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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요 11: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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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일부러 늦게 도착하므로 이미 나사로 죽은 지 나흘째였습니다. 예수님이 살리러 가까이 오자 처음에는 마르다가 마중을 나왔으며, 그 다음에는 그 동생인 마리아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들이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다시말해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도 같이 우 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기독교에서 사랑과 긍휼과 자비라는 말이 너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마치 하나님쪽에서 우리에게 빌면서 요구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안 받아 주면 하나님이 슬피 울며 자살이라도 하실 것같은 묘한 우월감과 칼자루를 쥔 것 같은 자리에 서 곤 합니다. 우리는 여러군데서 그런 모습을 봅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면 전하러 가 는 우리가 오히려 왜소해 보이고,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밑지고 지는 것 같 고 양보하는 것 같아 보이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은혜를 전달 받아야 되는 사람들 이 오히려 심판자이고 큰 소리치는 고객인 듯한 묘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입 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내가 안 사주면 저 사람들은 먹고 살 것이 없는 자들' 인양 보는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그런 상황을 종종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독교가 그 절대적인 권위와 엄청난 위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제대 로 대접을 못 받는 종교 중의 하나입니다.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인 모양 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이야기 하는 것은 그런 시각에서 설명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와 주시는 그 첫번째 동기와 원인이라는 시각에서 설명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 리 인생의 그 비참함과 처참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결코 외면하시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얻을 만한 대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 얻을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 편에서 우리의 비참함에 대 하여 어떤 안타까움과 사랑을 갖고 계셨기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데까지 결과 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하기 위해서 긍휼과 눈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 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사랑을 구걸이라도 하듯 이 그렇게 찾아 오시기라도 한 것같은 묘한 교만함의 자리에 앉아 있지 않는지 정 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물과 통 분히 여기신 것이 무엇을 본 반응이었는가를 분명히 파악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 다. 사1:2-9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귀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 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였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 땅은 황 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키웠 으며 이방인에게 같이 에워 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우리의 죄와 죄인 된 형편을 이 말씀보다 더 잘 지적하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 마땅히고, 벌받아 마땅하고, 희망이 없고 처절하고 비참하고 절망의 구렁텅이 에 있는 자들이라고 성경이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41장으로 가면 이 지적을 하신 하나님께서 전혀 아무런 이유와 원인이 없이 또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사41:8-9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 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성경에는 이 두 가지 논조가 서로 분명하게 상치됨에도 불구하고 늘 병행돼서 나 타납니다. '너희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기 알맞은 족속들아'하는 지적이 있고, 또한 동시에 방금 읽은 말씀같이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너 희를 구원하겠노라'하는 약속이 늘 어떤 의미에서 어느쪽이 더 비중이 크다고 이야 기할 수 없는 높은 어조로 같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얻은 자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지금 택함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입은 자로서 택함받은 자입니 다. 사랑의 대상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라기 보다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어떤 자냐 하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죽을 병에 들어 있습니다 저쪽에서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쪽은 죽어가고, 썩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서 그를 죽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죽을 병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최고로 사랑하고 무엇이든지 다 해 줄 마음이 있는데 상대방이 죽음의 길에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 사건은 바로 그렇게 묘사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여, 주의 사랑하는 자가 병들어 죽게 되었나이다'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셨더니 어떻게 되었 습니까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와 하 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병에 걸릴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안타까와 하시는 것 입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책임이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신고로 그의 죽음에서 그를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설명하고 싶은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음 앞에서 그 일로 울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 처 절함에 대하여 안타까와 하십니다. 바로 그 사랑과 긍휼이 예수님께서 여기까지 오 시게 하였고, 우리를 죄에서 건져 내시게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요11:36-37절을 보십시다.

이에 유대인들은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에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사람은 꼭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꺼내 놓는 그 많은 질문들 중에 가장 많 은 게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선악과를 만들었을까'입니다. 이 물음과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의 `왜 늦게 와서 그를 죽였지'하는 사람들의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내주실 만큼 사랑하시고, 홍 해도 가르시고, 만나도 주실 수 있다면서 왜 선악과 하나 못 따먹게 하지 않으셨 을까 하는 질문을 하곤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늘 이 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요 그러나 여러분의 신앙 생활 자체가 그런 질문의 연속 임을 아셔야 합니다.

예를들면, '어느 학교를 보내면 대학을 잘 간다더라'는 사실 때문에 무었이 있습 니까 부정 전출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위해서 좋은 것은 다 해두고 싶은 것입니다 좋다는 것을 알면서 안 해보신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좋다는 것과 좋다는 일을 다 음 날로 미루는 족속이 아닙니다. 절대로 미루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사람은 죽기 전에 꼭 하는 법입니다. 그 앙심을 풀어야 죽는 사람들입니다. 안 하 고 죽으면 죽어서도 눈이 안 감기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다고 하는 신앙 생활은 왜 제대로 안 하시는 것이죠 그 답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복스럽지 않기 때문입니 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이런 뜻입니다. '왜 하나님은 내 인생을 이렇게 저렇게 충분히 시원스럽게 하실 수 있을텐데.. 왜 이렇게도 힘들고 어렵고 마음에 들지 않게만 하셨느냐'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질문이라기 보다 섭섭함에 더 가까 운 항변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시며 만나도 능히 주실 수 있으신 분 이 어쩌면 오늘 나에게는 요다지도 재미없게 만드실까 하는 물음인 것입니다. 그 래서 생기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생활을 분리시키는 부작용입니다.

