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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방법 (요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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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방법은 사람의 방법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뜨거운 열정에 서 우러난 목숨을 건 충성도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심으로 일언지하 거 절하고 경계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방법으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 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지 않으십니다. 오직 주님의 방법으로만 되어질 뿐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가장 많이 안다고 하면서도 가장 모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특히 요한 계시록 3장에서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계 3:20-21)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 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 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 말씀은 불신자를 향한 말씀입니까 신자에게 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신자에 게 하신 주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계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 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고 하는 말씀에서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말 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전도용 말씀으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 나 신자들을 향한 더 중요한 말씀이 있기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 말 씀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 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입니까 (계 3:15-18)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 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 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 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주를 안다고 하는 신자인데 실상은 알지 못하는 자요, 믿는다고 하는 성도인데 사 실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하나님을 잘 알고, 예수를 잘 믿고,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대하여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안 믿는 것도 아니고, 주를 모르는 것 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지 못하면 핵심을 놓치고 만다는 경고입니다. 바로 이같은 시각이 지금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기록한 관점입니다. 다시말해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이 좋 아하시리라고 여겼던 그 일들이 아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복음 본 문에서 사도 요한이 그토록 분명히 하고 싶은 구절이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예수 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당할 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주님이 왜 당하는 길을 걸으셔야 했었는가 이 것이 신자들에게 있어서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신앙의 열쇠입니다. 주님께서 왜 당하시는 이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으며, 무엇을 당할 것을 알고 이 길을 갔으며, 이 십자가의 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들에게 가장중요한 신 앙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에 가면 이 말씀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히 5:7-10)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 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답니다.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이 주님에게 어떤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결함이 있었 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표현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고난 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이 말씀이 주님에게 어떤 결함이 있었고 그 결함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된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런 의미의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직무에 대한 표 현입니다.

(히5:1-3)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 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 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제사장과 그 사역에 관한 설명입니다. 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것과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즉 결함이 없으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대제사장직에 순종하러 오셨기 때문에 고난으로 순종하셨다는 말입니 다. 그리하여 이 대속의 사역을 완성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큰 비밀이 있습 니다. 주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라는 이 말씀은 곧,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 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방법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대신하여 죽으 으시는 그 방법 이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께 능력이 없고 부족함이 있어서 그 렇게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값을 위하여 당신의 피를 흘리시는 방법 이 외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마지막 지상 명령으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복음의 영광된 사명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승리와 찬송과 환희로 채색되어 있기 에 그 일에 있어서 아픔도 슬픔도 죄절도 없이 승승장구하는 것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 뜻밖에도 많습니다. 왜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마태복음 28장의 기록과 같은 기록 때문일 것입니다.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 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 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거기서 이미 마태복음 끝부 분은 환희와 승리에 휩싸여 있습니다. 게다가 제자들 보고 땅그ㅌ까지 가라고 하십 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는 겁니다. 이제 이 생명의 말씀을 듣고 나가면 거칠 것이 없고, 반항할 자가 없어 실패할 수 없다는 그런 엄청난 자랑과 승리의 기대감 속에서 뛰어 나가도 록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만일 잘못된 일이 있다면 믿음 이 없기 때문이거나 우리에게 어떤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는 죄악이 있기 때문 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가르치는 대표적인 집단이 베뢰아입니다. 성경에서 표현하는 신앙인들의 생활이 늘 형통하고 승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적인 것 뿐입 니다.

