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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죽음 (창 25:1-18)

첨부 1


그 동안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 공부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1백 75세의 일기로 이 세상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죽음에도 의미가 있습니다.어떻게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어떻게 죽느냐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준비된 사람은 삶을 준비하는 사람이고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삶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죽 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삶을 아주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뤄지는 언약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고 75세가 될 때까지 하란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렸고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에 대전환을 가져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합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도 삶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이 말씀을 따라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을 데리고 믿음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25년 동안 그는 성숙하지 못한 믿음 때문에 스스로의 의지와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했지만 결국 실패와 좌절만 겪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월이 흐르면서 위로부터 주시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1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과정은 한 평생 걸린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그의 나이 1백세, 믿음의 삶을 시작한지 25년이 지나서야 성숙한 믿음의 단계에 접어듭니다.
잉태하기 불가능한 나이에 약속의 자녀 이삭을 가지게 된 사건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생활과 사고 방식에는 일대 변화가 일어나고 이후에 아브라함 부부는 평안한 믿음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삭의 나이 37세에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고 혼자 남은 아브라함은 이삭과 리브가를 혼인시킵니다. 그러고도 아브라함은 35년을 더 삽니다.
그런데 25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죽기 전에 있었던 일 한 가지가 소개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어서 아들 여섯을 낳은 사건입니다 .
1-4절까지를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무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 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후처의 이름은 그두라였고 그 자손들을 3대까지 소개하고 있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는 성경에 거의 없습니다. 단지 역대상 1장 32절에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소개할 때 그두라의 자녀 여섯이 소개됩니다.
창세기에는 그두라를 후처라고 말했고 역대상에는 첩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라 생전에 맞이한 첩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녀의 사후에 재혼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후처를 얻어 아들을 낳은 사건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며 그 자녀들을 통하여서도 열방을 만들게 되고, 아브라함이 열방의 조상이 되는 성경의 예언이 응답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5절을 보면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라고 말씁하십니다.
그두라의 자녀들은 열방의 조상이 되었고 결국 아브라함은 열방의 아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노년까지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사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불신해서 생긴 상처였습니다. 그래서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아서 사는 동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많이 멀어집니다. 어떤 사건이든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사건이 있고, 반대로 가까워지는 사건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전자에, 그두라를 통한 자녀는 후자에 속한 예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아브라함
5절, 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여기서 좀 더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5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이삭에게 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당대의 부자였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 점을 묘사하는 부분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13장 2절을 보면 애굽에 도망갔다가 돌아올 때도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고 그의 부의 상태를 설명해 줍니다.
창세기 14장 14절을 보면 롯이 위기를 당했을 때 아브라함이 자기 집의 가신 3백18명을 데리고 가서 공격한 일이 나오는데 남자가 3백18명 정도라면 그 부인들과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아브라함은 1천명의 식구를 부양하는 강력한 족장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창세기 24장에서 아브라함이 자기의 종을 시켜 이삭의 신부 감을 위해 많은 약대들과 보물들을 보내는 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소유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서자들도 먹고 살만큼 해주면서 특별한 조치 하나를 더 취합니다. 자기 생전에 서자들을 다 동북으로 멀리 떨어져서 살게 합니다. 서자들을 이삭과 가까이 살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지게 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지혜가 아니 였을까 생각합니다. 배다른 형제끼리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 였기 때문에 이렇게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멀리 떨어져 살게 해서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영적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약속의 자녀가 세상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영향력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의미입니다.
7-10 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 되니라
1백75세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은 아브라함의 나이는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닙니다.