말라기 1:2절을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 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 고 했더니 '아니, 이게 사랑이라는 겁니까'하면서 반문하며 섭섭한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좀더 확인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 금 더 더듬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기적 속에서 살아온 민족도 없습니다. 홍해를 육지 같이 건 너오고, 만나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오는 기적의 샘물을 먹으며,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고, 요단강을 건너 들어가서 가나안 땅을 얻은 족속입니다. 하지 만 인류 역사상 이스라엘 민족만큼 수난의 연속이었던 민족은 다시 없습니다. 이스 라엘 옆에 있었던 모든 나라가 흥하고 망했지만 이스라엘은 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놔두고 계속 고생 속에 있게 합니다. 지금도 아랍의 여러 국가 속에 홀로 갇혀서 사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쪽에서 이야 기 하자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셨다는 게 이것입니까 홍해를 가르고 나 와서 뭐 좀 나은 줄 알았더니 광야였고, 가나안에 들어 갔더니 전쟁이었고, 거기에 서 언제나 싸워야 했던 블레셋이 있었고, 애굽이 있었고, 나중에는 바벨론과 페르 시아가 있었습니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한테도 한 번 당하고, 그리고 로마에도 당 하고, 그 이후에는 뿔뿔이 흩어져 독일 나치한테 당하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유 대인 하면 언제나 저 밑에 있는 족속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족속이 이 정도로 대접받고 있는대도 여전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 다.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이것이 과연 사랑입니까 하면 서 항의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자꾸만 핵심을 바꾸려는 시도가 생깁니다. 축복을 만 들자!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을 믿었더니 기도만 하면 점수가 잘 나온다든 가, 예수를 믿고서 사업을 했더니 갑작스럽게 크게 성장했다거나, 예수믿고 나서는 무좀부터 비듬까지 기도만 하면 싹 나으니 병원 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식의 축복을 자꾸 들먹이고 나옵니다. 요즘 우리들에게 축복이란 이런 것들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것이 핵심적인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중에서 하나님께서 한 번도 간섭하신 손길을 놓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서 이스라엘을 간섭하셨던 날들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좋아했던 날 수는 몇날이 없습니다. 전부 고생한 날들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했다고 그러십니 다. '아니, 이게 사랑입니까'하고 반문하자,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말1: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 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 여기 하나님의 대답 중에서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 랑하였다고 그러십니다. 에서가 야곱의 형이 아니냐라고 묻는 것은 이런 의미입 니다. 에서가 야곱보다 개인적인 능력이 뛰어난 자라는 뜻입니다. 장자가 언제나 부모의 재산을 거의 다 물려받는 법이므로 조건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 가 야곱을 사랑하였다'고 하십니다. 야곱과 에서의 생애가 어떻게 다릅니까 야곱 은 고생했고 에서는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가장 큰 차이입니다. 야곱은 고생 을 무지무지하게 했습니다. 거의 전 인생에 걸쳐서 고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랑이라고 그러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사랑이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을 것을 위하여 뛰어가는 것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태만 과 비참을 향하여 뛰어가는 우리의 발을 자르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명과 진리와 영원을 준비케 하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간섭이 우리에 게는 싫은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원래 욕심을 따라 뛰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 다.

요즘은 그런 일이 조금 뜸해 졌습니다만 오래 전만 하더라도 가발이 상당히 유행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발은 처음에 천연 가발을 제일 좋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 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인조 가발이 훨씬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연 가발 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늘 빨래를 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인조 가발은 빗질을 하는대로 가지만 천연 가발은 빗질하는 대로 안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고대를 시켜줘야 제대로 질서가 잡힌다는 겁니다. 더구나 천연 가발은 만들 때 왼쪽 머리에 있던 머리칼을 왼쪽에다 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무작위로 심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물에 빨아다가 말리면 원래 태어났던 대로 다 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대체 그 머리칼이 어떤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인지를 상상 해 보십시오. 제 멋대로인 것입니다. 씻어 놓으면 자기 고집대 다 서고 마는 것입 니다.

