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은 물질의 유혹을 극복한다 (창 14:17-24)

첨부 1


우리는 아브람과 함께 믿음의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브람을 통하여 믿음은 물질의 유혹을 극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조카 롯을 구원해야 한다는 결단을 합니다.
조카의 소식을 듣자 자기 집에서 길러 온 가신 3백18명을 동원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그돌라오멜 동맹군과 접전을 벌입니다.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소돔 왕도 고모라 왕도 여러 족속도 모두 패하고 말았는데 어떻게 3백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행동이 믿음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살기를 바라며 계산하고 행동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옳은 길이기에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아브람은 기적 같은 일을 체험합니다. 완전히 패배할 수밖에 없던 아브람의 군대가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돌라오멜 군을 완전히 패주하게 하고 개선 장군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 아브람 때문에 덕을 본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소돔 왕 베라였습니다. 소돔은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악한 도시였습니다. 바로 그 소돔의 왕이 베라였습니다. 그는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아브람을 영접하기 위해 사웨 골짜기로 나왔습니다. 17절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악한 왕이라 할지라도 은혜 입은 자에게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소돔 왕과 전혀 다르고 생소하고 신비스러운 한 왕이 갑작스럽게 등장합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의 영접
18절을 보십시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아브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싸워 이겨서 결국 롯을 데리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왕 멜기세덱이라는 왕이 아브람을 영접합니다. 이 왕은 전쟁에 참여한 사람도 아니오 이 전쟁에 관련된 사람도, 아브람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왜 아브람을 영접하는 것일까요
멜기세덱이라는 말이 이곳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8절에서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찾아야 합니다.
첫째로 그는 살렘왕입니다. 살렘이란 예루살렘의 줄임 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왕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전쟁에서 피곤하고 지친 아브람에게 떡과 포도주로 축복하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 때 나누어주었던 음식이었습니다. 그 떡은 생명의 떡이요 그 피는 생명의 음료입니다. 그것을 먹고 마시는 자는 주님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그를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합니다.
왜 이 분이 이렇게 소개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20절에서 그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됩니다. 그는 떡과 포도주로 아브람을 위로하고 난 후에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축복권이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 사실은 이런 축복을 해주는 멜기세덱에게 아브람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입니다. 그는 십일조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실 까요 왜 그가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를 환대하고 영접하고 위로하고 축복했을까요
이 분에 대한 이야기가 신약에 딱 한 번나옵니다. 히브리서 6장 20절에 멜기세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가 예수님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놀랍게도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멜기세덱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7장 1절을 보십시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람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멜기세덱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부모가 없고 족보도 없습니다. 그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의의 왕이고 평강의 왕이라 하였습니다. 그분의 반차를 좇아 예수님이 대제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지금 아브람을 영접하러 마중 나온 것입니다.
그는 왜 아브람을 영접하며 축복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브람이 롯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상식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믿음으로 그 전쟁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간섭하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 그러했습니다. 골리앗은 거인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를 상대할 만한 군인이 없었습니다. 골리앗이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창과 방패를 들고 소리칩니다. 나와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봐라! 나와 싸울 사람이 없다면 항복해라!고 하나님의 백성을 협박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골리앗을 상대할 군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은 듯 하였습니다.
이 때 한 어린 소년이 뛰어 나왔습니다.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자기가 그를 상대하겠다고 뛰쳐나왔습니다. 사울 왕은 그에게 자기 투구와 창과 칼을 모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옷을 입어 보고는 불편하여 모두 벗어버리고 어릴 적부터 이리떼로부터 양을 지키기 위해 갖고 다니던 돌팔매 하나만 가지고 그 무서운 골리앗 앞으로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상대가 되지 않는 상대를 만나서 게임이 되지 않는 게임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때 다윗은 사무엘상 17장 4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칼이나 총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외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카 롯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주저하지 않고 뛰어든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인 싸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오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당신의 싸움의 대상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의 악의 영들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영적 전쟁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살 때 싸우는 싸움은 영적 전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만으로 이 어리석은 전쟁을 시작한 아브람을 도와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놀랍게도 막강했던 그돌라오멜의 군대가 아브람에게 참패를 당했습니다.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이 믿음으로 세상에 나갈 때 승리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은 철옹성이었던 여리고와 같은 곳입니다. 연약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그 막강한 로마 정부와 싸울 수 있었겠습니까 팍스 로마의 군대를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는 로마가 무너졌음을 우리에게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의 전쟁에 개입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상하게도 불리한 전세임에도 싸움에서 이깁니다. 누군가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상대 밑에 깔렸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오히려 내가 상대를 깔고 올라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떡과 포도주로 영접하고 축복합니다. 실은 멜기세덱이 전쟁을 이기도록 돕고 나서 돌아오는 아브람에게 오히려 네가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사망 권세를 무찌르시고, 부활하신 후에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내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여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 주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데려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소돔 왕과 대조되는 왕이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신 멜기세덱이었습니다. 멜기세덱은 믿음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영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골리앗과 같고 여리고성과 같은 이 세상에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손해보는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런 복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무에게나 이런 복을 주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손해보고, 믿음으로 행동한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그 때에 아브람이 경험했던 행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아브람은 그 때 눈을 떴습니다. 아, 그 전쟁에서 내가 이긴 것이 이 분 때문이었구나. 하나님께서 도우셨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그 마음에 감동과 감격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감사의 제물 십일조
20절을 보십시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 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그 대적을 아브람 손에 붙이신 분이 누구십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멜기세덱이 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그 전쟁을 이기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든 믿음으로 하십시오.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영적 싸움은 레슬링과 같습니다. 레슬링은 두 사람이 몸을 밀착시킵니다. 서로 밀고 당기며 엎치락뒤치락 싸웁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마귀와 이렇게 싸웁니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아브람은 이 말에 아멘!하고 응답합니다. 그 응답이 바로 십일조였습니다. 멜기세덱이 찬송하라고 했더니만 아브람은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나옵니다.
