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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요 09: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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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 가지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여러분은 스스로 생각하기 에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행복하다면 어느 정도로 행복하며, 불행하다면 어느 정도로 불행합니까 또한 여러분은 스스로를 쓸모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전혀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본문은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아무리 불행해도 이사람 만큼 불행할 수 없고,아무리 자기를 쓸모없다고 생각해도 이사람 만 큼 철저하게 무용지물(무용지물)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흔히 말하는 화려함이라든가 아름다움이라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고도 이 아름다움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입니다.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40년 동안을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 책임이 누구 한테 있습니까 누구를 탓해야 합니까 적어도 본인의 잘못은 아닙니다.

스스로는 아무런 책임도 잘못도 없이 평생토록 이 고생을 해야 합니다.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왜 나만 장님이어야 하고 나만 고생하고 나만 불 행해야 하는지,도무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가지면 무엇하고 많으면 무엇합니까 잘살고 출세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뭇사 람이 추구하는 욕망과 꿈이 이사람한테는 다 쓸데없습니다.누군가가 던져주 고 가는 동전 한닢,그 선행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철학자 니이체는 말하기를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그렇습니다. 살 이유가 있으면 무슨 수로든지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 니다. 고통이라고 하는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순간 순간 당하는 멸시가 전부입니다.

과거를 추억할 거리도 없으려니와 앞으로 어떤 일이 전개될 지,미래에 대 한 보장이나 바램도 없습니다.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습니다.더욱 기가 막 힌 것은 하루하루의 삶에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람이라는 것이 없습니 다.철저하게 무의미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불행하고, 철저 하게 무가치한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동정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인 논쟁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사람 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우리가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이 다만 추상적인 토론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 런 사람을 내셨을까 이사람이 무엇때문에 태어났을까이렇게 된 불행의 원 흉(원흉)이 어디에 있을까 이런 문제로 시비를 벌이다가 겨우 한다는 소리 가 전생에 죄가 많았나보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질병관은 죄 때문에 병이 생긴다고 생각했습니다.그 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두고 그 죄가 누구의 죄인가 부모 죄인 가, 본인, 혹은 사회의 죄인가를 따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이사람이 안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들이 내 불행을 놓고 이러쿵 저러쿵 추상적인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 을 수 없는 모욕입니까 누구 죄때문이냐고요부모 죄냐, 본인 죄냐 이 러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이사람한테는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습니까 만약 입을 열어 말한다면 그에게도 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당신 들의 조상이 깨끗해서 눈뜨고 나왔소' '당신들이 나보다 의로운 게 도대체 뭐요' 그러나 본문의 소경은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전혀 아무 말이 없습니 다.왜입니까억울한소리를 워낙 많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칭찬을 하든 흉 을 보든,자기 손에 떨어지는 동전 몇닢 밖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 서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이 불행한 사람 앞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누군가가 말했어야 합니다. '누 구 죄냐'를 따지기 전에 꼭 해야 할 말 본문에는 그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을까요' 왜 이 말이 없습니까 '주님께서 이 사람 눈을 뜨게 해주실 수 없을까요' 아니면 '이 처럼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겠습니까 어떻 게 도와주면 좋겠습니까' 한마디 할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말은 한마디도 없이 엉뚱한 시비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말하기를 우리는 남의 고난을 볼 때에 다음 세 가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고 했습니다. 첫째,그 고난이 죄 때문이라고 정죄한 다는 것입니다.불행과 죄를 직결시켜버립니다. 내 문제에 대해서는 의(의) 때문이라 하고,남의 불행에 대해서는 죄때문이라고 합니다. 나는 의를 위하 여 고생한다고 하고,남이 고생할 때는 벌받은 것이라고 죄 문제로 돌려버립 니다.

둘째,남의 고난에 대해서 이해심이 없습니다.이해해보려고 하거나 관대한 눈으로 보려 하지 않고 엄격하게 심판해버린다는 것입니다.'저 사람이 지금 얼마나 어려울까,얼마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까'하고 그 깊은 고통을 이 해해주는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세째,자기를 예외시합니다.나와 저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생각하 고,상대방을 쉽게 정죄하고 심판합니다.

