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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골고루 사랑하신다 (잠 22:1-2, 약 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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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학교는 우리나라 서울대학교처럼 일본에서 최고가는 일류대학입니다. 몇 년 전, 그 동경대학교 철학과를 수석으로 입학한 어느 수재가 있었습니다. 그 수재는 대학에서 칸트를 연구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독일의 철학자로서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쓴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 수재는 칸트 철학을 연구하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수재가 어느 날 학교에 있는 호수에 빠져 죽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벗어놓은 신발에서는 아주 작은 쪽지가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그 쪽지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더라는 것입니다. ‘칸트여, 네가 인생의 무엇을 아는가’
그는 칸트에게서 인생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다가 실패한 것입니다. 칸트 철학을 깊이 연구함으로써 자신이 품었던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했는데, 그 궁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미궁 속에 빠져드는 느낌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민하던 나머지 죽음을 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근본문제를 연구한다는 철학자들도 명쾌하게 그 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바른 인생을 살 수 있는지, 그 의미와 목적, 그리고 그 방법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참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 인생의 길이 되고 진리와 생명이 되심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가르침을 바로 배워서 실천하고자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주의 가르치심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것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그 진리를 바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이 점을 냉철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처럼 불행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마가복음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본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지, 또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실천할 수 있는지, 그 기본 원리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셨을 때입니다. 주님은 조용히 계시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엔 귀신들린 딸을 둔 불쌍한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유대인들이 업신여기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주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하기를 “난 먼저 내 식구인 유대인들을 돌봐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음식을 강아지에게 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그 여인을 강아지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물론, 주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는 게 아니라, 그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선생님 말씀이 옳습니다만, 강아지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질 않습니까”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여인은 딸의 병만 고칠 수 있다면, 자신은 어떤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만큼, 그 여인은 자기 딸을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인이었지만, 주의 능력만은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그처럼 굴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겸손한 태도를 보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녀에게 “훌륭한 대답이다. 마귀는 이미 네 딸에게서 떠나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녀의 딸만 고치신 게 아닙니다. 그녀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한(恨)을 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동안, 딸로 인해서 얼마나 맘 고생을 많이 했겠습니까 그리고, 이방인이라 해서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과 차별대우를 많이 받았을 텐데, 그 설움 또한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주께서 그녀의 한을 일거에 해소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그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인간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녀를 규정지었던 모든 차별과 억압을 벗겨내셨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돈과 학력이 많아서도 아니고, 외모가 출중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녀가 품은 생각을 보시고, 주님은 그를 그렇게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로 하여금 사람답게 하는 요건은 돈과 학력, 또는 외모나 구변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고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녀가 인정을 받게 된 것은, 그의 생각과 태도가 주님 보시기에 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오늘 우리도 그녀보다 더 나은 게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타인으로부터 차별과 냉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좀더 나은 환경과 여건이었으면 세상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종의 피해 의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환경과 여건을 개선해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환경이 개선되고 여건이 좋아지면,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식을 통해 달성하고자 열심히 자식을 가르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가진 것이 많거나 배운 게 많아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것은, 단지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하나를 보시고, 주님은 우리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귀한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진 것과 배운 것을 자랑하고 어떤 공적을 드러내려 한다면, 그것은 아직 기독교 진리를 잘 모르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미 그 인생은 보장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데, 그 이상 우리가 뭘 더 바라겠습니까
다만, 우리가 그런 믿음이 있음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자녀로 삼아주셨듯이, 우리도 이웃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재산 유무나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이웃을 이웃으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차별의식을 갖고 이웃을 모른다고 할 경우, 주님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기독교의 황금률인 줄을 잘 아는 우리가 이웃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잠언서에서는 『이웃을 따듯이 대하고 아껴주는 것이 은금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22:1)』고 했습니다. 그 다음의 말씀을 보면, 그 이웃이란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언 22장 8절과 9절은 대구(對句)를 이룹니다. 8절에서 『악의 씨를 뿌리면 재난을 거두고 분노의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9절은『남을 보살펴 주면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먹어야 할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8절에서 말하는 ‘악의 씨’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난한 자를 잘 돌보지 않고 무시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23절 말씀이 그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말라. 가난한 자가 그 억울함을 호소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하소연을 일일이 다 들어주실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난한 자’란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지위와 신분에 있어서 차별을 받거나, 학벌과 지역적인 문제로 차별 대우 받는 경우, 또는 여자라고 해서 차별 받는 경우를 비롯해서, 모든 차별 받는 대상을 말합니다.
