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뜻 (사 02:1-4, 롬 12:1-2)

첨부 1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예배를 통해 성립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배로 시작하여 예배로 매듭지어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예배를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예배 분위기가 경건하지도 못하고 진실하지도 못하다. 예수는 예배할 때에는 신령과 진실로 드리라고 말하였 다.(요한 4:24)경건하고 진실한 예배란 어떤 예배인가 바울은 다음과 같 이 권면하였다.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로마 12:1)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일종의 비인 도적인 행위가 아닌가라는 의문과 저항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말은 이 세 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라는 뜻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는 뜻을 함축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이 세대는 어떤 세대일까 (1) 비정(비정)의 시대 예수께서 당시의 사회상을 비유하여 이 세대는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함께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마태 11:16)라고 말하였다. 이른바 비정의 시대라는 뜻이다. 이 세대는 타인의 일에 전혀 무관심한 세대이다. 자신에게 부담이 되거나 후환이 두려운 일에는 아랑 곳 하지 않는 비인도적인 세대이다. 80년 5월 전라도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 들이 죽었다. 총칼에 의해 무참하게 죽었다. 그것이 군대에 의해 참살되었 다는데 우리 사회의 슬픔과 원한이 응어리져 있다. 당시 서강대학 경제학과 4년생 김의기군은 그 현장을 목도하고 그 참혹상을 고발하는 유인물과 함께 투신자살했다. 5년전 서울대학 생물학과 4학년 김세진군은 우리사회의 정 치적 비리를 개탄한 나머지 분신자살했다. 이들은 한국감리교회의 유망한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한국감리교회는 그들의 죽음을 외면했다. 고혼을 위 로하는 기도나 억울한 젊은 죽음을 고발하는 설교 한 마디 선포하지 못했 다. 가슴을 치는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저들의 안식을 비는 추도식도 없었다.

왜 이토록 비정한 교회가 되었을까 교회의 멧세지는 사람의 행운을 비는 일에만 집약되었을 뿐 이웃을 위한 고난의 멍에는 나누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 아들이 아니요 형제도 아니다라는 비그리스도교적 이기주의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예수의 시대나 우리 시대나 자기 밖에 알지 못하는 비정함에 있어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바울은 이런 비정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으로 새롭게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너희가 신령과 진정 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면 너희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 라는 것이 바울의 설교이다.

작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성서 의 가르침이다. 학원에서 추방된 교사들과 교사들 그리고 학생들, 저작활동 이 제재받고 있는 문인들을 사회적 이단자로 백안시하는 비정함을 버려야 한다. 그들의 양심과 용기를 높이 찬양하며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들 의 신변보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2) 폭력의 시대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다음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어려운 상 황에 뛰어드는 선한 사람의 이야기와 여리고라는 어두움의 거리, 폭력사회 의 이야기이다. 여리고는 살인행위가 난무하는 어두운 골목이다. 이른바 사회의 외곽지대이다. 법의 위력이 미치지 못하는 불법지대, 무법지대이다.

이 외곽지대는 주먹들의 뒷골목일 수도 있고 불의한 권세가 통치하는 전제 국가일 수도 있다.

여리고 계곡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강도는 사라졌다. 매맞아 사경 을 헤매는 사람만이 버려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갔다.

아니 그 현장을 목격했을지도 알 수 없다. 그들 가운데는 상층 구조에 속한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는 종교인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지나쳐 버렸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임무 에 우선하기 위해서 일 수도 있다. 이런 참혹한 살인현장을 외면하지 못하 고 뛰어든 사람이 있었다. 익명의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무한한 동정심과 박애정신을 발휘했다. 그는 선(선)의 모델이 되었다.

우리는 이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떤 위험부담이 예상될지라도 이웃의 고난을 외면해선 안된다. 그리고 여리고 골목 같은 이 사회의 암흑지대를 방치해서는 안된다. 지난 85년 5월 12일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는 나라와 시국을 위한 교역자 기도회를 가 졌다. 젊은 학생들이나 평신도 위주가 아니라 교역자 기도회였다. 그런 데 당국은 그들의 눈 밖에 난 교역자들을 발견하는대로 강제로 경찰차에 태워 무수히 짓밟고 구타한 뒤 난지도 쓰레기장에 버렸다. 무려 20여명이나 되었다. 성직자들이 졸지에 쓰레기가 된 것이다. 당국의 눈에는 이 나라의 정의파 목사들은 사회의 쓰레기로 보였던 것이다.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당 하다 죽었다. 사회가 온통 들끓었다. 온 세계여론도 악화되었다. 그런데 그 사건에 연루된 고위 경찰관은 다시 복직되었다. 살인자는 처벌되어야 하는데 이 나라에서는 공권력의 살인행위가 정당화되고 있다.

지금도 공권력에 의한 살인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87년도엔 이한열군 이 최류탄에 의해 죽었다. 지난 4월 26일엔 강경대군이 전경들의 쇠파이프 에 맞아 죽었다. 이에 분격한 학생들이 연달아 분신 또는 투신자살을 하 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의 자살을 보는 눈이 너무나 냉정하다는 점이다. 어리석은 방법이라느니, 살아서 싸워야지,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헌 신짝처럼 버린다느니, 죽는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느니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객관적 요인,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비판이나 개혁을 촉구하는 사람은 드물다. 어쩌다가 우리 사회가 공권력에 의한 살인에 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젊은이들에 대해 시비를 벌이게 되었는가 간디는 폭력은 자살이라고 했다. 화염병은 나쁘다. 돌도 나쁘다. 그러나 그것들이 학생들의 손에 들리기 전에 곤봉을 휘둘렀고, 최류탄이 발사되었다.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학생들은 과격해 진 것이다. 이는 이로 갚아서는 안된다. 최류탄이나 곤봉 때문에 화염병 이나 돌을 던져서는 이길 수 없다. 대의명분으로도 잘못된 저항방법이요 위력에 있어서도 화염병은 최류탄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눈을 떠 주었으면 싶다.

(3)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집시법이나 고치고 보안법이나 적당히 손질한다고 우리사회에서 폭력이 사라지고 인정이 넘치게 될 것인 가 천만의 말이다. 인간성의 개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기 밖에 모르는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 성공과 치부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의식구조로는 전혀 희망이 없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 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마음 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17세기 첵코의 교육사상가 코메니우스는 인간에 게서 공격성과 잔인성을 제해 버리고 온유함과 사랑으로 바꾸는 운동이 없 이는 사회안정도, 세계평화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지금 우리사회 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싸움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돈 잘 버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마음이 온유한 사람이요 사랑을 제일로 믿는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이 땅의 주인이다(마태 5:5)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에서 나와 생명으로 들어간다(요한 1서 3:14) 사람의 생존에는 생명이 제일이요 그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것은 땅이다. 땅과 생명의 원천이 되고 주인 이 되는 사람은 온유하고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다.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군사문화의 영향력이 가시지 않고 있다. 수출하는데도 100일작전, 범죄를 퇴치하는데도 범죄와의 전쟁, 시위를 진압하는데도 전투경찰등 그 밖의 많 은 사회적 언어 가운데는 공격성과 잔인성을 상기시키는 말들이 많다. 고 요한 아침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선비정신의 나라로서의 의젓한 모습, 외 경스러운 모습은 몽땅 깨어지고 말았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 이 우리의 지도자로 추대되어야 한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투표해서는 안된다. 수단 좋고 힘센 사람을 선출해서는 안된다. 옛날 유대 나라의 예언 자 이사야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이사야 42:1-4)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