이러한 실수가 오늘의 본문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신비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라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이 괴로워할 때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라고 했습니 다.

여러분, 고통이라고 해서 다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재산을 잃었다고 해서 믿음까지 잃는 것이 아니요,건강을 잃었다고 인생까지 잃는 것은 아닙 니다.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마다 '이것이 무엇 때문이다'라고만 생각하기 일쑤입니다.그 일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며 얻는 것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고통이 고통되는 까닭은 철저한 상실에 있습니다.물질을 잃어버렸기 때문 에 잃은 것이 아니요,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입니다. 용기를 잃 어버렸기 때문에 손해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난 자체에 대해서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하고 계시는가를 살펴보 십시다.예수님께서 이 사건 앞에 취하신 태도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 니다.

먼저,예수님은 이 문제를 철학적 난제가 아닌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십니 다.

이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가,얼마나 아픈가,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이런 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죄 문제냐 아니냐,무엇 때문이냐,누구 때문이 냐 이렇게 분석해서 생각할 문제도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사역,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 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다.하나님의 뜻,하나님의 경륜을 생 각하십니다.철저하게 쓸모없는 존재와도 같은 이 소경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보이는 현상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일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신앙고백 가운데서 늘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1장 25절에 보면,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 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습니 다.

사람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으나 하나님의 일이 있고, 사람들 눈에는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께는 쓸모가 있으며,사람들의 판단으 로는 실패한 것으로 여겨지나 하나님은 그 실패를 통하여 귀중한 일을 이루 어가신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제 나면서부터 소경된,이 철저하게 불행한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 의 하시고자 하는 일,개별적으로 경륜하시는 바가 있다고 한다면 두눈과 두 다리가 멀쩡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얼마나 더 많겠습 니까 그래도 불행합니까 그래도 쓸모가 없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불행이 아닙니다. 고통은 있겠습니다마는 하나님의 경륜 밖에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 불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우리를 통 해서,오늘 우리가 당하는 현실을 통하여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사 람이 볼 때는 실패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성공입니다.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 과거를 생각했으나 예수님은 미래적 의미를 생각 하십니다.심지어 미래적 원인을 생각합니다.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 람을 놓고 그의 과거가 무엇이냐,조상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 묻습니다. 그 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곧 미래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 다.

여러분,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십시다.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이 원 인이었고,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아무리 두고두고 시비해보아야 이 추 상적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평생을 두고 파헤친들 더욱더 오리무 중(오리무중)이요, 하나님밖에 누가 알겠습니까이제 쓸데없는 변론을 버립 시다.그리고 미래적인 의미를 생각하십시다.미래적인 하나님의 경륜과 선교 적 의미, 그 구속사적인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토론을 중지시키십니다.제자들이 '누구 죄입니까 본인 죄입니 까 부모 죄입니까'물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도저도 아니라고 쟁론을 거 부하셨습니다.부정적인 이야기를 그만두게 하시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 세로 이 문제를 대하십니다.

그리고 이 고난을 창조적인 기회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만드십니다. 높은 차원의 세계로 옮겨 놓으십니다.

여러분, 고난은 기회입니다. 위기가 바로 창조의 기회요, 실패가 새로운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회는 성공으로 오기보다 실패로 변장해서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아시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고난당하는 분을 보십니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스스로 고난 당하고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특별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물질이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물질적 풍요가 곧 삶의 풍 요는 아닙니다.여러분,생각해보십시오.가난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 기회입 니까 그것은 봉사의 기회요,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요,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난은 기회입니다.고난이 봉사의 기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 니다. 가진 것도 기회요 못 가진 것도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모든 형편, 모든 상황이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 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눈 앞에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기회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일터가 있고,새로운 일을 창조하는 능 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4절에 예수님은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라고 하시며 일의 필요성을 말씀합니다. 일을 하되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특수성 과 밤이 오리니 속히 해야 한다는 시급성을 말씀합니다.