우리는 차별 받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면서, 또 다른 사람을 차별합니다. 예컨대, 우리는 미국이 우리를 일본과 차별하는 것에 대해 민족적인 수치와 억울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서양인들에게는 아주 친절한 반면, 동남아 사람이나 흑인을 보면 아주 업신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그렇더라도, 구원받은 우리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넓고 큰사랑을 가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으니, 우리 또한 그 아버지를 닮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즉, 우리 이웃을 차별 없이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을 아무 차별 없이 대합니까 야고보는 『부자들에게만 친절하거나 아첨하는 것은 주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며 죄를 짓는 것이다(2:9)』했습니다.『부자라 해서 특별석에 앉히고, 가난한 자라 해서 바닥에 앉히지 말라. 그것은 나쁜 생각을 갖고 재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된다(2:4)』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진리의 요체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 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차별적인 규정을 철폐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더더욱 믿음 없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질서까지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교회에서는 K신학 출신만 목회자로 모셔왔습니다. 그렇지만, 무엇이 불만인지 연거푸 목회자를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H신학 출신을 목회자로 모셨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훌륭한 분을 모셨다고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후 그분을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K신학 출신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여선교회장의 말이 “어쨌든 목회자는 K신학 출신이어야 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차별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어느 지역 출신은 안 된다는 생각도 버려야 하고, 누구는 가난해서 안 되며, 누구는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골고루 사랑하셨듯이, 우리 또한 차별 없이 그 누구나 사랑하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①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것이 이웃사랑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면, 이웃사랑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특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보면, 그에게 용기와 소망을 불러일으켜 줄지언정, 그를 타박하거나 핀잔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에 있어서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아무리 많이 소유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믿음의 바른 생각을 갖는 것이 진정한 부자입니다. 딸의 병을 고침 받은 그 여인은, 돈주고 그 병을 고친 게 아닙니다. 주를 믿는 믿음과 바른 생각을 가졌기에 그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②믿음의 생각만 바르게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믿음이 있음을 이웃사랑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물질로 돕는 것만이 이웃사랑이 아닙니다. 나보다 못한 생각을 가졌거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도 이웃사랑입니다. 마가복음 7장을 잘 살펴보면, 주님은 모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며 관심을 기울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께서는 이 세상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그 누가 무슨 권리로 차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주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합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이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③이처럼 우리가 진리를 바로 알고 이웃사랑을 열심히 펼쳐나갈 때에, 우리의 소망인 천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에, 남녀와 신분의 차이, 지역과 종교의 차별뿐만 아니라, 그 모든 차별을 다 없애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골고루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런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바로 깨닫고 실천하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잠시동안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의 중심적인 내용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고 천국만 가면 그 뿐이라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일까요
기독교의 중심 사상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성경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진리를 믿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인 덕목은 이웃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이웃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웃사랑을 어떻게 실천하고 있습니까
이웃에 있는 모든 사람을 골고루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맘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생각이 모자라고 생활 능력이 부족한 사람,
그 말씨나 행동이 곱지 못해서 사람들로부터 비난받는 사람,
믿음이 부족해서 교회를 잘 나오지 못하는 사람,
몸이 불편해서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
이처럼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가 섬겨야 할 이웃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사람을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공을 들여도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그들에게 잘해주고서도 욕을 먹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돌보며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믿는 자를 통해서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도 더욱 깊이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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