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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로 알아감(17) (렘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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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우리는 우리의 ‘목자되신 여호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를 양과 같이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시요,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매일 때에 찾으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되 음성을 듣고서 따라가게 하시고, 양의 무리 가운데서 인도하시고, 사람 목자들을 세워서 인도하시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당신의 집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시며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중생자라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가지만, 비중생자의 경우는 자기의 목자가 아닌고로 따르지 아니하고 오히려 도망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몇 가지의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고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목자의 음성을 들으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따라 다니며 풍성한 꼴을 뜯어 먹고 자라서 생명을 발휘하는 것이요, 의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목자께서 인도하시는 방식을 잘 깨달아서 평생토록 목자의 인도를 받아서 살아가다가 마침내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호와 치드케누’(우리의 의가 되신 여호와)에 대해서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우리의 의가 되신 여호와’라는 이름이 계시된 역사적 배경
‘여호와 치드케누’(우리의 의 되신 여호와)라는 이름은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해서 최초로 계시된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당시의 남 유다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내용 가운데서 계시된 이름입니다. 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백성에게 ‘우리의 의가 되신 여호와’를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시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먼저 생각하겠습니다. 그 역사적 배경은 예레미야 21장과 22장, 그리고 열왕기하 23-25장과 역대하 36장이 되겠습니다.
남 유다 왕국은 20대의 왕까지 다스리다가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가 두 눈이 뽑힌채로 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그의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함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우리의 의’로불리울 이름을 가진 ‘의로운 가지’를 보내어 왕이 되게 하셔서 남북 왕조를 구원하고 공평과 정의를 행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신 내용은, 유다 왕조 말기의 네 왕에게 내려질 심판에 이어서 주어진 구원의 약속입니다.
예레미야는 개혁자요 성군인 요시야 왕 13년, 20세의 젊은 나이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 유다의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함락되어 포로로 끌려갈 때에 포로로 끌려가서까지 1년 정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가장 암울했던 시기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요시야 왕때 18년, 여호아하스 왕때 3개월, 여호야김 왕때 11년, 여호야긴 왕때 3개월 10일,그리고 시드기야 왕때 11년, 도합 40년 6개월 동안 선지자로 활동했습니다. 요시야 왕때의 개혁운동에 참여한 이후로 시드기야 때에 나라가 멸망하기까지 왕조 말기에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야 했던 선지자입니다.
에레미야 선지자가 심판을 외칠 때에 유다 왕들이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렸기에 여호와께서 이방나라 바벨론 제국을 통하여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지를 21-22장에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예레미야서에 있는 내용은 연대순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21장에는 시드기야 왕 때의 외친 내용으로 유다 왕조 마지막 왕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22장 10절 이하는 연대순으로 되어있습니다. 10-12절은 여호아하스 왕 때의 3개월의 일이고, 13-23절은 여호야김 왕 때의 11년의 일이고, 24-30절은 여호야긴 왕때의 3개월 10일의 일입니다. 이 네 왕 때의 치적은 한결같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유다 말기의 네 왕들이 행하엿던 치적은 한마디로 불의와 불공평으로 연약한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하였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 열왕들이 받은 심판(왕하 23-25장, 대하 36장)
열왕기하 23-25장, 그리고 역대하 26장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쳤던 당시의 왕들이 당하였던 심판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성군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한 후 그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23세에 왕이 되었습니다(왕하 23:30). 그러나 여호아하스는 예루살렘에서 치리한지 3개월만에 애굽 왕에 의해서 폐위되고 애굽으로 잡혀갔고, 그의 둘째 형 여호야김이 25세에 왕이 되었습니다(대하 36:4) 여호야김은 11년을 다스렸는데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제1차 침입때 포로로 잡혀 쇠사슬로 결박되어 끌려가게 되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여호야긴도 불과 3개월 10일만에 다시 바벨론의 제2차 침입때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왕이 모친과 아내들과 내시와 권세 있는 자들과 용사 1만명과 공장과 대장장이를 다 사로 잡아가고,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야긴의 아자비(아저씨, 작은 아버지, 요시야의 셋째 아들)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워 11년 동안 다스리게 하였으나 그도 역시 바벨론을 배반하자 느부갓네살 왕이 제3차 침입으로 그의 두 아들을 보는 앞에서 죽이고, 두 눈을 뽑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함락되고, 왕궁과 귀인의 집들을 다 불살랐으며, 빈천한 국민들만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유다 왕국은 바벨론의 세 차례의 침입으로 인하여 완전히 망하고, 빈천한 자들만 남고 세도를 부리던 자들은 다 잡혀가게 되었습니다(왕하 24:14-15, 25:12). 그리고 바사제국이 주재할 때까지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되어, 유대 땅은 마치 안식년을 누림과 같이 모처럼 쉼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심판과 남은자의 역사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성취된 것입니다(왕하 24:13, 대하 36:21)
