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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실수와 하나님의 신실함 (창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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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나이가 들었다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젊었을 때의 실수는 있을 법 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도 늙어서 실수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반드시 나이가 들수록 더 성숙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숙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더 점잖아지고 교양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인간은 나이가 들 수록 더 욕망이 커집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추해지는 인간을 자주 경험하곤 합니다.
두 번째 볼 수 있는 사실은 인간은 시련을 겪고 나서도 바꿔지거나 고쳐지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죄로 잿더미로 변하는 놀라운 심판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거짓말을 하는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1백세가 되기까지 수차래 나타나서 말씀하시고 예언하시고 권면해 주셨습니다. 더욱이 이때는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의 뱃속에서 이삭이 자라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실현되는 도중에도 아브라함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언제, 어떻게 변합니까 사람이 2백년을 산다고 성숙해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거듭나고 변합니다. 인간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을 때 본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실수한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이 실수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다시 받아들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 그분의 신실함은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두 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용서하시고 반복된 죄를 지을 때도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도 용서하시고 늙어서 저지른 되도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은 변함이 없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아브라함이 실수했을지라도 직접 개입하셔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필요하다면 꿈에서라도 나타나셔서 위기를 막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로 인하여 너는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을 건드리기만 하면 내가 너를 죽이겠다고 일종의 협박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자기의 자녀,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사실 아비멜렉은 잘못이 없었습니다. 잘못이 있다면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비멜렉의 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편이었습니다.

편애하시는 하나님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시험 들기에 딱 알맞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편에 서지 않고 아브라함의 편에 섰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편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랄 만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공정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택한 백성들에게는 편애라고 느낄 정도로 그들의 편에 서십니다.
그러나 자기 집의 아들이 아무리 망나니짓을 한다고 해서 옆집에 있는 모범생 학생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과 같이 결국 자기 아들의 편에서는 아버지의 심정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불공정한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항의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속여서 이렇게 된 것이지 자신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 일을 행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비멜렉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항의하는 아비멜렉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하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네가 만약 그 여자를 범했다면 이미 내가 심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아직 그 여인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꿈에 나타나 죄를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너를 막아내게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저지른 죄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저지른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 저지른 죄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현몽하신 두 번째 이유를 그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밝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라의 몸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먼 훗날 사라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태어나기 때문에, 그리고 사라의 몸에서는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기 때문에 다른 더러운 씨가 그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그 여인을 범하지 말고 빨리 돌려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아브라함이 실수해서 이렇게 되었지만, 그 여인을 범하지 말고 빨리 돌려보내라고 단호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라의 몸을 보호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네가 그 여인을 범할 때에는 정녕 너와 네 가족이 다 죽을 것이라고 엄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사람이 착하고 의롭게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고 사랑 받는 까닭은 택함을 받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의 배에서 나왔다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택하셨다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가 잘났건 못났건 간에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여러분을 변화시키고 말 것입니다. 끝까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여러분을 믿음의 자녀, 약속의 자녀, 축복의 자녀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넘어지고 쓰러졌다고 하더라도 다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늙어서 죄를 지었어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아비멜렉의 항의
8-10절을 읽겠습니다.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데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합당치 않은 일을 내게 행하였도다 하고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의견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분명한 아브라함의 잘못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비멜렉의 항의는 옳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항의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을 불러서 따졌습니다. 내가 도대체 너에게 무슨 해를 끼쳤고 무슨 원한을 샀기에 네가 나와 우리 나라를 큰 죄에 빠지게 했느냐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질문이었습니다.
11-13절에서 아브라함이 이 질문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대답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답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로 내 아비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한 첫 번째 이유는 이곳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혹시 누군가 아내를 빼앗기 위해 나를 죽일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보다 좀 더 황당합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 여인은 나의 이복 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누이였습니까 아니면 아내였습니까 누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인척 관계에 있어서 누이라고 할 만한 이유가 있더라도 사라는 누이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내였습니다. 아내는 아내이고 누이는 누이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 합리화를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아브라함이 아내와 이렇게 약속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비의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셨을 때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둘이서 한 약속이지 이것이 변명 거리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잘못 판단하면 주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요나와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모든 고통은 교회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책임은 목사에게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모두 피해를 보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이렇게 변명하는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대합니까
14-16절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양과 소와 노비를 취하여 아브라함에게 주고 그 아내 사라도 그에게 돌려보내고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사라에게 이르되 내가 은 천 개를 네 오라비에게 주어서 그것으로 너와 함께 한 여러 사람 앞에서 네 수치를 풀게 하였노니 네 일이 다 선히 해결되었느니라
우리는 전도할 때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너나 잘 믿어라. 왜냐하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너무나 형편없는 인격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 믿어도 나같이 살면 된다라는 말을 듣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 겪기 어려운 수모입니다.
