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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리라! (삼하 05:1-5, 고후 12:2-10, 막 0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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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젼 목사님은 위대한 설교가로서 너무 유명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한번은 아주 형편없는 설교를 했습니다. 말하자면, 완전히 죽을 쑨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히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도 뭔가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형편없는 설교를 축복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그는 한 주간 내내 이 기도를 했습니다. 밤중에도 일어나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은 지난주의 엉터리 설교를 보상하려는 맘으로 멋진 설교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많이 받았노라 했고, 그 자신도 자신의 설교에 대해 만족하게 생각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두 편의 설교에 대한 결과를 한번 비교해 보기로 하고 조사와 분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으로 놀랄 만큼 달랐습니다. 첫 번째의 엉터리 설교를 통해서는 41명이나 주님을 영접했지만, 두 번째의 그 멋진 설교를 통해서는 단 한 영혼도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후12:5에서 말하기를 『나는, 내가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과, 이런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불러주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위대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연약함을 느낄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내 약한 것을 기쁘게 자랑한다(고후12:9)』고 했습니다. 그리고, 『내 힘이나 내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보다는 주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9)』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만을 드러내면서 자랑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학식과 지위, 그리고 신분이나 신앙적인 열심에서, 그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안 다음부터는 그 모든 것을 분토(糞土)처럼 여겨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를 알고 믿게 된 것을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신비한 체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걸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사실 이상으로 과장할 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간섭하셨습니다. 그런 경험 때문에, 바울이 교만에 빠질까봐, 하나님은 가시로 찌르는 것과 같은 질병을 주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질병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세 번이나 간절히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네게 내리는 은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사람에게 가장 잘 나타난다(고후12:9)』는 음성을 들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연약할 때에 가장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한발 뒤로 물러서십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자신을 드러내며 교만해질 경우, 하나님 대신에 마귀가 와서 우리를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은 천사를 떨어뜨려 마귀가 되게 하고, 겸손은 사람으로 천사가 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겸손’을 독일어로는 ‘디무트(demut)'라고 하는데, 그 말의 또 다른 뜻은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신다는 성경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왕이 되었을 때에, 사무엘 하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다윗은 점점 더 세력을 굳히게 되었다(5:10)』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다윗은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윗과 바울처럼, 겸손히 주님만 의지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만을 자랑하며 드러내고 있습니까 물론,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목표도 바울과 다윗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어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은 아직 부족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겸손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보다는 나를 드러내고 내 자랑하기에 바쁜 것입니다.

1.세상의 헛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감리교회에서 발행하는 ‘기독교타임즈’ 1면에 충남의 어느 교회 광고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께서 박사학위 받은 것에 대한 감사 예배를 드린다는 광고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혜와 건강을 주시고 물질도 허락하셔서, 그 힘들고 어려운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리기에 충분하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큰 광고를 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사실 그런 종류의 감사 예배는, 대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인간 자신이 그 영광을 독차지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을 분토처럼 버렸다는 바울의 신앙을 이어가야 할 목회자로서는 멀리해야 할 행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혹 성도들이 강권할지라도 끝까지 거절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일찍이 에덴 동산에서 그런 유혹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한 마음과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안목의 정욕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습니다. 그들이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유혹의 도전을 계속 받고 있습니다. 이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영적으로 타락할 염려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지위와 체면 때문에 억지로 교회 다니는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①우리가 겸손하지 못하면 그런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결과에다가 그 일의 목표를 두면 안 됩니다. 어떤 결과가 주어지던지, 그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또한, 어떤 결과가 주어지더라도, 그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감사패 하나, 상장 하나라도 받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나’를 앞세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공로 다툼이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그 공로가 돌아가면 그를 깎아 내리기에 정신 없는 것입니다.
②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주님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를 드러내고 내 자랑하기에 바쁘다 보면, 언제 주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겸손해야 나타나는 법인데, 내가 아니면 안되고 내 생각대로 하지 않으면 결코 안 된다고 할 경우, 어떻게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주께 대한 선입견 때문에, 주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선입견만 버렸더라면 타지역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행히도 주님을 영접할 만큼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사람들은 겸손하지 못한 까닭에 손해보는 게 참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더 큰 손해를 보지 않게 하시려고, 예방주사를 주듯이 찌르는 가시와 같은 질병을 주셨던 것입니다.
③겸손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 믿는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복 가운데에는, 미래에 누리게 되는 것보다는,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훨씬 더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면서 그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이미 자신의 손에 그 복을 쥐고 있으면서도 불평과 불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에서 선지자가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물며, 자신들의 마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으니,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하건만, 그들은 그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놀라운 주의 복음을 접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귀하고 값진 복음입니다. 하건만, 일부 성도들은 몇 푼 어치 되지 않는 세상 명예와 지위 때문에 복음을 헌신짝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오기 전에 버렸어야 할 세상 자랑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주를 믿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어서 속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그 권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2.우리는 겸손히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 능력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헛된 자랑과 교만한 맘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 의지하고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록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라도, 세상에서 제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졌다 할지라도,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실보다 더 귀할 수는 없습니다.
①이 사실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겸손히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바울은 『내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보다는, 주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고후12:9)』고 했습니다. 나를 내세우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밤낮 자기 자랑하다가 날 새게 마련입니다.
주께서 비유로 드신 ‘어리석은 부자’는 눅12:17-19사이에서 ‘나’라는 주어를 여섯 번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는 나를 내세우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주님만을 자랑하고 드러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자기 지혜만 믿다가 망하게 마련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주께서 그의 앞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 인생은 틀림없이 성공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겸손히 의지해야 합니다.
②우리는 주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 능력을 드러내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인 것을 항상 깨닫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주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인이신 주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내 맘대로 살아놓고서 주님께 책임지라 할 수 없습니다.
김포 어느 교회에는 고 장로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제가 김포에 있을 때만 해도 칠십이 넘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분은 교역자가 아무리 젊어도, 마주 앉을 때에는 꼭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방 내 무슨 행사가 있으면 자신의 돈을 가지고 담임자 이름으로 찬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장로님은 매사 교역자를 존중하고 내세웠습니다. 담임자가 좀 부족해도, 교인들은 담임자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 많은 장로님께서 담임자를 존중하니, 그 누가 젊은 교역자라 해서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도 자연히 교역자를 존경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사람들에게 전도가 되고, 교회는 날로 부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이 예수를 어떻게 믿고 섬기고 있는지 짐작이 가고 남을 일입니다. 비록 그 교회가 시골에 있지만, 지금도 계속 건실하고 튼튼한 교회로 성장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처럼, 담임자를 존중하면 설교에 은혜를 받게 되고, 그 결과 성도들의 믿음과 생활은 성숙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내세우거나 교만하면 점차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를 바로 알고 섬기면서, 모든 일을 통해서 주님만 자랑하며 영광을 돌리게 되면, 그런 사람은 모든 면에서 크게 성장할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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