(왕하24:14)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24:15)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유다의 심판에 대한 예레미야의 예고(렘21-22장)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이방나라 바벨론을 통해서 심판하셨을까요 유다가 이렇게 심판을 수 밖에 없었던 주 원인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고를 통해서 들어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21-22장에서 그들이 심판을 받게 되었던 원인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요시야와 여호아하스(22:10-12)
22장 10-12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는 죽은 자는 성군 요시야 왕을 가리키고, 잡혀간 자는 그의 뒤를 이은 네째 아들 여호아하스 왕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성군 요시야 왕이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한 것을 인하여 울지 말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포로로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와서 고국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을 인하여 울라는 것입니다. 여기 예레미야서에는 왜 성군 요시야 왕이 전사하게 되었고, 또 여호아하스가 포로로 잡혀가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열왕기하 23:26과 32절에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성군 요시야 왕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전쟁에 나가 애굽 왕 바로느고의 손에 죽게 되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요시야 왕은 8세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서 자기의 아버지 아몬과 할아버지 므낫세가 뿌린 우상숭배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마음을 다해서 종교개혁을 했던 성군입니다. 퇴락한 성전을 수리하게 하였다가 대제사장 힐기야에 의해서 발견된 율법책을 읽고서 열조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큼을 깨닫고 옷을 찢고 회개하고서 백성들을 성전 앞에 모아 율법책의 모든 우상을 버리게 했습니다. 할아버지 므낫세에 의해서 세워졌던 모든 우상과 산당을 헐고, 우상제단의 제사장들을 다 죽이고,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던 왕입니다. 그는 역사상 유래 없이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왕입니다. 그런데도 애굽 왕 바로느고의 침입을 막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하여 39세란 젊은 나이로 인생을 마치게 되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요
(왕하23: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요시야 왕 치하의 유다 백성들은 비록 요시야의 명에 복종하여 우상을 훼파하고 산당을 제거하기는 했지만, 요시야와 같이 그들의 마음은 우상숭배로부터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서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그점을 우리는 요시야의 사후에 백성들이 왕으로 삼은 여호아하스가 열조들의 악을 행하였다는 지적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왕하23:32)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백성들이 진정으로 요시야 왕의 개혁에 동참하여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켰다면, 그렇게 쉽게 즉시 열조의 악을 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시야 왕의 권세에 복종하여 겉으로는 우상을 버리고 산당을 헐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전혀 우상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한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셧습니다.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므낫세가 대대적으로 퍼뜨렸던 우상숭배로부터 온전히 돌아서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군 요시야 왕이 39세의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이방인의 손에 의해 죽은 것은 요시야 왕 개인에 대한 진노라기 보다는 유다 백성들에 대한 진노였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은 전사하였지만 열조에게 돌아가 평안히 묘실에 들어갔고, 유다에 내리신 재앙을 보지 않았습니다.
(왕하22:20)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었고,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였고, 그 기사는 오늘날까지 예레미야 애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하35:24) 그 신복이 저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저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저가 죽으니 그 열조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대하35:25) 예레미야는 저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노래하는 남자와 여자는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그러니까 당시 요시야 왕을 잃은 것에 대한 국민적인 슬픔이 대단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군 요시야 왕을 잃었다는 것은 유다에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였고, 백성들의 슬픔은 참으로 컸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유다 백성들에게 예고하기를 성군 요시야 왕을 잃은 것으로 인하여 슬퍼하지 말고, 여호아하스 왕이 포로로 끌려가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일을 인하여 슬퍼하라고 외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고대로 그는 불과 3개월 만에 애굽의 포로로 끌려가게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마음에 내재해 있던 열조의 모든 악을 끄집어 내서 다시 그리로 치닸게 했던 자에게 임할 마땅한 심판이었으며, 유다의 왕이 이방 나라에게 포로로 끌려감으로 인하여 유다는 다시 애굽의 속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다가 노예가 될 것을 인하여 슬퍼하라는 예고였으며, 불과 3개월 만에 그 예고대로 된 것입니다.
