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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 (창 18: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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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첫 번째 목적은 사라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세사람이 찾아 와서 아브라함과 충분한 교제를 나눈 후에 그들이 한 말은 네 아내 사라가 곧 아들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줄곧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또 다시 말씀하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라가 아직 그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이 조작하고 경험하고 의지로 만든 믿음은 하나님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라는 아직 그 믿음에 이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사라에게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설득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당사자가 믿어야 기적이 일어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의 이유는 이제 곧 소돔과 고모라가 불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아브라함의 거처에서 환대를 받은 세 명의 천사는 장소를 옮겼습니다. 또 다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목적하던 또 다른 곳은 바로 소돔이었습니다.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로 떠났고 아브라함은 전송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돌발적인 사건이 생겼습니다. 소돔으로 향하던 그들이 뒤돌아 서서 어떤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는 하나님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이 장면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가시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한참 가시다가 마음이 바뀌셨습니다. 아니지, 아브라함한테는 이야기해야지.하며 돌아오셔서 하나님의 속마음을 아브라함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마음을 아브라함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친하기 때문입니다. 친한 사람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더 친한 사람이 있고 덜 친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 친한 사람에게는 마음에 있는 비밀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나 덜 친한 사람에게는 말을 골라서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지난 24년 동안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얻고 나서도 13년간이나 믿음의 휴면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의 상급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 하라.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까지도 하나님과 그렇게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인간적인 모든 믿음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믿음을 받아들였고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는 아주 가까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 오셨을 때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아브라함은 그 즉시 그냥 가지 못하게 붙들고 발을 씻기고 떡을 대접하고 송아지를 잡아 요리를 해 드리며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에게서 전혀 볼 수 없었던 태도였습니다. 아마도 이 때 하나님과 굉장히 친해졌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되 하나님과 친해지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친해지십시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잘 믿고 교회도 열심히 나오는데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같이 전혀 하나님과 친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친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음성도 들으며 그분의 비밀도 알게 되고 자신의 비밀도 하나님께 알려 드립니다. 그 축복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요점은 두 가지 였습니다. 첫번째는 내가 아브라함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겠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고 모든 열방의 조상이 될 것이다.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자녀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축복을 주기 위하여 너와 네 자녀들을 택했고, 그 약속은 이 자녀들에게도 이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도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미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임박한 심판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새로운 것을 20-21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새로운 말씀은 바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나 심각해서 하나님이 그 사실을 친히 알아보려고 가시던 중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는 부르짖는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그냥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는 소리를 지릅니다. 남을 억울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고, 학대하고, 고통을 주면 그 고통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하는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백년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압제 속에서 종살이하는 동안 그 고통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기에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을 억울하게 눈물 흘리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압제하고 고통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만약 그런 일을 하면 당장에는 힘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소리가 하나님께 들린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전에 와서 확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그냥 심판하지 않으시고 일단 오셔서 확인하십니다.