아무리 불행한 여건이라도 이 소경이 예수님을 만났기에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만남의 관계 존재와의 만남 속에서 창조의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만나는 순간, 주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 말씀을 읽을 때마다 늘 감격합니다. 이 소경은 참 위대 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시골에서 김을 매다가 벌레에 물리거나 하면 어른들이 가르쳐주기를 물린 데다가 침을 바르고 흙으로 문지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해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하신 방법이 어쩌면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침을 뱉아서 흙을 이겨 가지고 이것을 눈에다 바르십니다. 바르시고는 이제 실로 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벌레 물렸을 때에나 쓰는 아주 평범한 방법으로 침을 뱉어 흙을 이겨서 눈에 발랐습니다.저는 이 소경이 가만히 있는 것만도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미급한 저같았으면 소리라도 질렀을 것입니다.여보시오, 장님이라고 무시하는 거요 장님 눈은 눈도 아닌 줄로 아오 먼저 들어가면 아프단 말이오.

그러나 이 사람은 가만히 있습니다. 이 하나만으로도 그는 훌륭한 사람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이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 라하십니다.참으로 어렵습니다. 평범하기도 하고 불합리하기도 합니다. 그 러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은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눈먼 채로 순종한 것입니다. 눈에 흙을 바른 채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여 십리 되는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후속치료입니다. 지금 당장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치료되는 것입니다.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하셨지만 만일에라도 '오늘 일진이 사납군'하고 안갔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이 사람은 눈을 뜨지 못했을 것입니 다.실로암에 가서 저의 손으로 물을 떠올려 눈을 씻는 그 과정까지의 순종 이 있어야 합니다.믿음이야 있건 없건,확신이야 있건 없건,신학적 지식이야 어떠하건 상관없습니다.오로지 순종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저는 절대적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야 물을 것 도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라고 했을 뿐이지 그리 하면 눈을 뜨리라라는 말씀도 없습니다. 틀림없이 눈을 뜨게 되리라,아 멘.이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단지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라 고만 하십니다.

이제 다시 소급해서 생각해 보십시다.소경으로 난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 아와 내 눈좀 고쳐주세요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 일도 없습니 다. 제자들과 지나가시다가 보고 대화를 하셨을 뿐입니다.예수님께서 붙드 시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씻으라 하셨을 뿐입니다.상황이 이렇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순종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부터도 쉽게 순종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사람, 위대한 사람입니다.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순종합니다.어찌 생각하면 '밑져야 본전이지 뭐. 믿 고 따라 해보자'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렇게 하기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참으로 어렵습니다. 실로암까지 가서 저의 손으로 물을 떠올 려 씻는 동안 눈을 뜨게 되었다,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이 순종,이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의심하거나 불순종 할 때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고 말씀이 있을 때에 묵묵히 순종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드러나는 큰 역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만나시는 순간에 말씀하십니다. 믿으라.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바벧론으로 포로되어 갈 때에 무슨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쇠사슬에 묶여서 일생동안 노예로 살다가 죽을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대로 삽니다.그래서 결국에는 바벧론을정신적으로 점령 하고 메대와 바사를 완전히 정복하는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지 않 습니까 모세가 바로의 궁전에서 나와 미디안 광야로 쫓겨날 때에 무슨 희망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에 지나간 80년 세월이 새로운 의 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 앞으로 큰 역사를 이루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가 가진 기회, 내가 가진 현실,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이 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의미만 알면, 그리고 믿고 순종하면, 또한 그 리스도와 만남의 관계를 이루는 순간에 창조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 니다.

여러분, 이유를 아는 고통을 당하십니까 회개하십시다.이유를 모르는 많 은 실패를 당하셨습니까 이제 묵묵히 믿음으로 기다립시다.

지금 당하는 역경이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오십시다.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관계, 존재와의 바른 만 남이 있는 순간,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유가 있습니다.하나님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도 쉼 없 이,실패 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 주님 말씀에 행동으로 깨끗이 순종하시기를 주님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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