바로 우리 인생이 이와 꼭 같은 것입니다. 우리를 가만히 놔두면, 마치 감긴 시계 태엽이 결국은 서서히 풀려서 죽음의 자리로 가듯이 우리가 예외없이 사망으로 가 고 마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으로 그 길을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가 얼마나 이 사망과 절망의 길로 열심히 가고자 하는 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예수님이 우리 앞에 딱 버티고 서시면서 우리의 가는 길을 가로막고 서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아니, 그렇게 세게 때를 것이 뭐 있어요'라면서 싫어 합니다. 자기가 가다가 받아 놓고서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쓸데없는 오해들입니다. 자기가 가던 힘으로 자기가 받아 놓고도 이 쪽에서 힘껏 때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답답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고 서도 '이게 사랑입니까'하면서 도리어 투덜거리더라는 것입니다. '왜 만나를 주 실 수 있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보내실 수 있다면서 내 인생은 어떻게 좀 안 해 주시는 겁니까'하면서 항의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가고자 하는 대로 내 버려 두면 지옥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걸 그냥 놔 둡니까 강제라도 막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에게 '공부해라!'고 그러면 종종 이렇게 되묻습니다. '아버지 꼭 공부를 잘 해야만 훌륭한 사람이 돼' '옆 집 아저씨는 박사라던데 왜 집에서 놀아' 그럼 우 리가 뭐라고 그럽니까 '넌 아직 몰라도 돼!' 그러나 얘들이 이젠 다 압니다. 그렇 게 아버지 머리 위에 앉아서 요령 피울 구멍만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얘를 그 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둡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훌륭한 사람을 만들 수 있 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강제라도 책상 앞에 앉혀 놓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다 가게 내버려 두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 된 성품을 완성시킬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간섭이 있을 수 밖 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안타깝게 생각하셔서 그 분이 우리 인 생에 뛰어 드신 것입니다. 많은 기적이 있지만 그런 것은 안 주시고 이상한 것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을 제대로 완성시키는 최선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나의 욕심을 채우고, 나의 계획한 것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 나님을 동원시키기 위하여 나아 온 것은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갈등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날 꼭 이렇게 만드셔야 속이 시원하십니까'라고 투 덜거리며 허송세월 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의 인생 목표가 바뀌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일어켜 놓은 나사로입니다. 나사 로의 부활을 구경하는 구경꾼이 아닙니다. 여기서 구경꾼과 나사로 중에 어느 쪽이 더 감격스럽겠습니까 나사로일 것 같지요 그러나 구경꾼이 훨씬 더 실감 나고 감 격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는 자기가 죽었던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 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어난 자들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죄의 노예에서, 저주받을 자리에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옮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죽음의 자리에서 꺼 내었다!' 그러자, 우리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저 를 죽음의 자리에서 꺼내실 수 있는 분이 째째하게 십 만원 하나 달라는데 안 주시 깁니까 이번 아파트만 당첨시켜 주시면 제가 남은 걸로 교회에 헌금하겠는데 그러 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서로 좋고 좋은 것이 아닙니까 아니, 저를 위해서 예수님 까지 보내셨다면서요 그런데 이까짓것 하나 변변하게 해결시켜 주시지 않으시는 겁니까' 하면서 끊임없는 나의 요구사항을 늘어 놓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이 사실 거기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으로 이것 하나만 꼭 이루어 주십시오! 하면서 붙어 늘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맞았습니까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매맞은 상처뿐이라 고 했습니다. 끝도없이 바로 그 지적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상당한 특권입니다. 동시에 상당한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 다. 왜 고통이 됩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욕심과 욕망에서 돌이켜 진리와 생 명과 영원을 준비하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어긋나는 그 길로 가고 있으므로 하는 일마다 안 됩니다.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그러므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가장 최후에 드실 수 있는 생각입니다.

예수를 믿어 보았자 별 탐탁하지 않다고 어떻게 가고 있습니까 기껏 잘 믿는다는 것이 교회 나와서 큰 소리나 치고, 예배 시간에 기도나 하며, 성가대만 하면 그게 다입니까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기독교의 영광들은 가장 사소한 것들이었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과 그 풍성함을 우리가 이제부터는 누 려야 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식으로 유도되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11:39-40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43-44절을 보십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더라 이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있습니까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 다 음 문제는 물어 보나마나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후에 무엇을 더 실험하겠습니 까 죽은 자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런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네가 믿 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 그러므로 결국은 우리의 싸움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한 여러분의 영광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영광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두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저 하 나님 앞에 쩔쩔매고 무릎꿇고 기도나 하고 헌금이나 내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러나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행복이 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것도 우리가 누려야 할 것 에 비해 몇 천만 분의 일밖에 안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의 삶 이란 과거를 추억할 틈이 없습니다. 과거를 이야기 하는 사람은 이미 그 자신이 더 이상의 것을 생산할 능력이 없는 자이기 때문에 과거를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앨범을 뒤적인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지금이 행복하 면 과거를 돌이킬 필요가 없습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고 나면 분명히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과거 의 것을 돌이킬 틈이 없이 현재의 것에 만족하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안 사십니까 누가 기독교를 이렇게 가난하게 만들었습니까 누가 하나님의 약속과 영광들을 이렇게 가리우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생각들의 나약함과 가난함이 상상을 아무리 해 도 하나님의 영광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으니까 기껏 생각해 놓은 것이 '뭐 그런 거 겠지' 하면서 자신의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을 제한 시키고 있 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서 누가 예수님게서 오셔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일으키시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시가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책임이고 여러분의 권리입 니다. 오늘도 마땅히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넘쳐야 할 감사들과 감격들과 기적들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닙니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 해서도 아닙니다. 단지 여러분이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고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십오. 그 분의 약속 안에 들어가 시며 그를 믿는 믿음의 발걸음을 굳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과 여러분의 생애 를 통하여 나타내고 싶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 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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