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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로 알아감(15) (삼상 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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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성호를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배워가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점점 더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까 자신의 신관이 점점 더 뚜렷해져 가는 것을 느끼십니까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면서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도 분명하지 않았는데, 이제 내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분명해져 가고 있습니까 자신의 신지식(神知識), 혹은 신관(神觀)이 풍성해져 가는 것을 느끼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더욱 풍성해져 가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왜 이렇게 장황하게 애기하시는지, 이제 그정도 해 두시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들어도 그때 뿐이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조금도 축적되지 아니하고 자라지 않는다면 참으로 신앙의 위기(危機)입니다. 신앙의 장성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더욱 더 자라가는데서 오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자꾸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는데 진보(進步)가 없으면 신앙의 침체에 빠지게 되고, 신앙의 위기가 닦칩니다. 하나님의 크시고 위대하심을 점점 더 알아가면서 그분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의뢰하는 심령이 더해 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했던 하나님의 성호(聖呼)에 대해서 음미하시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깨달아 가시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의뢰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첫째,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로 부르게 된 역사적 배경
지금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구속역사에서 점진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성호를 차례 차례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구속역사가 진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정도 만큼씩 계시하였습니다. 가장 적절한 역사의 시기에 자신의 어떠하심을 하나 열어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그 면을 가장 쉽게 깨달을 수 있는 구체적인 역사의 정황이 펼쳐질 때에 알려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속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즉 어떤 역사적인 정황하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성호가 계시되고 있는지를 살펴야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그 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역사적인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성호가 게시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무엘상에서 처음으로 불려지게 된 ‘만군의 여호와’라는 성호와 관련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성호가 불려지게 된 역사적인 배경부터 생각하겠습니다.

1. 한나의 입에서 최초로 불려진 이름입니다(삼상1:1-11)
이 ‘만군의 여호와’라는 성호는 사사시대의 말기에 아이를 낳지 못하고 종에게 무시를 당하던 한나의 입에서 처음으로 불려진 이름입니다. 한나는 사사시대의 말기에 엘가나의 사랑받는 아내였으나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남편 엘가나에게는 브닌나라는 첩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남편 엘가나가 성막이 있는 실로에서 절기를 따라 열리는 축제에 참여할 때에 가족도 함께 데리고 올라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내 한나에게는 많은 것을 주고 첩 브닌나에게는 더 작게 주는 것에 불만을 품은 브닌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하나를 괴롭혔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브닌나에게 많은 멸시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그러던 중 또 한 절기가 되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실로에 갔을 때 한나는 자기의 그 고통을 하나님께 아뢰이면서 서원 기도를 하였습니다.
(삼상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1:11)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렇게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첩 브닌나에게 무시를 당하고 짓밟힘을 당하면서 자기의 힘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지경에서 한나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도움을 구했습니다. 마치 힘없는 한 나라가 힘있는 대적에게 짓밟히는 것과 같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아내 한나가 아이를 낳았던 첩 브닌나에게 짓밟히면서, 자기의 힘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지경에서 ‘만군의 여호와’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나가 브닌나에게 괴로움을 당하던 형편에서 우리는 그 당시 사사시대 말기의 이스라엘 나라가 이방 나라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형편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내된 한나는 여호와께서 성태치 못하게 하심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고 첩에게 무시와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역시 여호와께서 이방 나라들을 들어서 치게 하심으로 괴로움을 당하던 형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방 나라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적에게 괴로움을 당하면서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형편에서 오직 유일하게 의지할 분은 여호와이시라는 의미에서 ‘만군의 여호와’라는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역사적인 의미는‘만 명의 군인을 거느린 여호와’라는 말로서 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이 힘있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한나가 자기의 힘으로는 아이를 낳을 수 없기에 대적 브닌나에게 괴로움을 당하면서 지낼 수 밖에 없는 형편에서(삼상1:6), 오직 ‘만군의 여호와’께서만 아이를 주셔서 대적 브닌나의 멸시에서 건져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한나의 간구는 단순히 자기 개인의 대적에게서 건져 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전체가 이방 나라에게 짓밟히고 있는 가운데서 건져주시길 구하는 이중의 간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한나가 아이를 얻은 다음 드린 기도에서 역력히 나타나고 있습니다(삼상2장).
