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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바로 알아감(19) (마 05:43-48, 롬 08:15, 갈 0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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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열두 시간에 걸쳐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여러 하나님의 성호들을 살피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제 오늘은 신약시대에 와서 사용하게 되었고, 신약시대에는 주로 사용하게 되는 하나님의 성호에 대해서 생각하겠습니다. ‘우리 아버지’, 혹은 ‘너희의 아버지’라는 성호입니다.
첫째, 주께서 부르게 하신 ‘우리 아버지’ 성호
구약과 신약 성경의 하나님의 칭호에 대한 회기적인 변화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하나님의 성호’가 주로 사용되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읽는다면, 구약 성경에서 신약 성경으로 넘어올 때에 아주 큰 변화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성호가 나오는데,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구약 성경의 그 많은 성호들이 거의 사용되지 아니하고, 주로 ‘아버지’라는 칭호 하나로 불려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하신 칭호가 거의 ‘아버지’로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5장-7장까지에 실려 있는 산상보훈에만 몇 번이나 사용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 산상보훈에는 마태복음 5, 6, 7장 전체에 걸쳐서 하나님께 대한 칭호만 하더라도 스물여덟 번이나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이라는 말이 일곱 번 ‘주’라고 하는 말이 한 번 나오고, ‘너희 천부께서’라는 말을 써놓고 그것을 다시 지시할 때, ‘그의 나라’라든지 ‘그의 의’라든지 해서 ‘그’라는 말로 두 번 나옵니다. 6장 32절-33절에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할 때의 ‘그’는 결국은 천부를 지시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것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 말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 나머지 ‘아버지’라고 하는 말이 열 여덟번 나오는 아버지라는 말 가운데 한번만은 ‘내 아버지’라든지, ‘우리 아버지’라든지, ‘하나님 아버지’라든지 해서 일반적인 용례대로 쓰시지 않고 독특하게 마7:21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셔서 ‘내 아버지’(즉 ‘예수님의 아버지’)라고 쓰신 것이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 모두에게 쓰신 ‘아버지’라는 말이 열아홉 번 씌여 있는 셈입니다. 그중 열일곱 번은 보편적인 의미인 ‘우리 아버지’, ‘너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고 두 번은 천부,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지시한 ‘그’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참으로 특이한 일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경우들
왜냐하면 히브리주의에서 하나님을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르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볼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가 매우 드문 것을 알 수 있습니다(시68:5, 사63:16, 64:8, 렘3:4, 19, 말2;10). 그것도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직접적으로 부른 것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아주 제한된 경우에만 몇 차례 사용되었는데, 신약에 와서는 아주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아버지로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15번 정도이며, 그밖에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13번 정도 됩니다. 구약과 대조적으로 신약에서는 복음서에만 170번 이상이나 하나님이 아버지로 불리워지고 있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나타내는 것이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신약에서는 개인이 하나님을 직접 “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인 반면에, 구약에서는 단 한번도 하나님을 직접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불경스럽거나 외람된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전자보다 후자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1. 하나님을 아버지로 나타내므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신32:6, 사64:8, 말2:10)
(신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사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말2: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2.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출4:22, 신14:1-2, 렘31:9, 사63:16).
(출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신14: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신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렘31: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사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3.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렘3:19, 22, 31:20)
(렘3:19)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든지 너를 자녀 중에 두며 허다한 나라 중에 아름다운 산업인 이 낙토를 네게 주리라 하였고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나를 떠나지 말 것이니라 하였노라
(렘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4. 하나님을 아버지로 나타내므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강조라고 있습니다(사1:2-3, 30:9).
