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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로 알아감(8) (출 03: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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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모세 이전 족장들에게 계시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성경에서 이미 일어났다고 하시는 말씀이나 장차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말씀들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처녀에게서 나셨다는 말씀이나,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씀은 우리 인간의 세계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 영원히 죽지 아니할 몸을 입고 살게 된다고 하신 약속도 우리 인간 세계의 능력의 한계에서 생각하면 도무지 믿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러한 사실들을 믿을 수 있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전능성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사두개인들 처럼 이런 약속들을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막12:24)
(마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따라서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아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모든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믿음의 기초로 해서 그 위에 쌓여진 것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없다면 이미 일어났거나 장차 일어나게 될 구속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도무지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능성이 어떤 때에 발휘되느냐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성’이라고 하면 사도신경이 떠오르면서 창조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한 분으로 계시하신 것은 창조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창17장 1-2절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는데, 어떠한 정황에서 그렇게 계시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창17:1)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라고 계시하셨던 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뢰가 약화되어 가는 맥락에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께서 하실 의사가 있는 것과 관련되어서 발휘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의사가 없는 것을 가지고서 내편에서의 일방적인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까 꼭 이뤄질 줄 믿습니다!” 하면서 구했지만 이뤄지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하나님께서 하실 의사가 있는 것과 관련해서 발휘되어지고, 확인되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 족장시대에는 『여호와』로 알리지 아니하셨다가, 모세 때에 와서야 알리셨다는 의미
오늘은 하나님께서 모세 때에 와서 비로서 자신을 『여호와』로 알리셨다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출3:13-15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도록 보냄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대해서 묻는 내용과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답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할텐데, “내가 무엇이라고 말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과연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라서 물은 것일까요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바로 왕에게 나아갔다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만 더 학대를 당하게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고, 모세는 하나님께 돌아와서 어찌하여 자기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학대를 당하게 하셨느냐고 하소연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고 하시면서, 다시 한번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셨습니다(출6:3).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6:3)
과연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모세 이전의 족장들에게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알려지지 아니하였고, 모세 때에 와서야 이제 비로서 그 이름이 알려졌다는 뜻이겠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뜻이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족장시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뜻이겠습니까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라면 창15:6-8절에 있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15: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이미 족장 아브람에게 『여호와』로 알리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아브람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창14:22, 15:2).
(창14:22)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창15:2)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보다 훨씬 이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창4:26절에 의하면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최초로 부르게 되었던 것은 셋이 에노스를 낳은 이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오늘 본문 출3:13-15에서 모세에게 당신을 『여호와』로 알리시기까지 무려 160회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55회는 확실히 족장들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족장들 자체가 그 이름을 사용하거나, 또는 하나님이나 여호와의 사자나 다른 사람들이 족장들에게 말하는데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데, 출6:3절에서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는 『여호와』로 알리지 아니하셨다고 하신 의도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알리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님은 분명해졌습니다.
둘째로, 그렇다면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히브리어 구문법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세히 말씀을 드려도 여러분이 다 알아듣기 어렵기 때문에 그 내용의 골자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출6:3절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와 ‘여호와로’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여기의 “...으로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베-트』라는 전치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 『베-트』라는 전치사는 히브리어 문법적 용어로서 ‘본성적 베-트’(Beth Essentiae)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치사는 외부적인 환경이나 칭호가 아닌, 특성이나 내부적 상태에 관심을 집중하는 데 사용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능의 하나님‘으로서’(as) 나타내셨을 때 그것은 족장들에게 하나님을 부를 칭호를 제공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칭호가 적절히 의미하는 바 하나님의 특성을 간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같은 히브리 문법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의 특성으로 나 자신을 타나냈으나, 여호와의 이름이 나타내는 특성으로는 그들에게 나 자신을 알리지 아니하였고”(새번역)
결국 이 말씀은 족장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알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었음을 부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족장들이 그 이름이 의미하는 특성을 아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지금 모세에게 그 이름의 소리가 처음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이름의 본질적인 의미가 알려지는 것입니다. 족장들도 하나님을 ‘여호와’로 불렀으나, 그를 안것은 ‘전능의 하나님’으로서 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세 이후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그의 이름 ‘여호와’로 부를 뿐 아니라, ‘여호와’로서 알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함의하는 그 풍성한 내용을 알려주신 일이 없었으나, 이제 그 의미와 취지를 모세에게 알려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3장 이전에는 그 어디서도 이 이름 자체에 대한 설명을 주께서 친히 이 이름이 어떻게 해석되어야만 하는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함의하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정말로 이전에도 존재했고, 주께서 친히 이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창15:7, 28:13) 또 이미 이전 시대에 주께서 이 이름으로 불러워지셨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에 대한 설명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고, 그러한 분으로 밝히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창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창28: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그렇다면 모세 때에 비로소 그 의미가 풍성하게 계시된 ‘여호와’라는 이름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출3:13-15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함의하고 있는바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함의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를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여호와’는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당신의 어떠하심을 증명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출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한글 성경에는 그 뜻을 “스스로 있는자”라고 번역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여호와’라는 이름이 함의하고 있는 내용에 대한 설명이 되겠습니다. 원문에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역하면 “나는 장차 나일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I will be wath I will be.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나는 나이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이러한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존재라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정적(靜的)으로 고요히, 그리고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유(占有)하고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렇게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면 그러한 신 개념이라는 것은 부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이러이러하니까 계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데서부터 시작하되, 하나님은 역사의 과정 가운데에서, 생활의 증험 가운데에서, 또 현실 생활 속에서 자기가 맛보아 앎으로써 비로서 그 존재를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히브리 말로 표시할 때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 즉 “나는 장차 나일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역사의 과정 속에서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의 과정 가운데서 당신을 증명하는 하나님이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서 당신의 품성과 능력을 발휘하셔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게시하여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경영하여 가시는 그 역사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면서 여호와로 알게 될 것입니다.
