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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길을 가셨다! (사 50:4-9, 빌 02:5-11, 막 15: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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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배당 신축 관계로, 기존 예배당 2층에 있던 서재실 대용으로 컨테이너 박스를 하나 구입하여 임시 서재실로 마련하고 이사했습니다. 그런데, 임시 서재실로 짐을 옮기면서 귀한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기존 예배당에서는 220V와 110V를 함께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전기 도구 중에는 220을 사용하는 것도 있고 110을 사용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 마련된 서재실에서는 220V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깜빡 잊고서 110으로 사용하던 전화기를 220 전원에 꽂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전화기 아답터가 타버린 것입니다.
한편, 차를 마시려고 커피포트에 물을 붓고 코드를 꽂으니, 물이 금방 끓었습니다. 이전에는 한참 기다려야 끓던 물이, 이번에는 코드를 꽂자마자 끓으니, 신기하면서도 의심이 갔습니다. 110V용을 220V에 꽂은 게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됐기 때문입니다.
뒷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커피포트의 사용 전원은 220V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110V에 꽂고 사용했기 때문에, 물이 더디 끓었던 것입니다. 한 2년 동안이나 이 사실을 모르고, 저는 미련하게도 커피포트 의 성능만 탓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떤 전기 기구든지 전원을 바로 연결해야만, 그 기능을 충분히 이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전원을 바로 연결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도구의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아예 못쓰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을 가졌을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충만히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은 물론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이웃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올바른 신앙을 갖지 못할 경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제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자신과 이웃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뿐더러, 교회와 하나님께도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사이비 신앙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기독교에 대해서 바로 알고, 바른 목적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고 예수를 믿거나, 그릇된 목적으로 교회를 다닌다면, 그것은 마치 100V짜리 전기기구를 220V전원에 꽂는 것처럼, 아주 위험천만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고난주간을 거쳐야 부활주일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해야만 부활의 영광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부활의 진리를 빼놓을 수 없듯이, 십자가의 고난도 절대로 외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주변의 신앙인들 중에는 고난이 없는 부활의 영광만 누리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주는 종교’이지 ‘받는 신앙’이 아닙니다. 요컨대, 기독교는 ‘받는 영광’보다는 ‘주는 기쁨’을 더 귀하게 여기면서 누리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영생을 선물로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영생이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그 무엇으로도 다 갚을 수 없는, 엄청나고도 놀라운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라 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열심히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 계속 그 뭔가 자꾸만 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갚아야 할 빚이 많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받을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할 경우, 씨알이 먹힐 리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번 고난주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께서 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어떤 자세로 십자가를 지셨는지, 우리는 잘 살펴보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신앙을 가짐으로써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가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은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2:7)』고 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다(8)』고 했습니다.
결국, 주께서 지신 십자가란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지위와 권리에 집착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버리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종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겪으신 육체적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난은 결코 육체적인 고통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런 고통까지 당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은 내 것을 포기하거나 버리는 아픔인 것입니다. 내가 귀중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일지라도 주님을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하나님은 그를 하늘 높이 끌어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바울 선생은 빌립보서 2장 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 자랑하고 싶거나 드러내고 싶은 것들을 완전히 다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위나 명예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팎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도 과감히 내던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1.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버리거나 주님께 바치려 하기보다는, 우리는 오히려 더 얻지 못해서 안달인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처럼, 조건부로 하나님께 드리는 척 하는 경우는 허다해도,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경우란 그리 흔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그리고, 그 길을 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말씀 중에는 축복에 관한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복(福)도 십자가에서 귀결(완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후에 얻는 부활이 없으면, 그 어떤 복(福)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우리는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십자가 진리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십자가의 진리를 바로 깨달아야, 기독교 신앙을 바로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부 교인들은 십자가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교단에서는 ‘십자가는 예수께서 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단지 축복의 상징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십자가의 핵심은 겸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나 된 모든 것을 비우거나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내가 주의 말씀을 전하는 일 때문에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당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사명 감당하기를 피하지 않겠다(사50:4)』고 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믿음을 살펴볼 때,
②이사야나 예수님의 삶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걸 버리면서 낮아지는 길을 가셨는데, 우리는 뭐든지 더 많이 얻으려 하고,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기까지 하면서 자신을 낮추셨는데, 우리는 타인의 발을 씻어주기는커녕, 대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불평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 좀처럼 자기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상대방 입장을 먼저 고려할 줄 아는 것이 예수 믿는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언제든지 내 입장을 먼저 생각하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내게 좀더 편리하고 내게 좀더 이익이 되는 쪽으로 주장하면서, 좀처럼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슈바이처 박사가 모금운동을 위해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열차 역에는 환영인파가 몰려나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1등 칸에서 나올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막상 기차가 도착하자, 뜻밖에도 슈바이처 박사는 3등 칸에서 걸어나왔습니다. 환영객들은 무척 놀라워하면서 “박사님 같으신 분이 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4등 칸이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할 수 없이 3등 칸을 탔습니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1등 칸의 지위나 권리를 포기하고 3등 칸 열차를 이용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를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사람들은 슈바이처 박사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 권리나 기득권을 포기할 경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보다 훨씬 더 값진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낮아지고자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끌어올리신다고 하신 말씀을 누누이 가르침 받았으면서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따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비워서 주님의 뜻을 이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억울하게 붙잡혀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예수께서 짓지도 않은 죄목을 걸어 고소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많은 군중이 예수를 따르자, 이를 시기한 나머지 예수를 고발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빌라도 앞에서 예수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느냐 너는 할 말이 없느냐”고 추궁했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았고, 불평이나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셨건만,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이 많습니다. 이유와 핑계가 아주 많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우리는 분명 지은 죄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변명과 이유가 왜 그렇게도 많은지 모릅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말을 줄이거나 할 수 만 있으면 삼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①항상 주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아침마다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귀담아 듣고서, 그 지시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그 말씀이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명 감당할 수 있도록 힘주시리라 믿고, 그 사명을 피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②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고 또 낮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일은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고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욕을 먹거나 손해를 봐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을 먹으면서 그 일을 감당하려면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권리나 지위까지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당장 아무런 보상이나 이익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보소리 듣기가 십상입니다.
③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로 하여금 최후의 승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짧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안목입니다. 영원하고도 귀한 가치를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아무 말 없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열심히 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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