사람은 병들어 죽고, 전쟁터에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여러 가지 불행한 다른 이유로 제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8절의 기운이 진하여 죽었다라는 말은 자연사를 했다는 것, 즉 수명이 다하여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장수하고 죽은 아브라함을 보면 잠언 16장 31절에 나타나는 지혜로운 말이 생각납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제 죽었고 자신의 열조로 돌아갔다라고 말합니다. 장례식은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공동으로 치렀고 시신은 막벨라 굴에 어머니 사라와 합장했다는 구체적인 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더 생각해 볼 말은 자기 열조로 돌아갔다는 것인데 시신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던 열조의 곁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신은 부인이 살고 있는 막벨라 굴에 합장을 했다는 말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열조로 돌아갔다는 말은 그가 조상들의 믿음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한 평생 이 세상에서 살면 내 죽음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의 죽음에는 독특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믿음을 가지면서부터 놀라운 환상과 약속과 축복을 다 받았습니다. 이 축복과 약속과 환상을 아들 이삭에게 다 넘겨주고 아브라함은 자기 조상의 믿음의 반열로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5절에 아브라함에 대한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성경을 보면 하나의 사건도 그냥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는 예언대로 열국의 아비가 되었고, 큰 민족을 이루었으며, 그 이름 또한 창대케 되었습니다. 모슬렘에게까지도 그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려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말도 성취됩니다. 죽음과 고통 속에서 만난 예수님
여러분,
이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 뜻대로 살다가 주님 품에 안기어 영원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욥이었습니다. 욥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고난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생각한 내가 왜 이렇게 억울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라고 고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러한 고통 끝에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죄업이 고난을 겪으신 그분이 욥의 고난 중에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욥기 19장 25-27절에서 욥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그가 구속자를 예수님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온 인류의 죄와 고난을 대신 지실 메시야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 가운데 있는 욥이 경험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고통을 대신 감당하십니다.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왜 하나님이 고통을 겪으셔야 합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죄와 실수 때문에 고통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죄 때문에 고통 당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욥과 같은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아들 이삭을 죽여 번제물로 바치려고 한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하나님은 그를 저지하시고 어린양을 대신 번제물로 주십니다. 어린양은 이삭의 죽음을 대신했고, 이것은 먼 훗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시는 것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욥이 경험한 것과 같은 환상을 보며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예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옆에 있던 한 강도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두 강도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예수를 저주했지만 한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라는 사실을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그 순간에 알게 됩니다. 그리고 메시야에게 강도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얼마나 위대한 순간입니까. 강도의 마음속에는 절망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그는 메시야를 만난 것입니다. 이 강도에게는 그 순간부터 천국이 임하기 시작했고 그는 죽음과 고통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예수와 함께 하늘나라로 가는 환상으로 인해 믿음과 기쁨이 가득 했을 것입 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바로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 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마가복음 16장 17-18절)
이 말씀이 자기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세상과 실패가 두렵지 않습니다. 결혼에 실패했거나 장사했다가 망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병들어 죽게 된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환상이 내 안에 있다면 그런 현실적인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었던 강도가 알게 된 천국의 환상을 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도 들어가고 매도 맞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쫓겨나기도 하지만 한을 품거나 마음속의 상처가 없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진 사람은 고통을 겪어도 상처를 받지 않고 한을 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을 많이 겪으면서 계속 상처를 받습니다. 마음속에 상처와 분노와 한이 있다는 얘기는 그게 진짜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무시하고 멸시해도 섭섭해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커다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럴 때는 마음속으로 통과!라고 말해 보십시오. 그래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약속과 믿음으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그를 슬프게 하거나 화나게 할 수도 없었고 그의 생각을 바꿀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에게도 주어진 능력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과 이 능력의 비밀을 이웃에게 알려야 합니다.
계속 되어지는 믿음의 축복
여러분,
이런 관점에서 사도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감동과 깨달음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라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라고 빌립보서 4장 14절에서 말합니다. 가난해도 부유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오직 예수님을 좇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를 절망케 하거나, 슬프게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이삭에게 계승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그에게 주어졌던 복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약속은 계속 승계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까지도 그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에게는 그분을 통해 계승되어진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싸움을 할 때 믿음의 눈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한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는 그렇게 했던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이 계속되기 때문에 저는 온누리교회가 오순절날 사도행전의 교회가 승계된 교회라고 믿습니다. 주님 2천년 전에 있었던 오순절 교회의 그 축복이 그날로 끝 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오늘 우리에게 연결되게 해주십시오. 그 기적이 교회에서 일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저는 기도합니다.
또 1백년 전에 한국에 와서 대동 강에서 죽었던 순교자의 피도 온누리교회에 계속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축복은 승계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어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그 축복이 이삭에게로 승계 됐다면 아브라함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믿음이 자녀에게도 계승되기를 바랍니다. 온누리교회가 받은 축복이 다른 교회에서도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이 계승되는 축복이 흘러가 북한의 문을 열고, 이 민족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시킬 줄로 믿습니다. 12절-16절까지 보십시오.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락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십이 방백이었더라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삭뿐만 아니라 이스마엘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불 신앙과 정욕과 죄 때문에 저지른 실수를 항상 뒷처리 해주십니다. 창세기 21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라가 이스마엘을 쫓아냈을 때 다시 돌아오도록 수습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십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나님이 이삭뿐만 아니라 서자들도 축복하셨듯이 이스라엘도 구원하시고 모든 이방인들도 구원하십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이스마엘은 향년이 1백37세에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
이스마엘도 1백37세에 죽습니다. 창세기 36장 28절에 보면 한 가지 결론을 얻게 됩니다. 이삭이 1백80세까지 살았고, 아브라함이 1백75세까지 살았고, 이스마엘이 1백35세까지 살았든 결국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똑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가진 사람은 죽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통과하고 죽음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내일의 주인공들입니다. 미래는 어느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곳을 가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천국의 주인공들입니다. 그곳은 우리의 집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은 미래를 소유합니다. 미래가 불안하거나 두렵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에서 일하고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보게 하시고 믿음의 눈으로 천국을 생각하게 하시고 믿음의 눈으로 우리 자손들을 축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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