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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되신 하나님 (요 03: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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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입니다. 27절 부터 있는 세례 요한 의 증거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27절부터 30절 까지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를 증거히는 사람에 부과하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 랑이지만 신랑의 친구가 더 좋아하는 법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31-36절 까지는 그리스도와 자신은 전혀 비교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는 하늘에서 오신 분이고 나는 땅에서 난 자이며 그는 하늘에 있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보았고, 만드신 분이시지만 나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면 서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의 비교할 수 없는 차이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한 자기비하나 자기 겸손 이나 겸양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즉, 기독교 신앙, 기독교 진리가 말하 는 것을 인간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없으며, 우리가 상상 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연히라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을 다 루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를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 는 땅에서 난 자이고 성경 곧 기독교 진리는 하늘에서 났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것 을 땅에다 대 놓고 객관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예를들어 하나님께서는 안계신 곳이 없으시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는 객관적인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말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신비로움과 중요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원리들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 요한복 음입니다. 이 요한복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루고 있는 문제는 영생입니다. 이 영 원한 생명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아무리 가르쳐 도 너희는 못 알아 듣는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못 알아 들을 뿐 아니라 관심 조차 도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요한복음을 읽을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 뭔가 안 다음에 읽게 됩니 다.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오해 속에 빠지느냐 하면 '바로 내가 예수를 믿었었노라 '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착각에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순간에 다시 한번 이런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내가 오늘 이 순간 죽는다 하더라도 천국에서 깨어날 것을 확신하느냐는 것과 만 약 확신한다면 그 확신의 근거가 무었이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 근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구원의 확신의 근거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성경 말씀에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서 예수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나는 구원 받을 것을 확신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확신의 근거입니 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인해 깨끗케 되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이것 도 참으로 훌륭한 구원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예수님게서 우리 앞에 오셔서 구원을 선포하시고 제시하셨 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선택하였노라고 말하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표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알고 서 믿는다고 말해야 합니다. 즉, '나는 선택의 능력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본문 31-3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 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 는 이가 없도다.

여기서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제대로 알 아 듣고 이해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하나님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그것을 이해하 고 받아 들이지를 못합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하는 말씀 그대로 죄로 말미암아 이미 알아 볼 수 있는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설득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 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늘 혼동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여 러분이 선택하여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믿으면 그 신앙 생활에는 심각한 문제 가 생겨나고 맙니다. 어떤 문제냐 하면 상황에 따라 구원의 확신에 변동이 생긴다 는 것입니다. 왜냐면 구원을 자신의 선택으로 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이 불분명해 지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혼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가 잘 되지 않을시에는 하나님을 붙잡고 있던 것에 힘이 빠져나가게 되 고 제대로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지에 대하여 스스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집니다 그러니 자연히 확신에 결함이 생깁니다. 이런 상황이 심심챦게 일어나므로 심히 피 곤한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과오는 결국 인간이란 존재 스스로는 도무지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소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데서 기인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마는 하나님에 대하여 다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예로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다 하는 자유 의지가 도대체 어느만큼 조화가 되는 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인내 하시며 자비를 베푸 시는 그 하나님께서 어느 경계선까지 인내와 자비를 베푸시는지 우리는 그 범위를 잘 모릅니다. 또한, 공의와 심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공의와 심판의 범위가 어 느 정도 인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시편 90:11절에 모세의 기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 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 이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우신 분이신지, 죄에 대하여 얼마만큼 화내시는 분이신 지 우리는 사실 그 분량을 잘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의 한 없으신 사랑과 긍휼이 범벅되어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었은 참고 무었은 용서하지 않으시는 지에 대하여 분명한 경계선을 그어 놓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일이 생길때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선택하여 믿었다는 것이 혼동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3장 사이에서 예수님을 내가 알아 보고 믿었다고 생각하는 자들 에게 혼동을 가져다 주는 말씀이 반복하여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요1:10-11절에서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 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 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유대인들은 예수님 을 영접지 않은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 나는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영접하겠노라고 다짐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기뻐하고 감격합니다. 다시말해 나의 이 현명 한 선택에 대하여 안도의 감격이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13절에서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 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므로 앞의 생각을 뒤 엎어 놓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선택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요3:16절에 이르러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함이라고 하는 말 씀에서 구원의 선택이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결단인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자신의 믿음을 다시 가다듬습니다.

그러나, 다시 요3:33절에 이르면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여기서 하나님 의 증거를 선택했다는 것이 아니라 받는 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하여 인쳤느니라 즉,'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치시는 사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우리의 어두운 영안을 밝히 열어 주셔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해 주시고는 우리가 마음과 입 으로 '믿습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인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원은 하나 님의 절대 완전한 은혜요, 100%자비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의 지의 결단이 기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구원을 당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러한 의미에서 신앙인과 불신앙인의 차이점으로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따지는 것보다 더 깊은 시금석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옳으냐 세상이 옳으냐 하는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는 이 신앙고백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고 이것만큼 훌륭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분명한 경험이요, 자랑스러운 경험이요, 어 디에 꺼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 앞에서 칭반받을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느냐 안 믿느냐의 결단의 싸움으로 우리가 남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결단은 하나님이 우리에 게 보여주신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피할 수 없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들어가서 아무 저항없이 일어나는 믿음의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의 인간적인 결단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의 결과라고 보아야 정확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결단에 집착하는 것 보다 결단의 사건을 당한 후의 삶에 대하여 더 큰 관심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기를 더 원하시느냐 하는 것 을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믿음의 길이란 마음 으로 하나님을 옳 다고 보느냐 세상을 옳다고 보느냐 하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을 옳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옳으시냐 세상이 옳으냐의 싸움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눈을 떠서 하나님을 보고서도 세상으로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아직 도 삶을 세상에 정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면목없는 기독교인이 되고 부 끄럽게 사는 신앙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에 대하여 척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 다.