확인한다는 말은 기회를 준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때 회개를 하고 마음을 바꿨으면 무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사들이 확인 조사를 하려고 소돔과 고모라에 갔을 때 그들은 무례하게 행했을 뿐 아니라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심판하고자 하시는 마음을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모습입니까 그 모든 말을 듣고 지금 천사들이 소돔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는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자기의 조카 롯이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롯이 도대체 누구기에 아브라함을 이렇게 당황하게 만들었을까요
사실 롯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극히 인간적이며 항상 부담되는 사람, 물질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에도 롯은 자기의 이익을 찾아 소돔과 고모라로 이사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이상하게도 롯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롯이 한 때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동방의 왕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소돔과 고모라의 왕이 패하게 되어서 롯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앞뒤를 돌보지 않고 자기 집에서 기른 가신 3백18명을 데리고 그날로 무모한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움을 줄 때 자기가 손해보지 않는 선에서 마칩니다. 자신에게 해가 돌아오고 문제가 생기면 절대 도와주지 않습니다. 손해보면서까지 도와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행복을 찾아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던 이러한 롯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22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마도 두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로 떠났던 것 같습니다.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을 붙잡았을 데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고 그들에게 시간은 없었습니다. 영화에서 보듯이 시계 폭탄이 작동되기 시작했을 때는 그 시간 안에 그 폭탄을 해체해야 하듯이, 아브라함의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질문
별 볼 일 없고, 허물도 많고, 나에게 많은 해를 끼쳤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가치 있는 일에 자기의 시간도 내고 헌신합니다. 가치 없는 것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귀어 봐야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에게 해를 끼치고 힘들게 했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 잊어버려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 배신을 잘 하고, 실수도 많고, 강퍅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이런 사람을 잊지 않으시고,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예수님의 이 마음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긴 해야겠는데 롯 좀 살려 주십시오라고 직접적으로는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말 좀 붙여 보려고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할까 고민했던 아브라함에게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해 보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자기 죄로 인하여 심판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약 혹시 그 소돔과 고모라 안에 의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시한 카드는 50명이었습니다. 이 땅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죽일 수야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의인 50명을 소돔과 고모라 성과 함께 멸망시킨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라고 큰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 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마도 아브라함은 목소리를 제법 높이고 얼굴도 상기된 상태에서 의기양양하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 하오며... 마치 자기가 하나님인양 당당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별 볼 일 없는 롯 하나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 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의 예상을 깨고 하나님께서 너무나 쉽게 OK하셨습니다. 좋다고 허락하실 뿐 아니라 의인이 오십 명만 있으면 이 땅의 모든 백성들까지 모두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27-28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 오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신이 작아 보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티끌처럼 작아졌고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다섯 명만 빼면 어떨까요 그래도 그 성을 멸하시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아무 갈등 없이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다섯 명을 빼도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하자 하나님의 눈치를 슬그머니 살피며 사십명을 제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삼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더 작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 제가 무슨 말을 해도 화내지 마십시오. 화내지 마시고 제발 그냥 들어만 주십시오. 삼십 명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삼십 명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당혹스러워 하며 질문하는 아브라함에게 스무 명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이 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면서 열명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저하지 않으시고 열명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수치를 무릅쓴 중보 기도
여러분은 이 대화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아브라함이 너무 비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0명에서 45명으로, 다시 40명으로, 30명, 20명, 10명으로 숫자를 바꿀 때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이것이 중보 기도 자의 모습입니다. 하잘 것 없고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서 간구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미움받으면 갈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붙잡고, 수치를 각오하는 모험을 시작합니다.
사랑은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수치를 겪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잘못 되었을 때 부모가 수치를 당합니다. 수치를 당하면서도 그 자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위하여 수치와 모멸감을 가져 보지 못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수치를 당하셨고 매를 맞으셨고 모멸감을 맛보셨습니다. 내가 한 것은 배신과 죄 뿐인데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지 못하시고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감당하기 힘드셨습니다. 제가 이 잔을 마셔야 합니까 이 고난의 잔을 꼭 마셔야 합니까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수치와 모멸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옆에 있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소자, 가치 없는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데는 너무나 주저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치 있는 사람에게는 시간도 내고 헌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사람,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 버려진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참된 중보 기도 자는 이러한 수치스런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저는 여기서 또 한가지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수치스런 중보 기도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참된 중보기도는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인생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과 고민은 다 나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내 인생을 바친 적은 거의 없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떠났습니다. 이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중보 기도의 능력은 살아있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받았지만 롯은 심판 중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중보기도의 승리입니다.
저는 아브라함의 이 비참하고 처절한 중보 기도를 통하여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 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일곱 번의 용서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 용서하라
무한히 용서하시는 하나님, 끝없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십자가에서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시는 예수님, 이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가치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위해서 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똑똑하고 그럴 듯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하고만 사귀고 있다면 당신은 예수님의 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아와 과부와 힘없는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과 창녀들과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사람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한 번도 외면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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