한나 당시 이스라엘 백성도 오직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해서만 대적 이방 나라의 압제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참으로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참으로 의지하는 실질은 없이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만 가지고 나가면 윈수의 손에서 건져 줄 것으로 착각하였다가 대패하였던 사건이 있습니다(삼상4장).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잠시 후에 생각하겠습니다. 이렇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참으로 의지하는 신앙이 없이 원수의 나라 불레셋에게 살륙을 당하였지만, 한나에게는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앙이 있어서 도우심을 받아 대적 브닌나에게서 건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2. 다윗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싸웠습니다(삼상17:41-48).
한나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지 못하여 원수 불리셋에게 짓눌려 있었습니다. 사울왕을 비롯해서 온 이스라엘이 불리셋의 장수 골리앗의 위세 앞에서 벌벌 떨고 있을 때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였던 다윗을 통해서 건짐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다윗도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멸시하면서 여호와 이름을 욕하였던 대적 골리앗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부모님의 심부름으로 형님들이 참여하고 있던 전쟁터에 면회를 갔다가 대적 불리셋의 장수 골리앗이 여호와의 이름을 욕하고 여호와의 군대를 멸시하며 싸움을 걸어 오던 장면을 목격하고 분개했습니다. 어찌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이 할례받은 거룩한 백성을 욕하며 멸시할 수 있느냐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다윗이 나가서 싸우겠다고 하였을 때에 세 형님이 나무랬고, 사울 왕도 “어린 소년”의 주재에 어찌 나가서 싸우겠다고 하느냐고 나무랬지만, 다윗은 양치던 시절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심으로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 눕힐 수 있었던 것과 같이 골리앗도 때려 눕힐 수 있다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마음이나 그 기백이 너무도 당당해서 그럼 나가서 싸워보라고 내어 보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가자 골리앗은 젊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 다윗을 보고 업신 여기며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면서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다윗의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때 다윗이 골리앗에게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17: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삼상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이렇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에게 나가서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칼로 그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그것을 지켜 보던 불리셋 군대는 사기를 잃고 도망을 하였고, 이스라엘 군대는 사기가 중천하여 그들을 뒤쫒아 가서 쳤습니다. 이렇게 다윗은 불리셋의 장수 골리앗의 힘에 눌려서 자기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이 40일 동안이나 벌벌 떨며 멸시를 당하고 있을 때에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적 골리앗을 쓰려뜨렸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군대의 힘으로는 감히 대적 골리앗과 불리셋 군대와 싸위 이길 수 없어서 눌려있는 지경에서 그들을 건져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 뿐이심을 믿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믿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불리셋의 압박에서 건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3. 선지자들도 주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였습니다.1) 포로전의 선지자들은 주로 여호와께 돌이키고 의지하는 자를 압제에서 건져주시는 분으로 선포했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불리셋의 압제에서 건짐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 이후 다윗의 치세가 지나면서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함으로 나라가 둘로 나뉘이고, 점점 이방 나라들의 압제하에 들어가 마침내 이방 나라에게 망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남북 왕조가 이방 나라에게 망하기 직전에 침략과 고통 중에 있는 그들에게 선지자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여 건짐을 받으라고 촉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면 ‘만군의 여호와’가 그들을 치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조를 향해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1-66장)에서 무려 61번이나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분을 의지하여 원수의 압제에서 건짐을 받으라고 촉구하였습니다. 죄에서 돌이키고 만군의 여호와께 피하면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겠지만(사31:5), 끝까지 여호와께 돌이키지 아니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오히려 그들을 치시겠다는 말씀을 선포했습니다(사9:13,19).
그리고 남 유다 왕조를 향해서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레미야(1-52장)에서 무려 83번이나 ‘만군의 여호와’의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분을 의지하여 원수의 압제에서 건짐을 받으라고 촉구하였습니다. 만일 여호와께 돌이키지 아니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렘11:17-22).