복음서를 이어가는 성경은 사도행전입니다. 여러분이 사도행전을 생각할 때에 그 분위기가 밝고 승리롭습니까 아니면 어둡고 실패롭습니까 우리가 사도행전을 언뜻 생각하기엔 상당히 형통하고 승리로와 보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거기에는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있고 모두가 기쁨으로 모여서 찬송하고 내 것 네 것을 가리지 않는 아름 다운 교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죄짖고 그냥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는 사건이 있고 베드로의 설교 한 번에 오 천명이 회개를 하며, 성전 미문에 앉 아있던 앉은뱅이가 기적적으로 일어나서 뛰어 다니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래서 이러한 기록들이 마태복음 28:18절 이하의 말씀과 연결 되어서 승승장구를 거 듭해 보입니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사도행전의 기록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고 그 생명과 진리를 힘있게 전파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대적들의 수그러들지 않는 살기 등등한 공격들도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모두 흩어졌을 때에나, 다시 힘을 얻어 성령충만 하여 담대히 진군해 나아갔을 때나 마찬가지로 대적들은 그들의 권세와 힘 과 지혜를 다 동원하여 제자들을 대적하고 제거시키려고 애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 다.

사도행전 5장에 가면 벌써 대적들은 제자들을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하는 사건이 나오고, 7장에 가면 스덴반 집사의 순교가 나옵니다. 스데반이 설교를 하고 났을 때 에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니까 천사의 얼국과 같았습니다.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 이 빛이 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기를 나도 스데반 같이 설교를 하 다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어 순교한다면 한이 없겠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에 대한 묘사를 잘 보십시오. 스데반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요, 얼굴도 천사와 같이 빛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자가 설교를 했는데도 한 사 람도 회개시키지 못하고 돌에 맞고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의 설교로 바울이 회 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은 절대로 승리의 연속으로만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8장에 가면 큰 핍박이 일어 납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들이 각처 로 흩어집니다.

빌립 집사는 하는 수 없이 사마리아로 갑니다. 그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 아니 라, 핍박을 피해서 가는 것입니다. 온통 고생한 이야기들입니다. 12장에 가면 야고 보가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베드로가 다시 옥에 갇혔다가 천사가 풀어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울은 가는 데마다 교회 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바울의 전도를 받고 믿는 자들 도 많았지만, 방해하는 유대인의 세력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 방해하는 사람들에 게는 병도 안 걸렸습니다. 오히려 바울에게 병이 생겼습니다. 바울은 가다가 까무라 지고 거반 죽게 되는 일들이 자꾸 따르는데 원수들은 발병도 않고 건장하여 살기등 등하여 쫓아 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데 마다 쫓아와서는 소란을 일으키고 방해를 하고 송사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리하여 결국 어떻게 끝납니까 바울은 쇠고랑을 차고 갇혀서 로마로 호송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여기 어디에 승리와 환 희와 박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을 사 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전하는데 있어서 다른 방법들은 도리어 방해가 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하리라고 기대하 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구하여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여겨지십니까 참으 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문제에 대하여 기록하 기를 `주님께서는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2장으로 가면 사도 바울이 이 두 부분을 이렇게 잘 나누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딤후2:9)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 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이것이 놀라운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 내시는 방법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승리적이고 승승장구 하는 방법들을 잘 쓰시지를 않으십니다. 오히려 붙잡혀 다니는 방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나를 맬 수는 있어도 그 말씀은 맬 수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 는 일들 대부분이 이러한 방법들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가면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나옵니다. (딤 전1: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 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지 의인을 구원하러 오 신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죄인이라고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처음에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같은 자기를 향하여 죄인이 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보니 자기가 바로 죄인이 더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던 것입니다.

(딤전1: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 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뭐라고 합니까 바울의 구원이 어느 때에 임합니까 회개하고 고민할 때입니 니까 아닙니다. 살기 등등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습니 다. 다메섹을 갈 그 때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갔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갔습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또 다메섹에 피신해 있는 성도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니 위해서 간 것 이 아니라, 주님이 바울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버울울 꺼꾸러뜨려 놓고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였 습니다.

