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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창 05: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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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상위권의 나라들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일본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제일로 길어지고 있음이 보도된 적이 있다.

이것은 곧 경제대국의 부와 그 나라의 수명이 정비례함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1,장수시대의 에녹

창세기 초기의 장수현상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어서 잘 살도록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덴을 상실하고도 그렇게 오래 잘 살 수 있었다면 에덴은 얼마나 더 아름답고 좋은 곳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에녹이 살고 있었던 시대는 거의가 다 900세 정도가 표준의 나이였다.

지금으로 보아서는 대단한 장수였으나 당시로는 보통이었다.

얼마전 신문에 북한의 김일성이가 오래 살고 싶어서 처녀들의 피를 자기몸에 교체 해 넣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김일성이가 그렇게까지하면서라도 오래 오래 살고 싶은 것은 달리 정권욕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에녹당시의 장수는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나 다 같이 장수의 시대에 살았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그렇게 긴 수명을 주셨던 것은 이 지구상에 종족을 번식케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아부라함때까지만 하여도 막대한 인구가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장수가 축복인 줄 알고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같다.

장수의 삶을 감사하여 하나님께 무었을 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기록이란 고작해서 누구의 아들 아무개가 아들 딸 놓고 얼마를 살다가 죽었더라는 것 뿐이다.

에녹을 제외하고는 아들과 딸을 낳았다는 기록 외에 달리 아름다운 기사가 없다.

이는 동물들에게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공통점에 불과한 것이라 하겠다.

전적으로 육신만의 삶이였지 영적인 것은 단 한 가지도 발견할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일치점을 찾을 수 없었다.

지구 어누 구석 한곳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은 흔적을 찾기가 힘이든다.

어째서 그런 일이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러한 일이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째서일까 그들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예배할 하나님도 모시지 않았단 말인가 어니다.

그들의 영혼은 너무나 물질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질에의한 즐거움, 세상으로 인한 즐거움으로 차고 넘쳐 있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장수의 생명을 가지고 육신만을 위하여만 살았던 시대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가지고 육의 향락만을 위하여 살았던 시대였다.

하나님게서 주신 축복을 가지고 자기만을 위하여 살았던 시대였다.

이러한 배경은 노아시대가 잘 보여주고 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말할 수 없이 타락했던 시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 시대에 에녹이란 분이 있었던 것이다.

 2,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세기의 사적에 하나님과 동행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두사람뿐이었다.

아담의 칠대손인 에녹과 홍수시대의 주인공인 노아 두 사람이다.

세대가 좋와서 또는 환경과 여건이 적당하기 때문에 저들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세상에 내신 것은 에녹처럼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을 살아라고 내셨던 것이었다.

여기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동사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에녹과 동행했었다는 말이 아니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동사이 기에 참으로 귀중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히브리말로 히트할레크( )인데 이는 문법적으로는 사역형 재귀동사이다.

그 뜻은 매우 다향하다.

... 속하여 걷다.

신중히 걷다.

그 자신이 홀로 따라 갔다.

충실하게 걷다.

항상 계속 걷다.

변치않고 따라 걷다.

항상 행동을 같이 하다. 등이다.

이를 우리 말로 동행하다라고 번역을 했다.

그러나 히브리적 사고로서는 하나님과 동일 선상에서의 동행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히트할레크란 동사를 바로 알지 못하면 그 의미도 알 수 없게 된다.

히트할레크는 행동이 주어자 자신에게로 돌아오며 주어자는 행동속에 같이 있어야 한다.

누구의 강요나 지시 없이 그 스스로가 충실하게 따라 걸었다는 뜻이다.

동행이 아니라 충실하게 변치않고 항상 계속해서 걸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히크할레크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켜 그에게 속하여 걸었으며 매사 신중하게 걸었다.

변치않는 충성심을 가지고 따라 걸었으며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행동을 하면서 걸었다는 것을 말한다.

에녹은 당시에 역사를 빛낸 인물이 되었다.

그렇게 역사를 빛낼 수 있었던 것이 히트할레크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 거의가 900세의 장수를 할 때에 에녹은 365세를 살았을 뿐이다.

에녹이 65세에 아들 므드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을 했었다.

평균수명이 900세일 때 유독 아담의 7대손으로 태어난 에녹은 365세를 살았다.

그러나 이 삶을 무한한 의미를 주고 있다.

태양력으로 일년이 몇일인가 에녹이 365년을 살았다는 것은 해가 계속돌고 있는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위미한다.

그래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에 비록 그는 수명을 365세로 제한 받았으나 죽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데려 간것 뿐이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얼마나 함께 걸을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예수를 얼마나 올 믿었는가라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 동행을 했어나는 더 중요하고 중요한 사실이다.

예수 오래 믿은 것 자랑하지 말고 예수와 함께 동행했던 것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1),하나님과의 동행은 안전한 것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핼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아버지와 어린 다르의 동행 2),하나님과의 동행은 유익한 것이다.

지금 소말리아 사람이 나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나를 부러워 할 것인가 짐금 크로아티아나 쎄르비아 어느 병원에 내가 거닐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은 전쟁의 상혼으로 막 죽어가고 또 팔 다리를 절단해야 하고 또 어떤 이는 눈을 , 또 어떤 이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딩구는 사이에 거닐고 있는 나를 생각해 보라.

지금 현실로 내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지금 현실이 소말리아 보다 또 전쟁터의 어느 병원보다도 더 심각한 현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3),하나님과 동햄함은 즐거운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 혼자 있지 않았다.

사도 요한이 반모 섬에 혼자 있지 않았다.

 3,하나님이 에녹을 데려감

25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심으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더라 아멘 !1),에녹은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많은 설교를 하고 있다.

하나님과 함께 걸었노라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었노라고 말했다.

2),에녹의 승천이 귀중한 설교를 하고 있다.

사람들의 데려감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또 인간세계 저편의 나라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마므리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과 자신있게 함께 걸으시길 바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로 걸으시길 바란다. 무조건, 언제나, 무었에나...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로 걸으실 수 있기를 바란다.

인내하면서 하늘의 상급을 바라면서 에녹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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