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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라의 매장지를 준비하는 아브라함 (창 2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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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을 살다가 반드시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누구든지 죽을 때만 되면 몇 달,단 몇 시간이라도 삶을 연장 해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도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아담도, 노아도, 아브라함도, 다윗도 죽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도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사라의 죽음
아브라함이 사랑했던 여인 사라가 1백 27세를 일기로 죽었습니다. 아브라함보다 열 살 아래인 사라가 먼저 죽었습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누가 먼저 죽게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일백이십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1백 27세를 살았습니다. 결코 이 나이는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살만큼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죽었지만 보람있고 의미있게 살다가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래 살았지만 아무 의미없이 살다가 죽기도 합니다.
사라의 일생은 의미있고 보람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라가 큰 일을 하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한 남자에게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키우다 죽은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몫을 다했고 가치있고 의미있게 살았습니다. 임신이 불가능한 90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임신하였고 이삭을 낳아 이삭이 장성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몫을 할 때까지 아들을 잘 양육했습니다. 그것 외에는 한 일이 없지만 그것은 결정적인 일이었고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큰 일을 했는지,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애를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라의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며 그 아들을 통해 먼훗날 메시아가 태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그렇습니다. 그가 이세상에 태어나 여인으로 가장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를 임신했고 해산을 하여 키웠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실 때까지 돌보고 뒷바라지 했습니다. 그 여인의 생애는 어머니 역할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영광스러운 생애를 살았습니다. 의미있고 보람있게 사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생애에서 가장 의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었지만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와서 한 일은 한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들은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병원을 만들 수도 있었고, 학교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한가지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그의 생애였습니다.
스데반은 정결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사랑과 칭찬과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목적은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의 피를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순교를 당할때 사람들이 던지는 핍박의 돌을 피하지 않고 다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인생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돌을 맞으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또 사도바울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학자적인 달란트가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의 3분의 1을 쓸만큼 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생애를 학자로서 사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정이 있었고 리더십이 있었던 큰 인물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교에서 그의 인생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지냈고, 자기의 집에서 살지도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민족인 유대인을 위한 것도 아닌 이방인을 위하여 자기의 삶을 헌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가치 있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이 원하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한 목적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한 목적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다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가능성을 포기할 때 내게 주어진 하나의 목적, 삶의 방향을 향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무엇을 하다가 하나님 나라로 갈 것입니까 사라는 이삭을 키우고 하나님께 바치는한 목적을 위해 여인으로써의 삶을 살았습니다.
약속의 땅 헤브론
2절을 보십시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
여기에헤브론이라는 장소가 나옵니다. 사라가 임종한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믿음의 여행을 떠나 그가 도착한 곳에 기근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황하여 인간적인 판단으로 애굽으로 피신을 했지만 그곳에서 아내를 빼앗길뻔하는 수치를 당합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돌아와 양을 치며 살면서 그 식구와 재산이 늘어 났습니다. 그리고 롯은 소돔으로 떠나고 아브라함 홀로 빈땅에 남았습니다. 홀로 남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네가 보는 땅은 모두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땅이 헤브론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곳에 거하면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사라가 바로 그 헤브론 땅에서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죄로 인한 죽음, 예수와 함께 부활
한평생을 같이 살던 사라가 임종을 맞고 싸늘한 시체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시체를 보면서 애통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아릅답습니다. 예수님도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애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애통하게 했고 아브라함이 눈물을 흘리게 했던 그 죽음은 무엇일까요, 죽음은 어디에서 왔고 왜 죽음은 눈물을 흘리며 애통하게 하는 것일까요. 로마서 6장 23절에서 죽음은 죄때문에 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에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고 절망과 좌절과 어둠의 세계가 인간에게 찾아왔습니다. 인간들에게 있는 현실적인 주제는 죽음, 병, 절망,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이것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죽음의 존재로 만들지 않으시고 영생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어찌 보면 죽음은 인생의 끝이며 그 죽음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정복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는 인류의 모든 죄때문에 죽으셨지만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부활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5절과 56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라는 죽었고 여러분과 저도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고 승리할줄 믿습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 헷족속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