이같은 오해는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여 믿었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 자주 일어 나는 오해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가 선택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제시한 것들을 읽고 관찰하고 조사하고 이해하여 선택하였다는 망 상을 가지게 됩니다. 이래서 어느 순간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생기게 되면 '나는 아직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생 각 할 수 밖에 없어지고 마는 스스로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살펴서 이해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 자들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창조 주이시며, 우리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시는 분이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내가 관찰하고 노력하여서가 아닙니다.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나에게 이 미 일어나 마침내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굴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때에는 이해가 안되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눈을 뜬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고 알 지만 하나님을 모두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붙잡기는 했지만 그 가 먼저 우리를 붙잡아 그의 앞에 앉히시고 어두워 못보는 영안을 열어 주신 것입 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고 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며 그가 옳다는 것과 참되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는 이것 만큼은 분명히 압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번도 하나님의 참되시며 옳으시다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그렇다고 선포할 뿐이십니다.

창1:1을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주 당당히 선포만할 뿐입니다. 설명은 없습니다.

지난 몇 천년 동안을 지나면서 과학자들이 가장 심하게 하나님을 모독하고 희롱하 였던 것이 무었이었습니까 그것은 '뭐 하나님이 천지를 마들었다고 천만의 말씀 모두가 저절로 생겨난 것이야! 달은 지구에서 원심력에 의해서 떨어져 나갔고 그것 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태평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달에서 우주선이 싣고온 흙의 토질을 검사해 보니까 지구의 토질과는 전 혀 다르다는 것이 이미 증명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증명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 나님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시면서도 온갖 우수마 발이 같은 존재들이 덤벼들고 헐뜯어대는 데도 일언 반구 대꾸도 없으시고 묵묵히 당신의 일만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무었을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나 내용의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 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영원하시다, 공의로우시다, 오래 참으신다, 등등의 말씀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셨으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설명하는 예가 없습니다.

성경을 가만히 보십시오. 죄는 왜 생겼는가 왜 선악과를 만드셨는가 왜 따먹을 것을 그냥 놔 두셨는가 사탄은 어디서 왔는가 등에 대해서 설명이 없습니다. 다 만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우리를 구 원하고 싶어하시며, 우리를 형벌에 처하게 하시는 것이 본심이 아니시라는 속성에 관한 설명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데 도 받아들이고 믿는것을 가리켜 맹종이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이것은 맹종이 아닙니다. 맹종이란 내용도 대상도 없이 스스로에 최면을 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비록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 다 설명되지 않을지언정 그 내용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압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시는 지를 우리에게 납득 시고자 기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자 하시 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그는 진실합니다. 그는 옳으십니다. 우리의 항복 을 받으실 만한 분이십니다. 그는 편협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으십니다. 윽박지르지 않으십니다. 그는 인격과 인격적인 차원에서 우리를 항복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 앞에서 그가 한 일과 하실 일과 계획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다는 알 수 없지만 그 분의 말씀이라면 무었이라도 하겠다는 기쁜 항 복과 순종으로 따를 수 있는 각오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시는 인격적 차원에서 항복되어 가 는 길을 걷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나는 항복하겠다' 이것은 신앙의 성 장과 그 성장을 위한 기초로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얼마나 도취되고 항복되셨습니까 이것이 신앙의 성장과 성숙 의 척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방법과 능력, 이런 것들은 모두 이차 삼차 적인 문제입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 그분에게 매료되고 항복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기적의 종교입니다.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캄캄한 소경이었던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영안을 열어주시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보여주시고 나아가 우리를 영원토록 돌보아 주신 다는 말씀 앞에 감격하며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고백 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이 자신의 업적이나 확인 하는 일들로 우리를 치장시키려 하고 있습니까 또한, 이같은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우리를 곁길로 가 게 하는지 모릅니다. 여기에는 두가지의 곁길이 생겨납니다.

첫번째 곁길은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였다는 오해 때문에 생기는 곁길입니다. 이같 은 생각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해가 되지 않을 때에는 믿는 것을 잠시 보류 하는 시험의 곁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두번째 곁길도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였다는 것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 은 선택한 자가 선택하신 분과 대등한 위치에 보라는 듯이 올라서고 싶은 충동으 로서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일들로 선택한 자로서의 면목을 세우고 싶은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얼마나 부질없는 시도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 31절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위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땅에서 난 우리 들이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옳으시고 참되시다는 것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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