그러나 에스겔이나 다니엘은 이 이름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예레미야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계속 반복되어 언급되는데 에스겔서나 다니엘서에서는 사용되고 있지 않는 경우가 무엇일까요 이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의 경험에서 어느 특정 단계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은 인간이 극한에 처할 때 주어진 하나님의 이름 아닙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우리는 실패할 때에, 시험을 만나 나약해져 있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의 ‘여호와 체바오트’께로 달려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는 전쟁터에서 자기들이 가진 무기가 부적절한 무기라고 느끼는 자들을 위한 이름으로 전쟁이 끝난 자들을 위한 이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서나 다니엘에서는 ‘여호와 체바오트’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에스겔과 다니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서 70년 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름은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 전혀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 의지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
2) 포로에서 귀한 후의 선지자들은 주로 악에서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하는 자를 징계하시는 분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의 포로생활의 고통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에도 다시 여호와를 떠나서 악을 행하며 다시 이방 나라에게 짓밟힐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의 선지자들은 주로 그들이 돌이키지 아니하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다시 그들을 징계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예루살렘 귀한 후에 학개서(1-2장)에서 13번, 스가랴서(1-14장)에서 52번, 말라기(1-4장)에서 24번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로 돌이키지 아니하면 다시 징계하신다고 경고하면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가 구원자일 뿐만 아니라 심판자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 체바오트’라고 거듭거듭 언급하시면서 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아니하면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말1: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말1:14)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말라기(1-4장)에서 이 이름이 24번 쓰였는데 22번이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형태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라는 구절로 나타납니다. 말라기는 마음으로가 아닌,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는 백성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70년 동안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여호와를 전심으로 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자신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거듭거듭 언급하시면서 전심으로 돌아서지 아니하면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되신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을 건져주시는 분이 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경외하지 않고 끝까지 돌아오지 아니하는 자들을 징계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둘째, ‘만군의 여호와’를 믿는 자의 신앙
이렇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없어서 대적에게서 짓눌려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 유일하게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온전히 경외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배도의 길을 걷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믿는 사람은, 자기의 나약한 힘만 의지하면서 원수 사탄의 힘에 눌려서 고통을 당하며 지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믿는 사람은, 원수 사탄과의 싸움에서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만군의 여호와’께 도움을 구합니다. 그리고 혹시 여호와를 떠나서 진노를 살만한 지경에 처할 때에는 ‘만군의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섭니다.
◎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이 만사형통케 하는 주문이나 되는 것처럼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삼상4:1-11)
이미 살펴본대로 ‘만군의 여호와’라는 성호는 주로 자기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지경에서 오직 의지할 분은 ‘여호와’ 뿐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해 주는 이름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마음은 ‘만군의 여호와’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서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만 부르면, 그 이름이 마법을 일으키는 주문이 되어서 어떤 곤경에서도 건짐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착각했다가 곤욕을 치뤘던 좋은 선례(先例)를 한나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여 낳은 아들 사무엘이 실로에서 자라서 선지자로 등장할 무렵 이스라엘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장 세우고 불리셋과의 전쟁에 나가서 패하여 삼만명의 보병이 죽고, 언약궤를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가져온 제물을 갈취하고,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죄악까지 저지를 정도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어둡고, 말씀이 희귀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악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리셋을 통해서 그러한 이스라엘을 치게 하셔서 사천명 가량의 군사가 죽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불리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을까”(삼상4:3) 의논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를 떠나서 악을 행함으로 여호와께서 징계로서 불리셋 군대를 보내어 치셨다고는 생각지 아니하고,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만 앞세우고 나가면 그 ’여호와의 언약궤‘가 자기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호와로부터 떠나서 온갖 죄악을 저지르고 있으면서 ’여호와의 언약궤‘만 앞장세워 나가면 원수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 주실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삼상4:3)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삼상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가져다 이스라엘의 진으로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 왔으니 틀림없이 그 언약궤가 자기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쁨의 함성을 질렀던 모양입니다. 그 외침에 땅이 진동하자 불리셋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며 이스라엘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기어이 이겨야 한다며 서로 용기를 복돋아 싸워서 이스라엘을 쳤습니다. 그때 살륙을 당한 이스라엘 보병이 삼만이나 되었고, 여호와의 궤도 빼앗겼으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4:10-11).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은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도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만 가지고 나가면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패하고 만 것입니다. 아무리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장세우고 나간다 할지라도,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는 실질이 없이 구호로만 부른다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런 사건에서 실감나게 배우게 됩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마법을 일으키는 주문과 같이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만군의 여호와’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실질이 있는자에게만 원수의 손에서, 곤경에서 건지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맺 는 날
오늘은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되신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할 때마다 그 지경에서 건져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여호와 체바오트’(만군의 여호와)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의지하십시요! 혹시 여호와의 진노를 살만한 지경에 있을 때에도 “만군의 여호와”를 기억하시고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시고, 그 날개 아래로 피하십시요! 그러나 그분을 의지하는 실질은 없으면서, 마치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만사 형통케 하는 주문이나 되는 것처럼 사용하지 마십시요! 한나와 다윗과 같이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자기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곤경에서 건짐을 받는 은헤가 있어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시46: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담임교역자 라황용
전북 김제 송상교회 /☏(0658) 542-5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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