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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의 (요 18: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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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이후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사건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안다고 자부할 정도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 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시고 수난과 모욕을 당케 하십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사건을 다시 성경이 이야기 하는대로 바로 추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롬 3:21-26)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 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 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 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 니라 여기에 우리의 구원에 관한 설명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은혜로 구원을 설명하고 있지 않고 `의롭다'는 말로 구원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해는 은혜와 긍휼과 사랑이라는 말들로 설명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아무런 댓가를 요구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따라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물로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요, 큰 은혜요, 긍휼과 자비가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옳은 이야기입니 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합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옳으심이라 합니다. 그것이 어떻 게 옳다고 이갸기 하는가가 오늘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내용의 중심입니다. 여 러분 옳다는 이야기를 하면 보통 무엇을 먼저 생각하십니까 수학적입니다. 모자라 는 것과 넘치는 것을 따지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법으로 따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옳음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다시 롬3:21절을 보시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합니 다. 의로움을 선언하는데 율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율법이 아니다 그러면 원래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하지 않았는데도 옳 다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 옳고 그른 것을 따지자면 법을 따져야 합니다. 법대로 공정하게 재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옳고 그르고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율법 외에 한 의로 자신의 옳으심을 증명하시겠다는 것입니 다. 25절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 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의로우심을 나타내는데 법을 제쳐 놓았습니다. 법을 제쳐 놓았으면 의롭다는 것은 원래 적용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법이 없는데도 옳다는 것이 있습니까 법이 없는 곳에 어떻게 옳다는 것이 있습니까 죄를 지은 자를 벌하지 않는 것은 무법한 것입니다. 불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율법 외에 한 의'를 무엇에 관한 설명으로 설명하고 있느냐 하면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을 따르지 않고도 의 로우심을 나타내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는 예화가 마태복음 20장에 나옵니다.

(마20:1-16)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군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 고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저희에게 이르 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제 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 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저물매 포 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 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 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 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 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 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 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이스라엘 시간은 아침 7시가 1시이고 저녁 6시가 12시가 됩니다. 아침부터 주인이 나가서 포도원에서 일할 일군들을 불렀습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 해서 아침 여섯 시에 나가서 부르고, 아홉시에 나가서 부르고, 열두 시에 나가 부르고, 나중에 저녁 다섯(11시) 시에 나가서도 불러 왔습니다. 그런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러 온 자 들에게 약속하기를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일이 다 끝난 다 음에 주인이 품삯을 주는 것을 줄을 서서 보니까, 오후 다섯시에 와서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은 얼마를 받으리라고 생 각을 했겠습니까 적어도 세배 이상은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자기네들도 똑같이 한 데리온씩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했습니다. 왜 저녁 다섯시에 온 사람도 만원이고 새벽부터 와서 일한 우리도 만원입니까라고 묻자 주인이 내가 너한테 만원으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너한테 덜 준 것이 아니라저 사람에게 더 준 것이다. 더 준 것은 내 권리가 아니냐라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수난과 대속 사역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라는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법대로 처리하지 않기로 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저 녁 다섯 시에 온 일꾼들입니다. 법대로만 하자면 저녁 다섯 시에 온 사람은 백원밖 에 못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와 은혜와 긍휼을 따라 우리도 만 원을 주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얻을 자격이 없습니다. 조건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내십니다. 우리가 구원 을 얻을 조건과 자격과 실력과 능력이 없는데 우리를 구원해낸 것이 무법한 방법이 었느냐 하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 리스도로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내 값을 치런 것이 아니라, 제 삼자로 죄 값을 치르게 한 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재 죄값으로 대속물로 준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요, 하나님의 권리인데 그것이 잘 못입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인격적인 열의와 성의를 다하여 우리를 대접해 주신 것이라는 것을 성경은 더 많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 고 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너는 왜 안 믿는 거지 믿으면 천국가게 되는데 나처럼 믿어봐!'라고 쉽게 말한다는 것은 아직 구원이 뭔지를 다 알지 못하는 자세 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 분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그 사랑과 열심과 자비가 먼저 감격으로 다가와야 구원을 제대로 이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감격이 없으면 우리는 모두가 곧 교만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며, 감격인가 하신 사실을 잘 모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하는 점을 모르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심령의 신자에게서는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고, 평화가 없으며, 온유와 겸손과 양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예수 믿는 사람끼리 그렇 게 기고만장해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목사가 그러니 성도도 그럽니다.

요나서 3장으로 가십시다. 잘 아시는대로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부름을 받아 니느 웨 성으로 가서 저주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가기 싫어 합 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주를 선포하여 경계하게 하시는 것은 회개시키려고 그 러시는 것이지 벌주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 가려고 합니다. 결국,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에야 할 수 없이 갑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하 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불을 내리실 것이다! 그리고는 도망와 버렸는데, 니느웨 사람 들이 정말 회개를 했습니다.

(욘3:10-4:11)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 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 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 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 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 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 떻게 되는 것을 보려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 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 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 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 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 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 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의 주장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벌주시기로 했으면 벌을 주십시오! 벌줄 것을 돌이키게 해서 벌받아 마땅한 것을 벌을 안 내리는 것은 불법입니다! 라는 주 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들의 잘못에서 돌이켜 저들을 회개케 했으면 좋은 일이지, 은혜를 베풀고 사랑을 베풀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불법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법하고 악한 것을 방관하는 것이 불법입니다. 여러분 병 원에 가서 부러진 팔을 자르는 것이 최선입니까 접골해서 다시 살려내는 것이 최선 입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살려내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다스리시며, 우리를 아끼시며, 긍휼로 대접해 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 감추어진 가장 큰 멧시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일에 우리의 이익을 먼저 구하는 자들이기 깨문에 내가 영벌을 받을 자리에 서 영생의 자리오 옮겼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 되겠지만, 그러나 언제나 이같은 은혜와 축복이 하나님께서 율법이 아닌 한 의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말미 암아 이러한 기쁨과 축복이 왔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하 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에 이러한 연결이 없다면 참으로 가난한 신앙이 되고 맙니다.

