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는 하나님이시고 그 밖에 다른 신은 없다2 (신 04:1-40)

첨부 1


4. 넷째 단계는 번역된 본문을 이해하면서 이 본문의 역사적 배경이나 문학적 배경 등을 점검하는 일이다.
본 설교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신 1:3) 광야 생활 끝에 요단 동편의 모든 적들을 다 멸한 후에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모압 고원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한 설교 내용이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자들에게 주는 삶의 교훈들로서 주의 법도와 규례를 잘 지키면 약속의 땅에서 오래오래 잘 살겠고 그렇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는 조건문 속에 담겨진 설교내용이다. 본래 모세의 입을 통해 설교하는 자는 출애굽 사건과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강림과 십계명 수여, 바알브올에서 진노하셨던 사건들을 잘 알았고, 그가 이런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법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준 지존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길이 삶의 길임을 역설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 설교자는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모세의 설교내용을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모세 시대의 교훈이 설교자의 시대에서 현재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이란 말이 반복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문학양식은 이야기체의 설교이다. 민담이나 예언도 아니고 이야기체의 교훈이다.
1-8절은 서론 격에 해당되고, 32-40절 역시 결론부분에 해당되고 9-31절이 본론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서론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말하고, 결론에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은 없으므로 하나님만 섬기고 경배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본론에서는 하나님을 섬긴 삶의 역사와 그 반대현상들을 자세히 부연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 즉 설교되어진 법을 율법(Torah)이라고 한다.