그 전쟁에서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기적 같은 승리를 주신 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드린 것이 십일조입니다. 이렇듯 십일조에는 찬송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후에 십일조가 율법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이유는 율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물질이 아니라 은혜요 감사요 감격입니다. 십일조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벌받으니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드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란 뜻이 무엇입니까 물질 혹은 돈입니다. 인간은 물질의 노예입니다. 물질로 만들어진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물질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세계관은 유물사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본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있기에 옷이 필요하고 먹어야 하고 잠을 자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자기 육신을 잠재울 수 있는 집, 배불릴 수 있는 음식, 입힐 수 있는 옷입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누가 더 좋은 옷을 입고, 누가 더 좋은 집에 살고, 누가 더 좋은 음식을 먹느냐가 우리 인간이 평생 가지고 사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물질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배고프면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배부르다고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허무하고 더 고독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물질적일 수밖에 없고 물질을 추구하지만 그것을 소유했다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짐승이나 동물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영적 존재이기에 물질적인 것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영적인 만족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영적인 만족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야 얻을 수 있습니다.
물질로부터 자유케 하는 믿음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옷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고 먹을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는 날에는 당신은 짐승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물질의 종살이를 피해 갈 수 있겠습니까 그 해답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물질을 초월하게 됩니다. 초월이라는 것은 무시와 다릅니다. 물질을 초월한다는 것은 물질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물질로부터 자유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돈이 나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돈을 쓰게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사람은 돈주면 해결되는 사람입니다. 제일 쉽고 단순한 방법이 돈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요컨대 돈이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이나 모두 물질적입니다. 여기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으로 살 때야 물질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너무 고마워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립니다. 십일조란 물질로부터 자유 함의 표시입니다.
십일조를 내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절대 십일조를 드리지 못합니다. 두 번째는 물질에 대한 자유함입니다. 돈이 나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하면 물질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축복이 옵니다. 포기라는 자유를 경험합니다.
21절에 보면 소돔 왕이 자신들을 구해 준 아브람에게 고마워서 사람은 내게 보내고 전리품을 비롯한 물질은 다 네가 가지라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법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마움을 돈으로 해결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믿음의 사람 아브람의 태도는 단호했습니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호의를 거절하겠습니다. 당신의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나를 부자로 만들었다고 말할 것 같아서입니다. 당신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소돔 왕에게 말했습니다. 오직 나를 축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기쁨은 보수를 받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 진정한 봉사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월급 받고 일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더 자원해서 남이 싫어하는 일을 기쁨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월급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노동을 물질과 바꿔 버리지 마십시오.
아브람은 단호하게도 소돔 왕이 주는 물질을 거절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으면 가난하게 살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가고 싶은 데도 가지 못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 길을 감사함으로 선택했습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돈이야 어떻게 벌든 잘 쓰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돈을 개같이 벌어서는 안됩니다. 주일을 범하고 거짓말 해 가면서 번 돈으로 헌금합니까 그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영광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동정 받을 만한 거지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과부의 엽전 두 닢을 귀중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액수를 중요시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헌금에 희생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얼마를 내든지 당신의 삶에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 내는 것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 많은 사람이 희생 없이 몇 푼 내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눈물과 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부의 엽전 두 닢은 그녀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을 바치면 당장 굶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헌금을 기뻐하십니다. 희생이 있는 헌금, 눈물의 헌금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아브람의 십일조는 자기 포기를 선언하는 것이며 물질의 종이 되지 않겠다는 선포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설자리와 안 설자리를 아는 사람입니다. 쓸 돈과 쓰지 말아야 할 돈을 아는 사람입니다. 돈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면 거절합니다.
예수님도 제일 먼저 받은 시험이 물질적인 시험이었습니다. 물질적인 시험은 언제나 강렬하고 직접적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한 점을 정확하게 공격합니다. 네가 십자가를 질 필요가 뭐가 있느냐 돌로 떡을 만들면 사람들이 너를 메시아라고 말하지 않겠느냐 왜 쉬운 방법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방법을 택하느냐라고 설득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라고 거절합니다.
믿음은 유혹을 물리치지 않고는 시작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멜기세덱이 축복해 주는 그런 믿음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