로마서 4장에서는 이 문제를 이렇게 말합니다.

(롬 4:16-24)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 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아 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 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 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 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 신 이를 믿는 자니라 믿음이라는 것만큼 오해되는 것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참으로 좋은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큰 실 력이나 되는 것처럼 자랑하고 재고 있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혼자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었던 일을 의로 여겨 주셨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 믿음이 좋다 라는 것을 무슨 굉장한 것인양 자 랑하려 한다면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일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그 많큼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 내용이 충분히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광스럽게 만드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무것 도 요구하시지 않고 오직 주님이 가지신 열심과 긍휼과 사랑으로서 다 이루어 주셨 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감격과 감사와 찬송이 있을 따름입니 다. 오늘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클라이막스에 서 항상 나오는 말씀이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돌릴지어다! 이 면류관은 하나님 만이 받으시옵소서! 우리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만 옳으시니이다! 아버지만이 은혜로우시며 사랑이시며 자비가 넘치나이다! 아버지 께서 모든 일들을 다 하셨나이다! 그리고는 우리를 이렇게 존귀하게 대접하셨나이다 할렐루야! 이 영광의 면류관을 다시 당신의 보좌 앞에 던지나이다! 받으소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의로우시다'는 설명 뒤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 롬 3:27-30)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 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 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 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우리에게는 자랑할 데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똑같습니다. 조건이나 자격에 있어 서 차이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이 불법한 일입니까 아닙니다. (롬3:31 )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는니라 도리어 율 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께서 죄인 되었던 우리를 사면하고 용서해 주신 것이 불법이었습니까 아닙 니다. 법은 법대로 지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아 못박아 죽였습니 다. 그런데 여기에 어디 불법한 데가 있습니까 그러나, 거기서 우리가 내놓은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출자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에게 요구한 것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뭐라고요 아무것도 내 놓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렇다면 신자와 불신자와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신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를 라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재판관과 심판관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로 서의 하나님이심을 바로 아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도다, 옳으시도다 라는 말씀 속에는 율법으로 옳고 그 른 것을 따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사 우리를 사랑하 신다는 수준으로 간섭받고 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 님을 부를 때에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이런 의미에서 아직 신앙의 바른 자리에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법적으로는 구원을 받 은 사람이 될지언정 그러나 아직 수준적으로는 감히 신자라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입 니다. 여러분, 부모란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일만 하는 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 습니다. 많은 사랑과 관심과 열정과 희생으로 보살피는 자가 부모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11장에 가면 그러한 의미의 묘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을 향하여 가지신 그 심정을 토로하신 말씀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호 11:1-7)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 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 새긴 우상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 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 었으며 저희 앞에서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 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저희의 성읍 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내 백성이 결 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늘 죄만 짖고 그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하자면 다 없애버리면 됩니다. 멸망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지금 여기에 기록한 바와 같이 법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자녀의 부모같은 심정으로 안타까워 하는 것입니다. 속상해 하시는 것입니다.

(호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 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내고 기적으로 함께 했음에 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세라를 섬기고 바알을 좇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내가 너희를 놓겠느냐 내 마음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하십니다. 그래서 그 불붙는 사랑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 의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수학적인 대차대조표를 들고 찾아 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과 자비와 대접하시는 사랑으로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고자 한다! 이제 말좀 하자, 그리고 이 축 복의 자리에 찾아 오너라! 면서 우리의 심장에 찾아 오시는 그의 피흘린 손길이 있 습니다. 그의 눈물어린 음성이 있다는 것을 놓쳐선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입니다. 이같은 심정이 절절이 베어 있는 말씀이 이사야 1장에 나옵니다.

(사1:2-9)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 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 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 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 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무 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원두밭의 상직막 같이,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사 1:18-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너 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결론>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부패한 족속들 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때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 나 큰 특권인지를 모르고 지내고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감사가 없고 찬송이 없어 집니까 이것은 참으로 놀라야 할 일입니다. 왜 우리 인생에서 기적을 목도하지 못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와 그 사랑에서 떠나 있기 때문 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의 사랑과 간섭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 들이 벌어 지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의 계획과 여러분의 뜻대 로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셨다는 말을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맥이 빠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님께서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야, 너같은 자식 하나만 낳아 길러봐 라! 그러면 이 아비어미의 심정을 그때가서 알게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뭐라면서 여 러분의 자식을 키웁니까 `얘, 앞으로 너 같은 자식 하나만 낳아봐라!' 그렇습니다, 자식은 보모의 심정을 모릅니다. 부모가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자식을 키우는 줄을 그 자식들이 자식을 낳을 때까지 모르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불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닌 것같다는 것일 것입니 다. 진짜 내가 좋아하고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를 적당히 띄어 놓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혹시나 화가 나셔서 훼방이나 놓을까봐서 주일마다 한 번 나오는 것으로 적금 하나 넣고 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부모의 심정을 어렸을 때는 몰랐듯이 어린 신앙으로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성도의 자리에 서 게 된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감사와 찬양과 감격으로 전진해 나갈 있는 자리로 장성 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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