(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30: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이상의 대표적인 구절들을 통하여 살펴볼 때 하나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상은 이미 구약에도 계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친히 역사에 개입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상을 일찌기 계시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 사용이 극히 제한되어 있고, 그것도 대부분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계시로 나타나고 있고, 이스라엘 백성편에서의 사용은 매우 찾아보기 힘들며,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는 전무하다는 것 등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신다는 사상은 충분히 계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계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에 나타나 있는대로(사1:2-3), 아들로서의 마땅한 책임도 수행하지 못하므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아버지의 참 자녀가 된다는 이 놀라운 계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들에게 결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약 말라기 이후부터 예수님 당대까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도 개인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호칭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어떤 팔레스틴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도, 그 어떤 유대인들의 기도문에서도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른 경우들
신약 성경에, 특히 우리의 복음서에 눈을 돌리면 구약과 랍비문헌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도 대부분 예수님 자신의 개인적인 입술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증거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대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사용하지 아니한 “아버지”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하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새로운 전환이요, 혁명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복음서의 증거
먼저 예수님이 구약이나 랍비문헌들과는 대조적으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나타내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는 모든 경우를 종합하여 보면 마태복음에 42번, 마가복음에 4번, 누가복음에 15번, 그리고 요한복음에 114번 나타납니다. 이것을 그 용법에 따라 세밀하게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세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호칭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마태복음에 6번, 마가복음에 1번, 누가복음에 9번, 요한복음에 87번 나타납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하여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여 하나님을 호칭하는 경우는 마태복음에 16번, 마가복음에 1번, 누가복음에 4번, 요한복음에 27번 나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와 제자들의 “아버지”를 구분하여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로 말하는 경우는 마태복음에 19번, 마가복음에 2번, 누가복음에 3번, 요한복음에 2번 나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팔레스틴 유대 랍비들이나 혹은 예수님 당대의 그 어떤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주 표현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2. 제자들과 초대교회에도 계승됨
그런데도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 사용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전환은 예수님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에도 그대로 계승되어졌다는데 더 깊은 의의가 있습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상의 말씀은 초대 크리스챤들이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호칭 아람어 “아바”를 계속 사용하였다는 것을 잘 입증해 줍니다. 그리고 그밖의 여러 다른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 “아버지”가 자주 나타나고 있는 점은 예수님 뿐만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도 예수님을 통한 이 새로운 전환점에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3.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이유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구약의 선지자나 당대 팔레스틴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아버지”란 말을 이토록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예수님께서 구약의 선지자나 당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아람어 “아바”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러한 전환을 통하여 뜻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의중을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독특한 관계 하에 있음을 보여주시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신약의 성도들이 아들되신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입니다.
둘째,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관계 속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 당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인간의 행위와 조건에 초월하여 인간에게 사랑과 은혜를 주시는 그와같은 은혜로운 “아버지”로 이해하기 보다, 오히려 저 위에 계시면서 오직 토라(율법)만을 통하여 인간을 다스리는 그런 하늘의 “주”님으로 이해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는 없어지고 그 대신 토라(율법)가 그들의 신앙과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은 공로주의가 되엇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토라(율법)를 눈가림으로만 지킬려는 위선주의, 형식주의가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칭호는 거창했으나,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면만 자라 갔습니다(마6:5, 눅17:11-12).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호칭과 함께 당대 유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기도생활을 손수 실천하셨을 뿐 아니라,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새로운 기도문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처럼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호칭 “아버지”를 사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계시에 접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아버지”라는 칭호로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승격과 동시에 자녀에게 주어지는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말할 수 없는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아버지”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었고, 예수님 안에서 이제 그들은 토라(율법)에 매인 종이 아니라, 당당히 아들의 위치로 승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 이하에 있는 청원을 간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차원의 관계
이렇게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 하고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엘로힘’(하나님)이나 ‘아도나이’(주), 혹은 ‘여호와’라는 칭호를 많이 썼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바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뭐라고 불렀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지 않고, ‘의인’(義人)이라고 불렀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요”(창6:9)라고 했습니다. 롯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으므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2:8)고 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했습니다(창15:6, 롬4:3). 이렇게 의인이란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고 경건히 사는 사람들을 보편적으로 의인(義人)이라고 부른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의 터 위에서 사람을 대별할 때 ‘죄인’과 ‘의인’,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나누었습니다. 시편 제1편을 보더라도 거기에 ‘악한자’, ‘죄인’, ‘오만한 자’가 나오지만 거기에 대립하는 말은 ‘의인’으로 말이 나옵니다. “죄인들이 의인의 회중에 서지 못하리라”
그러던 것이 이제 예수님의 가르치심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의인’이라고 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합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나 백성이 공동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다른 여러 칭호들은 거의 사라지고 ‘아버지’라는 칭호를 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산상보훈에서 그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왕으로, 대주재(大主宰)로, 통치자로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영생하시는 하나님, 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게 하지 않으시고 제자들 각자가 직접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도록 ‘아버지’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전능이든지 지종이든지 영생이든지 하는 좀더 위에 계시는 하나님,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특별한 계약 관계에 있는 여호와라든지 자존자(自存者)라든지 하는 이것보다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계속해서 쓰셨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용법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동시에 ‘너희는 그의 자녀다!’ 하는 인식을 주셨습니다.