지금 그런 이야기를 딤전1:1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주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그를 향하여 칼을 들고 도전하였던 나였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는 내게 오래 참으시고 마침내 구원해 주셨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구원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습니다. 구원이 우리의 조건에 있지 않고 전 적으로 그분의 은혜와 사랑에 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바울 을 주님의 사도로 세우신 것입니다. 사도가 되고보니 그 자신이 스데반을 죽인 것이 오히려 그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멧시지가 되었습니다. 은혜로만 구원받게 된다는 강력한 멧시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후로 그가 붙잡혀 가든지 고난을 당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영광이 될것을 믿었기에 전적으로 순종 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 구원 받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믿음의 길을 가는 것 자체도 은혜입니다. 다시말 해 내 힘으로 내 방법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도된 우리들을 어떻게 인도하시려 할까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요구가 에베소서 4장에 나타납니다.

(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것이 성도를 향 한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이 성 경이 목표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신자들을 보낸 곳이 바로 교회입니 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조직체를 가진 교회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 여 그의 지체가 되어있는 성도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 신자들 은 자라나기를 요구받고 있습니다. (엡 4:14-16)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 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 스로 세우느니라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보냄을 받습니다. 예외없이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 도의 몸된 교회로 보냄을 받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신자가 되면 누구든지 그 자 신이 자기의 몸을 주관하거나 결정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몸은 누가 결정합니까 머리가 합니다. 머리는 그 사람의 인격을 대표합니다. 신자의 삶은 이제 머리되신 그리스도께서 결정하시는 대로 나아가도록 의도되고 있는 자들입니다. 다시말해 그 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이 우리 신자들의 지체를 통하여 제대로 타나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머리되신 우리 주님께서 제자의 발을 씻겼듯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지고 당 함으로 다른 심령들을 섬기고 살리는 자가 되라는 요구를 우리가 받고 있는 것입니 다. 우리는 이같은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야할 주님의 머리에 붙은 주님의 지체들입 니다. 이것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들이 연합하여 해야 합니다. 이것 을 교회라는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리 하나가 길면 한 쪽이 짧은 것이 되고 맙 니다. 한 쪽 팔이 짧으면 자연히 다른 쪽 팔이 길어지고 맙니다. 다시말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못하시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에 요구할 것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이전에 기독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 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가져야 할 가장 큰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 겨라! 양보하라! 용서하라! 기다리고 참고 견디고 바라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 든 신약의 서신서에서는 이러한 인격적인 이야기와 신앙 속에서 양보하고 기다리는 이야기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칼을 뽑고 휘두르고 모든 권세와 능 력을 마음껏 사용하여 멋있게 신나게 살아가라는 요구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란 깊이 관여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신앙을 갖는 것이 안전하다 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르고 보아야 좋지 알고 보면 골치 아프 고 시끄럽고 은혜 다 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만 담그고 쌀을 씻을 수 있습니까 휘휘 저어야 합니다. 집안이 깨끗해지는 방법은 화장실과 부엌이 없으면 그 집은 더러워질 이유가 없습니다. 안 먹고 안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 나 그것을 삶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단식투쟁하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입니 다.

(요 21:18-19)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 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 르라 하시니 다른 복음서에서는 너희가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고 이기고 승리 하고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권세를 가지고 가라!는 등으로 되어 있지만, 여기 요한 복음 끝에서는 좀 다릅니다. 젊어서는 네가 가고 싶은 데를 갔었지만, 이제는 가고 싶지 않은 데, 가고 싶지 않을 때에도 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누가 시키기 때문입 니까 주님이 그것을 요구하시는 것인 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베드로가 `내가 주를 위하여 열심을 가졌습니다!'라고 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를 향하여 도리어 `사단아!'라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부활 이후 사도권을 회 복받은 베드로는 이제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키는 대로 하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최고의 지혜요, 축복임을 알았기 때문 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하 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권세라는 사실을 믿고 그 앞에 온전히 항복하여 기다리는 자세를 가져라는 것입니다.

<결론> 이제 내 힘으로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 다는 것을 모든 사도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하여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능력과 긍휼로 세상과 교회를 살아갈 때에 하나님 의 영광이 충만히 드러내는 삶을 사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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