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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 (스 8,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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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보게가 이러하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7장에서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살펴 보았다.

오늘의 8장은 그들의 돌아 옮의 구체적인 설명이다.

무려 9천여명이나 되는 많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긴긴 여행을 시작했다.

별로 쉴만한 곳도 없었다.

그들이 출발한 것은 정월 초하루였다.

8;15절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일 동안 장막에 유하며 백서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8;31절에 보면 정월 십이일에 그 머물렀던 곳을 출발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니 아하와 강가에 삼일을 머물렀다.

이들이 삼일을 머물렀던 이유는 두가가 있다.

첫째는 무리들의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둘째는 무리 중에 레위인이 있는가를 점검하기 위함이었다.(15) 그런데 9000명이나 되는 많은 무리들 중에 레위인이 없었다.

지금 에스라가 고국으로 가고 있는 것은 타락한 백성들의 신앙생활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함께 일할 레위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레위인은 무리 중에 없었다.

에스라의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 길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외롭기 그지 없는 길이 바로 주님의 사역의 길이었다.

 1,세상 왕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에스라가 바사를 출발할 때 바사 왕이 무었이든지 주겠다고 말했다 (스7;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필요하다면 험난한 길에 군대까지도 함께 보내어 줄뜻을 비추었다.

(스8;22절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그런데 에스라는 왕의 도움을 단호히 거절해 버렸다.

에스라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가 있는가하면 이런 일에 전혀 무관심한 자들도 있다는 것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에스라는 하나님의 편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노력을 했다.

그래서 에스라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인 것을 의지함은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왕의 도움도 받아 드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도움도 받으면 얼마나 더 좋은가라고 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라의 믿음은 이런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나님이면 하나님이고 세상이면 세상이었다.

분명한 신앙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바사 왕이 자처한 도움이었으나 에스라는 단호히 거절해 버렸다.

 2,하나님이 함께하는 믿음의 고백

에스라는 도와 주겠다는 바사 왕에게 다음과 같은 믿음을 고백했다.

22절이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 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하였음이라 고 했다.

왕에게 보병과 마병을 구하는 일같은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오늘 우리들은 어떤 일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가 세상 사람들처럼 저들과 같은 방법으로 살고 있지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 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엎드리어 기도 생활하는 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무었을 부그럽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우리들이 한 번쯤은 마음에 물어 보아야 할 문제인줄 안다.

에스라에겐 보병도 마명도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에스라에게도 보병과 마병이 필요하다.

그런데 보명과 마병이 어디서 무었때문에 있어야하는가가 문제였다.

세상이 주는 그 어떤 힘같은 것을 의지하다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약해질까바 그 것을 더 염려했던 것이 분명하다.

에스라가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우리들도 배워야하겠다.

출1;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에스라의 마음은 평온하기만 했다.1),다윗은 어린 소년의 몸으로 물매와 시냇가에서 주은 돌 다섯 개만을 주머니에 넣고 당시에 가장 무서웠던 용장 골리앗을 향하여 싸우러 나갔다 그때 다윗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속으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네가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것도 좋지만 사울왕의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창과 칼을 가지고 가는게 더 좋을 것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하나로 만족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었다.

이 믿음이 다윗을 승리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으로는 에스라의 이 믿음의 행동을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1 % 만 차지하고 있고 99 %는 상식적인 것이거나 경험같은 것으로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에스라의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99 %를 차지하고 있고 그 나머지 1 %가 자신의 경험과 상식같은 것이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 하면서도 쇠로 된 갑옷으로 무장한 투사가 곁에 있을 때 더 안전을 느낀다.

또 수 많은 천군 천사가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우리를 지켜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들의 자신의 외투 속에는 날선 칼을 준비해 두기를 더 신뢰 한다.

또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매일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신다고 믿으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위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감추어 두는 것을 더 좋와한다.

하나님을 능력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비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에스라가 가진 믿음처럼 단호한 결단의 삶이 있어야한다.

오늘 날 우리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에스라와 같은 절대적인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말을 잘 하는 사람보다는 무릎을 꿀고 복종하는 자를 더 기뻐하신다.

또 아름답게 장식된 웅장한 교회보다는 비록 초라할지라도 하나님의 여광을 위한 열심이 있는 성도 들이 모인 교회를 더 기뻐하신다.

그래서 에스라는 왕의 도움을 청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예를 침해하는 일을 행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이 위험한 편을 즐겨 택했다.

진정한 본향을 하늘나라라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온갓 부와 권력을 탐하는 자는 없는가 썩어지지 않을 부를 하늘 곳간에 쌓아 둔다고 하면서도 썩어질 것에 눈이 먼 사람은 없는가 하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기쁨이라하면서도 슬픈일 어려운 일 만날때 비탄에 빠지는 자는 없는가 사람들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존재를 위해 산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업는 신령한 것에 대하여 관심이 먼 사람은 없는가 자신은 고매하고 높은 신념을 따라 행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생활에서는 세상 사람들의 냉정하고 속된 원칙 따라 행하는 자는 없는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을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말과 행위 즉 믿음이 일치하지 못함을 보고 우리들을 거짓의 종교라고 말하지 않을까하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는가

3,하나님을 위한 금식의 결과

21절 때에 내가 아하와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우히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3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 응락하심을 입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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