2) 여호야김(22:13-23)
애굽의 왕 바로느고는 여호아하스의 왕위를 페하고 볼모로 잡아갔고, 그의 형인 ‘엘리아김’을 대신 왕으로 임명하고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갈아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벌금까지 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유다는 애굽의 내정 간섭을 받으며 다시 노예가 되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해방되었던 유다는 다시 하나님의 진노로 애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여호야김은 비교적 긴 11년 동안 다스렸는데, 그도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의 죄악상과 받을 심판에 대해서 예레미야가 22:13-23절에서 비교적 소상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1) 왕이 불의와 불공평으로 집을 세우고 다락방을 지었습니다.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짖고, 창을 만들고,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을 칠했습니다. 백향목으로 아름다운 집짓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민생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왕이 자기만 고대광실에서 살기위해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렘22:13-15).
(2) 왕의 눈과 마음에는 탐남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강포만이 있습니다.
고대광실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착취하였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의 신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호화찬란한 왕궁을 짓기 위해서 백성들에게서 많은 세금을 착취하고, 고역을 시키고도 그 삯을 주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궁핍에 굶주리며 원성이 컸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렘22:16-17).
결국 예레미야는 그와 같이 백성들을 강포와 억압으로 다스렸던 여호야김이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 가겠지만, 백성들이 그를 인하여 전혀 슬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레바론의 백향목으로 지은 고대광실에서 거하며 백성들을 수탈했던 그가 사로잡혀가며 수치와 욕을 당하며 해산의 고통을 당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여호야김 왕에 의해서 너무나 많이 수탈 당하고 어려움을 겪었기에 왕이 이방나라에 잡혀가도 슬퍼하지 않을 정도가 되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여호야김은 바벨론 제1차 침략때 느부갓네살 왕에게 사로잡혀 쇠사슬에 묶여 끌려갔습니다. 백성들을 강포로 억압했던 그가 바벨론 왕의 강포로 억압당해 마땅했던 것입니다.
3) 여호야긴(22:24-30)
24-30절에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이 당할 심판에 대한 예고가 있습니다. ‘고니야’는 여호야긴을 가리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오른 손의 인장반지, 즉 하나님의 가장 귀한 보화와 같은 왕이지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데아인의 손에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를 낳은 이미까지도 포로로 끌려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또 무자하여 왕의 대를 잊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불과 3개월 10일을 다스리고 바벨론의 제2차 침입때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탈취당했고, 솔로몬이 만든 성전의 모든 금기명이 훼파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방백과 용사 합 일만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들이 사로잡혀 갔습니다. 왕을 비롯하여 왕의 모친과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래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왕하 24:13-16).
4) 시드기야(21:1-10)
여호야긴의 작은 아버지인 시드기야가 21세의 나이에 뒤를 이어 11년을 다스리고, 그도 역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눈이 뽑히고 왕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고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내서 간청한 내용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자기들을 위해서 여호와께 간구하여 혹시 여호와께서 그 모든 기사로 자기들을 도우시면 적들이 떠나리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유다 군인들이 가진 병기가 힘을 쓰지 못하겠고, 오히려 바벨론 왕을 성중에 모아 들여서 그들을 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노와 분과 대노로 유다 성에 거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치시되 큰 염병으로 죽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과 백성과 성읍에서 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붙이실터이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무자비하게 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자만 겨우 살아남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자비하게 살륙을 당하게 하시겠다고 하신 의도
(렘21:7)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그 후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의 손과 그 대적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대노 하셔서 당신의 나라 유다 왕국을 이방인 바벨론에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륙을 당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특별히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살륙하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일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외치게 하신 말씀 가운데 그 이유가 잘 표시되어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이유는 우선 유다 왕조의 다스림이 문제가 잇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유다 왕의 집이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렸길래 여호와께서 대노 하셨을까요
(렘21:11)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렘21: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특별히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여호왕의 경고의 말씀을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성문 앞에서 유다 왕조와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왕으로부터 신하들과 온 백성에 이르기까지 불의와 불공평을 행하는 짓을 버리라고 촉구했습니다. 불의와 불공평에서 회개해야지만 유다가 이방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렘22: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22: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마는(렘22:5)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다윗의 뒤를 이은 남 유다의 왕들이 시드기야 왕 때까지 거의 한결같이 공평과 정의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판결한 것이 아니라, 불의와 불공평으로 판결하여 연약한 백성들을 매일같이 탈취하고 억압했던 것입니다. 솔로몬 왕은 화려한 궁전을 짓기 위해서 13년 동안이나, 그리고 성전을 짓는다고 7년 동안, 도합 20년 동안이나 집짓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중노동을 시켰고, 무거운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백성들로부터 선정(善政)을 요구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오히려 더욱 철권정치를 하겠다고 해서 북쪽 열 지파를 잃고 겨우 남쪽 두 지파만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대부분의 왕들이 연약한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 불공평과 불의로 판결을 하고 착취하였습니다.