마치 이와 같이 오늘 본문에서는 아비멜렉이 거꾸로 하나님의 사람처럼 행하고 있으며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은 변명하고 거짓말하는 초라한 모습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에게 형편없는 이유로 자기를 속여 하나님께 엄중히 야단 맞게 한 아브라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양과 소와 노비를 보내서 그를 후대했습니다.
17-18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 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이왕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를 닫히셨음이더라
아비멜렉에게 양과 소와 노비와 부인과 은 일천 개를 받은 아브라함은 너무나 미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사라를 데려 갈 때부터 닫아 두셨던 아비멜렉의 집의 모든 태를 다시 다 풀어 주셨습니다.

택한 자의 기도 받으시는 하나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세 가지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연약함을 아시고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덕성, 우리의 윤리, 우리의 선행에 상관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젊었을 때 뿐만 아니라 늙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아브라함만 실수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 보면 사라도 거짓말을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 다 거짓말을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삼아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감격을 줍니다. 우리가 잘나서 하나님께 부름 받은 것도 아니고 기도 열심히 하고 십일조를 잘 하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를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실수가 많고 연약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절대 선택과 절대 사랑 때문에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이 사건을 통해 배우는 두 번째 사실은 비록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선택받은 사람과 똑 같은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동일한 복을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여리고성의 한 주막에 살던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고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으로 진격해 오는 사실을 목격했을 때 자기가 믿던 신이 가짜이고 홍해를 가른 신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깨달았습니다.
기생 라합은 너희 하나님은 상천 하지에 하나 밖에 없는 하나님이시기에 너희들이 이 땅에서 이 성을 허물 것이다 그때에 나를 구원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구원을 받았으며 놀랍게도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신약의 고넬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유태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에도 구제를 많이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놀라운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으며 성령 세례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아비멜렉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나오는 한 이방 여인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힘을 써도 그 딸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예수님께 찾아와 딸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소의 예수님답지 않게 대답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함이라. 그 여인을 개와 같이 취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존심을 내세우거나 화를 내지도, 포기하지도, 대들지도 않았습니다.
이 이방 여인은 하나님께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있다 할지라도 이렇게 인격적으로 모독하냐고 대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여 옳습니다만 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갭니다. 주님이 주시는 부스러기라도 먹겠습니다.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난한 마음이며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실제로 그 여인을 개로 취급한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여인의 그와 같은 고백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그때부터 그의 딸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과 싸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이해와 상식으로 모두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유태인들은 60만 명이 나치에 의해 가스실에서 죽어 갔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유태인들은 그런 참혹한 일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그는 열 명의 자녀가 모두 죽고 자신의 기업이 모두 무너져 버리고 몸에는 기와 장으로 긁어야 할 정도로 악질이 걸렸습니다. 자기 부인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면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친구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절대 고독 속에서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회복과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십시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갈 때 흉악한 귀신 들린 딸을 고치신 것처럼 여러분에게 복을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발견하는 마지막 사실은 하나님의 사람의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구약의 최초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의 기도로 네가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의 잘못으로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인데도 아비멜렉에게 오히려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으라고 명하십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후대한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잘못했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이기에 양과 소와 노비와 은 일천개를 그의 아내와 함께 돌려보냈으며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았습니다.
택한 자의 중보 기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롯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집의 닫혔던 태를 모두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택한 자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교회 밖을 나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들의 기도보다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여러분의 가정을 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도덕적으로는 완전한 자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 하나님의 기뻐하는 자, 하나님이 택한 자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이 민족을 고치시며 통일을 이루시며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듣기 원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택하신 여러분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99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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