5. 다섯번째 단계는 본문을 주석하는 단계이다.
주석이란 본문의 메시지의 초점을 찾는 과제이다. 흔히 설교자는 설교자 자신이 하고 싶은 생각들을 말하고 싶을 때 그 증빙자료로써 본문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결코 현명한 처사가 못된다. 주석설교란 본문을 가지고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Text)자체가 말하는 바를 찾아 선포하는 일이 바로 설교자의 기능이요 사명이다. 설교자 자신의 견해를 본문에 투입시키는 일은 하나님의 본래 뜻을 왜곡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다, 설교자는 본문에 기록된 말씀만을 전해야 한다. 설교자란 단지 성경에 기록된 여러 역사적인 내용과 말씀들을 쉽게 풀이하고 청중이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설명자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의 본문에서 설교자는 지난 역사적 사건들을 열거하면서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업적을 기술하고 이런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길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연역적(deductive)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구체적이고 상세한 사건들을 열거하면서 설명하는 귀납적(inductive)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창조 때부터 출애굽의 과정을 거쳐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까지의 역사 속에서 역사(役事)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 섬김을 역설하고 있다.
여호수아의 설교(수 24장)도 역시 역사적 사건을 연대순으로 나열하고 있으며 사무엘의 설교(삼상 12장)도 족장과 출애굽과 정착의 역사를 역설하고 있고 스테반의 설교(행 7장)도 역사 나열로 설교의 내용을 이룬다. 그래서 토라(Torah)란 설교되어진 법(The Law preached)을 가리키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 명령, 또는 교훈으로 번역된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는 역사의 재해석자요 부연설명자이다. 이런 맥락에서 설교자로서 우리는 우리 나라 역사 속에 나타난 역사적 사건들을 재해석하고 부연하여 설교의 소재로 활용했으면 한다.
주석할 때 각종 역사비평적 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현실에 맞게 활용함이 바람직하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환자의 상태에 따라 처방이 주어져야 하는 것처럼 성서주석에 있어서도 모든 방법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모든 환자에게 똑같은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듯이 문제는 방법론에 있다기 보다는 본래 저자의 근본의도를 잘 파악함이 우선적이라 하겠다.
이런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본문이해가 최우선 과제다. 본문을 읽고 또 읽고, 역본들을 통해서 또 읽고 뜻을 깨달아 메시지의 초점을 파악함이 요청된다.6. 마지막 여섯번째 단계는 본문의 메시지를 찾는 일이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메시지의 초점은 주님만이 하나님이시고 그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증언하고 그분만을 사랑하고 섬길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설교자는 서론 부분에 해당되는 1-8절 이하에서 청중들이 할 우선과제로써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이 길만이 생명의 길임을 선언하고 있다.
1절과 5절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를 듣고 준행할 것을 요구한다. 듣고 행하라는 권고형으로 시작되는 이 절은 호렙산 계시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뜻으로 표현된 법도와 규례를 준행함이 인간의 본분임을 말한다.
1절에서는 조건절로 이 법도를 준행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민수기의 바알브올 사건을 예로 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전적으로 인도한 그들의 주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브올을 섬긴 자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진멸 당했고 대신 하나님께 붙어 떠나지 않는 자들은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 1계명을 환기시키고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생명이 있고 불복하면 죽음밖에 없음을 선포하고 있다.
5절에서는 모세가 오랫동안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 법도대로 행한 결과와 그 파급효과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의 법을 행한 자들은 지혜로운 자들임을 말한다(6절). 요셉이나 솔로몬이 지혜를 얻어 훌륭한 통치자가 된 것도 하나님의 법도를 행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을 준행하는 자는 곧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자들이다(7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명은 곧 하나님의 현존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하나님의 현존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이치와 같은 것이다. 다바르, 곧 말씀(계명)과 사건은 동전의 양면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 준수의 마지막 결과는 곧 하나님의 법도가 실천되므로 사회에 공의와 정의가 실현된다는 것이다(8절). 즉 예언자들의 절규대로 하나님의 뜻이 구현되는 사회는 반드시 공의와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임을 알수있다.
서론에서는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고 그 법에 순응하면 생명이 있다고 말하고, 따라서 지혜와 하나님의 현존에 거할 수 있는 공의로운 사회 즉 하나님 나라가 언급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율법도 복음의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율법에 순종하므로 지혜로운 백성이 되고 복음을 체험함으로 위대한 나라가 된 백성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성민(聖民)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도록 모세는 권고하고 있다.
9-31절의 본론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으로 십계명의 제2계명, 즉 우상숭배 금지에 대하여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피조물이나 피조물로 만든 형체를 하나님으로 섬길 수 없다(16-19절). 왜냐하면 하나님은 볼 수 있는 형체를 가진 분이 아니시고 불꽃 속에서 음성으로 들려오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11-12, 15, 24, 33, 36). 여호와께서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되 음성뿐이므로 너희가 그 소리만 듣고 그 형상은 보지 못하였느니라(12절)고 말한다.
불로서 상징되는 표현이 본문에 7번 나타난다(11, 12, 15, 24, 33절에 한번씩, 그리고 36절에 두 번). 불이란 빛을 비추는 기능과 더불어 소멸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신비의 실재이시다. 초월과 내재를 다 포함한다. 여기 가까이 계시면서도 먼 하늘에 계신 분이다. 인간의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분이시고 영원한 분이시다. 유한한 인간에게는 신비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형상 없이 음성으로, 말씀으로 들어오시는 분이시다.
36절에는 이렇게 표현된다:주께서는 너희를 단련하시려고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그의 음성을 들려주시고 땅 위에서는 그의 큰 불을 보여 주셨다. 그래서 너희는 불 가운데서 그의 말씀을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시적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가시적 존재로 섬길 수 없고 불 가시적 존재로만 섬김이 가능하다. 그래서 형상금지가 6번이나 반복되고 있다(16, 17, 18, 19, 23, 24절).
하나님의 형상금지 이유는 ①하나님의 객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상은 하나님의 전능과 자유함을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②하나님이 피조물화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신데 창조주를 피조물이나 피조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전락케 한다. ③하나님이 지역화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한 장소에 제한되는 지역신으로 제한성을 받게 만든다. 따라서 비교할 수 없는 유일의 하나님을 인간의 의도로 대치시키는 우상숭배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멸하시는 분이며 질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24-2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떠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 때문에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31절).
그래서 하나님 섬김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그의 법도를 준행함으로 그를 발견하고 만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의 법도를 듣고 경건을 깨닫는 예배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생활로 일관되어야 한다. 섬김을 행함으로 옮기는 섬김의 삶이 설교의 요지이다. 행함을 목적으로 하는 설교의 내용이다.
32-40절은 결론부분으로 먼저 하나님의 위대한 업적을 찬양하고 서론 부분에서 언급되었던 제1계명의 내용, 즉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선언한다(35-39).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조상들을 사랑하시고도 또한 그들의 후손을 택하고 그들을 인도하였음을 끝으로 언급함으로써 회개를 촉구한다. 하나님께 돌아옴은 심판을 넘어선다. 그것은 조상들과 맺은 계약의 은혜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나타난 은혜의 섭리는 비교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하나님 자신이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incomparability)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 본문 설교의 초점으로 주어지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한 분이시므로 그 분만을 섬기고 다른 우상들, 다른 피조물들을 섬기지 말라는 내용들이 신약에서도 첫째가는 계명(마 22:37)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불려진 것도 우연은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의 표현인 계명들을 준수할 때만이 생명이 보존되었던 것을 앞으로의 우리 삶 속에서 체험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