특히 유다 왕조 말기의 왕들에게서 힘없는 백성들을 불공평과 불의로 억압하고 칙취하는 모습은 더욱 심해갔습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야김 왕의 경우에는 호와찬란한 왕국을 짓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고역을 시키고 바로느고에게 받칠 벌금을 위해서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은금을 늑봉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시드기야 왕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정의와 공평이 흐르는 나라로 다스려야 할 책무가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불의와 불공평으로 백성들을 억울하게 착취하고 억압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나라에는 왕으로부터 말단의 관료에 이르기까지 불공평과 불의로 가득하여 백성들이 억울하게 판결을 받고 착취를 당하며 억압을 받았던 것입니다. 특히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학대하였고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무죄한 자들의 피를 흘렸던 것입니다. 연약한 백성들응 긍휼히 여기기는 커녕 오히려 무자비하게 착취하였습니다. 유다의 백성들에게는 왕으로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고아나 과부나 가난한자,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거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고, 오히려 무자비하게 착취하였습니다. 그리고 불의와 불공평으로 그들에게 억울함을 당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유다가 바벨론에게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망하게 된 것은,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고 불의와 불공평으로 역약한 백성들을 착취하였던 유다에게 임할 마땅한 심판이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혀서 잡혀가게 되었고, 왕의 어머니와 아내들과 권세있는 자들과 재능을 가진 자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 가거나 죽임을 당하여 그동안 불의와 불공평으로 연약한 백성을 착취하였던 이들은 모두 무자비하게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정신이 없는 유대 나라에 대한 긍휼 없는 심판
이스라엘 나라는 본래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발휘하면서 이방나라들과 전혀 다른 의로운 사회의 모습을 보여야 할 사명을 부여받아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들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그 율법에 반영된 정의와 공평을 따라서 백성들을 판결하고 다스려야 했습니다.
(신17:18) 그가까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신17: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겨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고 그렇게 의로운 왕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그 밑에 있는 관리들도 뇌물을 받고서 불의하고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힘없는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도록 하는 일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왕으로부터 말단의 관리들까지 자기의 호화찬란한 향락을 위해서 백성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생활을 돌보며,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의 신원을 들어주고,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정신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이후 유다의 역대 왕들은 대부분 율법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여 나중에는 율법서를 다 잃어버릴 정도였습니다.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 때의 왕들도 요시야 왕 때에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불의와 불공평으로 백성들을 착취하고 강포로 압제했습니다. 자기의 호화찬란한 향락생활을 위해서 백성들에게서 많은 것을 착취했습니다. 그리고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정신이 없이 연약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억압하였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과 자비와 긍휼이 그 사회에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방 나라와 같이 힘있는 권세자들이 힘없는 백성들을 압제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제사장 나라나 거룩한 나라로서의 존재의 의의와 성격을 상실하였습니다. 따라서 더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나라 바벨론을 통해서 그들의 존재의 자취를 없에신 것입니다. 그들을 심판하시되 무자비하게 하셨습니다. 긍휼히여기는 마음이 없는 그들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빈천한 자들만 남고 다 끌려가게 하신 하나님의 의중(왕하 24:14-15, 25:12)
그리고 권세자들만 다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고, 빈천한 자들만 그 땅에 남겨두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공평의 실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여호야긴 때 ; 왕하 24:14, 시드기야 때 ; 왕하 25:12).