(출6: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출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출6:6-7)
(출7:5)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당신의 능력과 성품을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심으로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명해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생활의 증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배워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역사를 운전하여 가신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데는 관심이 없이 그저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현실적인 필요들을 누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빈곤하여 하나님을 버리고 배도하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증험해 가지않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바르게 알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이 경영해 가시는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시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경여해 가시는 역사의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생활의 증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손길을 맛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는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나님을 더욱 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관념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개념만 가지고 있는데서 멈추지 말고, 이미 역사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손길을 맛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에 대한 산 지식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서 몇 가지의 개념만 그것도 관념적으로만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 대한 산 지식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역사 가운데서 당신을 계시하셔서 객관적으로 기록해 주신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어야 하고, 또 그것을 관념적인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과연 그러한 하나님임을 생활로 증험해 가야 합니다.
둘째로, ‘여호와’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동일하시며, 언약을 반드시 지키는 신실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겠는가에 대해서 또 다른 내용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서신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 표현을 세 가지의 시제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나였다” “나는 나이다” “나는 나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여호와』란 이름속에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미래에나 변함이 없이 동일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지금 모세를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려 하시는 그가 조상들에게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신 분은 전혀 낯선 분이 아니라, 그 조상들이 섬겼던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5절에서 모세에게 그점을 분명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출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이십니다. 그는 자신이 족장들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그런 분이실 것입니다. 지금의 그가 어떠하신 것처럼 미래에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불변하시는 분이시요, 신실하신분이십니다. 결코 자신의 백성들을 떠나시거나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불변하심’과 ‘신실하심’이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서 그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사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사43: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사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사43:12)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43:13) 과연 태초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사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사48:12)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이제부터 ‘여호와’라는 이름은 ‘불변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음이 보증된 것입니다. 모세 시대 이전에는 아직 이런 충분한 의미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신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어떤 이의 신실성은 단번에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후에야 특히 시련의 때에야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경우도 바로 그러했습니다. 족장들의 시대 이후로 수 세기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압제당하고, 괴로움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 신실성을 끝까지 지키는 자,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지금 너희의 하나님, 그리고 영원히 너희의 하나님이라”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시행할 때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신실하시고 변함없는 분이신가를 모세 때에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여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자리에서 건져내심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신실히 지키시는 것을 보여주실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즉 ‘언약하신 것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요, ‘변함없으신 분’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오랜 이름에 전적으로 새로운 의미, 이제까지는 이해되지 못했던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호12:9, 13:4절에서,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여호와』에 대한 이해는 모세 때에 와서 분명하게 생겨진 것입니다.
모세 때에『여호와』라는 특성으로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은, 특히 ‘자기 백성에 대한 관계’에서 불변하신 분임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변함이 없으시며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여호와라 변역지 아니하나니”(말3:6)
▣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고 믿는 우리의 신앙의 바른 자태(姿態)
이제 하나님은『여호와』라는 사실 즉 역사 가운데서 자신을 증명해 가시는 분이요, 불변하시고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초석이되며, 우리의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하나님은 여호와시라!』는 사실이 우리의 신앙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관념적으로만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생활의 증험을 통해서 알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객관적인 성경 계시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생활 가운데서 과연 그러한 분으로 증험하여 가지 못한다면, 단순히 관념적인 지식에 머물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관념적인 지식으로는 구원의 신앙이 발생하지 않고, 역사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구원의 신앙이 구비하고 있는 지적인 요소는 하나님께 대한 관념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활 가운데서 증험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객관적인 성경말씀을 통해서 이미 과거의 역사 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지만, 그 지식이 과거의 역사에 그렇게 하신 분 정도로 관념적으로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오늘 나의 생활 가운데서 과연 그러한 분이시구나 하고 증험하여 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생활 가운데서 실제로 의뢰하고 살아가야 합당한 신앙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신실성’이 신앙의 초석이 되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고 소망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님을『여호와』로 알고 믿는 사람은 어떠한 신앙의 자태를 드러내 보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에서 ‘변함없고 신실하신 분’으로 알고 믿기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견고해집니다. 과거에 족장들에게 약속하시고 400여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모세를 통해서 이루신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장차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내용들이 어떠한 것이든지 그것이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서 약속하신 내용들이 도무지 믿기지 아니한 것이라 할지라도,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신 여호와이시기에 반드시 이루실 줄로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을 믿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은 약속하신 분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지식과 믿음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시면서도 신실하신 분으로 알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내용들이 그렇게 될 줄로 믿고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들을 믿는데는 하나님에 대한 이 두 가지의 지식과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신실하지 못하시거나, 반대로 신실하기는 하시지만 전능하지 못하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성을 가지고 되는데로 휘두르시는 분이 아니요, 신실하시기는 하지만 무능한 분이 아닙니다. 전능성을 가지셨으되 계획하시고 약속하심에 따라서 신실하게 시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내용이 아무리 인간 세계에서 불가능해 보여도, 또 먼 미래의 일이라고 해도 믿고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의 초석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실성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실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셨다고 하거나 장차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모든 내용들을 하나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와 여호와(신실하신 분)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실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여호와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신실하신 분으로 알고 믿으며,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늘 가까이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점점 하나님의 신실성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점점 더 신실함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쉽게 마음이 변하지 아니하고, 한번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신실하게 지켜나가는 모습을 더욱 뚜렷이 보이게 됩니다.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살아가면 변덕이 죽끌듯 하거나 거짓을 일삼지 않고, 신실함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자라가게 됩니다.
담임교역자 라황용
전북 김제 송상교회 /☏(0658) 542-5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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