단순한 피조물로서의 자녀(子女)라는 말이 아니라, 도덕적인 관계에 잇어서 하나님의 특별하시고 영원하신 경영과 계획 가운데서 너희들은 그 자녀다 하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피조물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보편적인 부성(父性)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라고 해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너희의 아버지’ 혹은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 지극히 가까운 위치에서 관계를 지속하면서 그 자녀답게 행동하고 살기를 원하시고 명하십니다. 이 고결하고 신실한 관계는 후일에 신약의 교회에서 현저하고 중요한 용어로 늘쓰이게 됩니다. 신약의 교회에 와서 “하나님은 결국 너희 아버지요. 너희는 하나님의 권속이다 그런고로 염려를 다 그에게 맡기라. 저가 너희를 권고하실 것이다!”(엡2:19, 벧전5:7)고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권속이니까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꼭 신약 교회에서만 그렇게 쓰인 것은 아닐지라도 신약의 교회에서 아주 현저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쓰인 것입니다. 신자들이 당연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고, 자기는 그의 자녀로 생각하여 행동하게 하신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과 우리의 신앙
이렇게 우리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친밀한 관계하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식으로서 친밀하게 상대해 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히 산상보훈에서 하나님의 아들됨의 증표와 아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에 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아들됨의 증표(마 5장)
과연 하나님의 자식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증표는 그가 발휘하는 품성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했고(5:9), 원수를 사랑하면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함으로 천부의 아들됨을 실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5:44-45). 하나님의 자녀가 되엇다는 것은,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야 하며(5:48),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핍박과 고난에 동참해야 하는 책임감(5:11, 10:18-20, 20:23)을 요구받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주어지는 지상에서의 보상(마 6장)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매일 매일의 삶이 이제 하나님의 손안에서 보호되고, 현실적인 삶에 요청되는 필요들이 아버지에 의해 공급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간구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6:11).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십니다(6;8, 32).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고 아버지께 맡기고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6:34).
아들에게 주어지는 유업(마 7장)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장차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7:21, 갈4:7). 영원한 천국은 장차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며 살아가는 자식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실증이 있는 것이고, 그런 자식에게 아버지의 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식된 우리는 이 땅에서 현실적인 필요도 아버지에게서 공급을 받아서 살아가는 것이요, 그뿐 아니라 장차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맺 는 말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인격적인 친밀한 관계속에서 대하기 보다는 관념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관념적인 생각 속에 게시는 분이거나, 종교적인 의식 속에나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로서 늘 우리와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 속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자식이라는 의식이 없이 그저 종교의 영역에서나 찾는 분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늘 아버지의 슬하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을 발휘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 모인 우리 성도들은 아버지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장하시는 식솔들임을 늘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아버지께서 제공하시는 양식을 먹고 자라나냐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거룩하신 품성을 닮아가면서 자식다운 품성을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경영해 가시는 나라의 한 부분을 맡아서 지지하고 나가야 합니다. 이땅에서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살다가 장차에는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아버지와 함께 영원토록 살게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담임교역자 라황용
전북 김제 송상교회 /☏(0658) 542-5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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