(왕하24:14)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25:12)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대하36:21)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당시 그런 방식으로라도 공의와 공평을 실현하신 것입니다. 빈천한 자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불공평과 불의로 착취를 당하였지만, 착취하던 자들을 다 끌려가게 하시고, 빈천한 자들만 남아서 그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년이 되면 가난한자와 나그네를 위해서 밭을 갈지 말고 쉬게 하였으나, 그런 법이 전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빈천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유대 땅이 안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고 하신 의중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왕이나 권세자들의 불의와 불공평으로 인하여 억울함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고 있고, 바벨론에게 세 차례나 침략을 받아 무자비하게 살륙을 당할 위기에 처한 백성들에게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왕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불의와 불공평으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다가 이방 나라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왕들을 보면서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고,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고 구원을 얻고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당시 정의와 공평이 사라진 왕들의 강포로 억압받던 백성들에게 위로와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공평과 정의로 다시리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의 유대 왕들과는 전혀 달리 백성들을 다스리는 왕입니다. 당시 유다의 왕들은 한결같이 불공평과 불의로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하여, 그 밑에 있는 모든 관리들이나 힘있는 자들로 하여금 연약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나라 전체에 불의와 불공평으로 가득하여 백성들이 억압받고 착취받는 나라가 되게 했습니다.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아주 무자비한 사회가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바벨론과 같은 불공평과 불의로 가득한 나라에게 무자비하게 살륙당하게 하여 백성들을 포로로 끌려가 다 흩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양과 같은 백성들을 잘 돌보지 아니한 삯군 목자와 같았습니다.
그렇게 불공평과 불의와 부자비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였던 유다의 왕들과는 달리, 공평과 정의와 긍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구원할 왕이 오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큰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약속입니다.
둘째, 약속의 성취와 우리의 신앙
예수님의 강림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예수님은 온통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 ‘의를 덧입혀 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구주와 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의를 실현하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의로우신 왕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불의에서 벗어나 의를 실현하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계시는 동안에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공평과 정의를 따라 살 것을 여러 모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중의 한가지를 마지막 심판 때에 모든 민족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양과 염소로 나뉠 것이라는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왜 한 무리는 오른 편에 다른 무리는 왼 편에 두게 되었다고 하십니까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때 오른 편에 서게 된 의인들이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 그렇게 대접했느냐고 죄송스럽다는 듯이 묻습니다. 그때 그 심판주인 임금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마25:40)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그리고 왼편에 서게 된 자들에게는 그와 반대로 말하자, 그들도 또 묻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도 같은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공평과 정의를 따라 살아가는데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유대 당시의 왕들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어서 연약한 백성들을 불공평과 불의로 억압하였고, 마침내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바벨론에게 살륙을 당하고 끌려갔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이러한 비유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의의 왕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강림으로 성취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 곁에서 항상 다스리게 하셨는데, 그 성령님께서도 역시 의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교회는 의를 실현하면서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강림으로 다스림을 충만히 받았던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공평과 정의가 충만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님의 다스림을 충만히 받았던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행4: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공평과 정의를 따라 살 수 있게 됩니다.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는 공평과 정의가 가득한 사회가 됩니다.
맺 는 말
오늘은 ‘우리의 의가 되신 여호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의로우신 왕의 다스림을 받는 우리는 마땅히 의를 실현하며 살아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고아나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연약한 자들이라고 불공평과 불의로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힘없고 권세있는 자들에게는 아부하고,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불의하게 대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는 그런 모습이 없어야 합니다.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긍휼과 자비의 정신을 실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유대나라의 왕들은 불공평과 불의로 연약한 백성들을 착취하다가 무자비하게 바벨론에게 망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서의 존재 성격과 의의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날 교회 안에서도 역시 의의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불의와 불공평이 횡행하여 연약한 성도들이 부당하게 무시당한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증시기관으로서 존재의 성격과 의의를 잘 발휘할려면, 공평과 정의를 따라서 연약한 성도들을 긍휼히 여기는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성령님의 다스림을 잘 받아야 합니다.
담임교역자 라황용
전북 김제 송상교회 /☏(0658) 542-5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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