먼저 아브라함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의 헷족속들을 찾아가 매장지를 팔라고 요청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을 나그네요, 우거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타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은 법적인 보호나 기득권을 갖기 어렵습니다. 자기 자신의 처지를 분명히 이해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굴을 사기 위해 간청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만이 나그네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주인공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그 기득권을 빼앗겼을 때 섭섭하고 분하고 억울합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로서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야 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많이 체험한 사람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헷족속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아브라함은 그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은 그들의 방백이었으므로 사라의 매장지를 선택해서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비록 거저 쓸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해도 그 땅을 사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거저 받을 수 있어도 받지 않으면 사람에게 품위가 생깁니다. 7-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거민 헷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찐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아브라함이 헷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힙니다. 얼마든지 땅을 거저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 백성을 향하여 몸을 굽히는 모습을 보면서 겸손과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목을 뻣뻣히 하고 말을 거칠게 하는 것입니다. 고개만 숙여도, 말만 부드럽게 해도 문제가 쉽게 해결됩니다. 타국에서 살 때는 몸을 굽히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항상 허리를 굽히고 겸손하게 요청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미리 마음에 두고 있는 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브론이라는 사람의 막벨라 굴이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때에 에브론이 헷 족속중에 앉았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께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그 땅 주인인 에브론이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아브라함에게 굴과 밭도 모두 드리겠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동족앞에서 약속도 합니다. 세번을 거듭 주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계속 간청하며 그 굴을 사겠다고 고집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에 그땅 백성을 대하여 몸을 굽히고 그 땅 백성의 듣는데 에브론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컨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아브라함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확실히 공증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전에 자신이 판 우물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을 때에도 값을 주고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시 삽니다. 아브라함이 굳이 그 땅을 사려고 하는 이유는 두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염치 없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중에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짐 져야 할 크리스천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공짜입니다. 이것은 그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저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노력하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공짜로 살면 안됩니다. 그런데 예수믿는 사람들은 공짜를 너무 좋아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공짜를 받으면 떳떳하지 않습니다. 부모자식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영국에 있을 때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왔는데 오기 전에 언어와 재정준비를 철저히 하고 왔습니다. 그들은 계획한대로 무사히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영국을 옵니다. 단지 비행기 표 한장을 들고 하나님이 까마귀떼를 보내서 먹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본인도 고생을 할 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도 고생합니다. 참된 크리스천은 남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는 사람입니다. 내가 준비되어야 하고,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하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도 주셨고 건강도 주셨고 창의력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노력도 하지 않고 고생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더 노력하고 고생하고 땀을 흘려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런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때문에 그 땅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헷족속에게서 약속의 땅으로 만드는 일을 아브라함이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계획 이루는 아브라함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저 기다리다 보면 내 손 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이 하나님의 땅이라고 하면 그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만들기 위한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노력하고 애쓰고 돈을 벌어서 하나님의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그 땅이 내게로 굴러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작은 땅을 사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만들어 가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통일도 오지 않고 나라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복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 모든 크리천들에게는 질서를 잘 지키고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비전을 가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아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 고향에서 그 뼈를 묻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사라의 시체를 들고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 나은 본향인 축복의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외국땅이지만 헤브론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죽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을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상과 비전을 실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는 땀과 눈물과 개척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창세기 25장 9절을 보면 그 막벨라 굴에는 아브라함도 묻히고, 이삭도, 야곱도 그 굴에 장사됩니다. 변함없는 아브라함의 땅이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땅을 삽니다. 공짜로 주겠다고 해도 거절하고 굳이 준가를 치르고 그 땅을 샀습니다. 14-18절을 보십시오.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주여 내게 들으소서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사백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바꾸어 그 속의 굴과 그 사방에 둘린 수목을 다 성문에 들어온 헷족속 앞에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정한지라
에브론은 또 한번 거저 가지라고 말했지만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값을 주고 땅을 샀고, 그 땅이 아브라함의 땅이 되었음을 모든 사람앞에서 확인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비전때문에 이렇게 합니다. 12억 인구의 중국땅에 비전을 가진 사람은 그 땅을 향해 가야 합니다. 가서 그 땅을 밟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를 복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녀를 향해 꿈을 꾸며 이 자녀를 향해 믿음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꿈이 내 자녀를 통해 이루어짐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그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
막벨라굴과 그 땅을 산 것으로 인해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한 발을 들여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장사를 하고, 기업을 경영하고 직장에 다닙니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단순히 이익때문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꿈과 비전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면 이땅의 젊은이들이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 비전이 있다면 그 땅과 사업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아브라함이 산 땅은 작고 굴도 작았지만 이 순간이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 막벨라 굴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을 때는 그저 보통 땅이지만 하나님이 그 땅에 기름을 부으실 때는 축복의 땅이 되고 민족을 살리는 땅이며 역사를 변화시키는 곳이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경영하는 기업이 이런 기업이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가 이런 축복의 자녀가 되고 여러분이 소유한 물질이 이런 축복의 물질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1장 13-15절에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소유한 것은 막벨라굴 외에는 없었지만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멀리서 보고 믿음의 결정을 하고 행동하고 씨를 뿌렸습니다. 이 세상이 목적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 이런 아름다운 흥분과 축복, 감격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내가 가진 돈은 몇푼 뿐이고 가진 집도 몇 평되지 않지만 내 자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데 사용할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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