럽고, 이 수고가 행복해야 사랑이지요. 신세타령 다 해가면서, 죽지 못해서 불평 불만으로 일하는 것, 백 년을 했더라도 소용이 없어요. 반갑지 않아요. 오직 행복한 마음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아내고 남편이고 간에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하루에 백 번을 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기쁨이 있습디까 여러분이 듣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가장 좋은 말은 “나는 당신으로 인해서 행복합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아도 내가 이 집에 시집오기를 참 잘했습니다” “당신을 선택한 것은 참 잘한 것이오”라는 말입니다. 또한 자녀들이 부모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의 자녀가 된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부모님으로 인해서 저는 행복합니다.” 이런 말 한번 들어본다면 죽어도 한 없겠지요. 그런데 왜 이렇게 불평이 많습니까 난 이 집에 태어난 것이 한스럽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고통이 있고, 무겁고, 괴롭고......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이 빠져나갔어요. 어느 사이에 사랑이 식어버렸어요. 사랑이 그만 실종되었어요. 그래서 짐이 무거운 것이요, 그래서 그다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사실 부하고 가난하고가 문제입니까 잘되고 안되고가 문제입니까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그 수고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래서 행복의 극치를 이렇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이대로 눈을 감고 죽어도 한이 없다”고. 여러분, 그런 경험이 없었습니까 그렇다면 인생 헛되게 산 것입니다. 순간순간을 살아감에 있어서 정말 이대로 내 생애가 끝나도 한이 없어야 합니다. 왜요 나는 지금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그 큰 사랑안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딱 한마디를 묻는 것입니다. 긴 위로의 말이 필요없습니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이 고통은 오히려 즐거움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얼마든지 행복으로 소화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말씀 15절에서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택하시고, 구속하시고, 인도하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사랑받는 사람으로, 많은 은혜 가운데 사는 자로 저들이 스스로 인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주는 계명, 이것은 곧 너희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저들이 알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또 그런 마음으로 계명을 지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특별히 종교개혁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이지만 우리 신교에서도 이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계명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명의 서론입니다. 출애굽기 20장 2,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명령하실 때에 바로 그 서두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바로 이 대 전제가 중요한 것입니다. 너희가 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 이 율법을 지켜서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그런 이야기가 압니다. ‘내가 너를 애굽땅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여낸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런고로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나는 너를 구원했다, 그런고로 이 명령을 지킬, 이 명령은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호세아에 보면,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창녀와 결혼을 합니다. 아주 전문적인 프로급 창녀와 결혼을 합니다. 결혼 자체도 어려웠었는데, 고멜이라는 이 창녀는 고마운 줄로 모르고 결혼한 다음에도 행위가 불결하였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에 호세아는 ‘로암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무래도 내 자식이 아닌 것 같아서 ‘아무래도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이름지은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있었는데 고멜이 집을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다시 창녀가 되고 그 다음에는 종이 되어서 팔려가버렸습니다. 호세아 내심으로는 어쩌면 잘되었다 싶었을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淫婦)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호 3:1).”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고멜을 다시 돈주고 사옵니다. 그리고 이 더러운 여자를 앞에 놓고 이렇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行淫)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 3:3)”-내가 너만을 사랑할 터이니 너는 나만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나만을 사랑하라’는 말이 잘못된 것입니까 호세아의 경우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만신창이가 된 인간을 구원해놓고, ‘나는 너만을 사랑했다, 너는 나만을 사랑해라’--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래, 이 명령이 잘못된 명령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여섯 가지 욕구가 있다고 아브라함 네슬로는 말했습니다. 첫째는 안정의 욕구--평안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둘째는 소속의 욕구--어디엔가 소속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셋째는 인정의 욕구--남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넷째는 경험의 욕구--무엇인가 경험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 다음은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마지막으로 여섯째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이것은 사랑의 욕구입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고......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 한창 그 명성을 떨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덴이라는 곳에 있던 플라톤에게 어떤 젊은 사람이 찾아와서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내로라 하는 유명한 분들을 찾아갔었지만 배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고민했었는데 이제야 제 스승님을 바로 만난 것 같습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플라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어느 스승을 사랑해본 일이 있습니까 스승을 존경하고 사랑함이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배울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야 그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야 그 계명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야 그 말씀의 심오함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이란 그를 기뻐하는 것이요, 그를 행복케 하는 것이요, 그 말씀 듣는 것을 즐기는 것이요, 그의 다스림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를 생각하는 일, 그를 명상하는 일, 그 자체를 가장 기뻐하는 것이요 그를 섬기는 일을 최고의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하여 수고하는 일은 그대로가 내 영광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영 믿지 않는 완악한 유대사람들을 놓고 이런 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하나님 사랑이 없음을 알았노라 하심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 아니냐 하시는 말씀입니다. 나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의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가는 것이 소망입니다.
여러분, 나의 기쁨을 버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를 때에 내 행복이 있고, 내 기쁨이 있고, 나를 향한 기쁨이 그 속에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 복된 길로 가라고.
<기 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고 살면서도 아직도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그리고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자인 것처럼 원망 가운데 사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게 하사 주의 계명을 지키되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며, 주를 사랑하되 전심 전력하여 사랑하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안에서 진정한 나의 행복, 나의 기쁨, 나의 능력, 나의 지혜를 다 얻을 수 있으며, 내 존재의 가치도 바로 거기에서 찾을 수 있도록 사랑의 길로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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