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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격려합시다 (히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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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미국의 한 잡지에 할머니 한 분이 이런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저에게 전화를 걸어 주시는 분에게는 1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전화를 걸어 주는 사람이 없었으면 고독한 노인이 그런 광고를 냈겠습니까 영국의 리버풀 항구에서 정기 여객선이 출항하려는데 어떤 신사 한 사람이 배에 오르다 말고 갑자기 뒤로 방향을 돌려 선착장으로 뛰어내려갔습니다.

배에 오른 많은 사람들이 다 사랑하는 가족들, 친구들의 배웅을 받는데 이 신사는 자신을 환송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못내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선착장에서 물끄러미 배를 구경하고 있던 어린 소년 한 명을 찾아내 었습니다. 신사는 소년에게 동전을 한 웅큼 쥐어 주더니 자신이 배를 타고 떠날 때 하얀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고독한 모습입니다. 현대인들 은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고독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삶을 나 눌 수 있는 진정한 이웃이 없어서 고독을 느낍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 라는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문화 인류 학자는 현대인 의 비극을 가리켜 말하기를 군중은 있어도 공동체는 없다. 그것이 현대의 비극이다라고 했습니다. 여럿이 모여 있다고 해서 저절로 공동체가 형성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공동체란 삶을 같이 나누고 인생을 나누고 분 명한 목표를 향해 함께 행진할 수 있는 집단을 말합니다.

  격려 공동체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당 시 백만 이상의 무리가 함께 이동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거의 2 백만 명 되는 백성들이 단체로 광야 생활을 했다고도 합니다. 그들에게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서로를 깊이 사귀지 못하고 알 지 못한 채 주일날 만나 인사만 나누고 흩어지면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지 만, 함께 살면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문제로 등장합니다.

제가 성지 순례 여행단을 두 번 인도해 보았는데 그때 모세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백만이 아니라 40 명을 인도하면서도 쩔쩔맸는 데, 모세와 백성들의 어려움은 말로 할 수 없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렇게 고생하면서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삶을 나누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같은 목표를 향해 행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루의 여행이 끝나면 장막을 중심으로 열두 지파가 진을 치고 모였습니다.

장막은 이동식 천막이었습니다. 장막과 함께 언약궤를 짊어지고 광야를 행 진하다 어느 한 곳에 머물게 되면 장막을 세웁니다. 장막을 설치해 놓고 동 서남북에 세 지파씩 질서를 지켜 자리를 잡습니다.

사막의 밤은 매우 춥습니다. 그들은 장막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하루 이틀, 혹은 일주일 동 안 행진하는 가운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는지, 서로간에 부딪치고 깨지고 상처받은 일은 없었는지 고백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제사장이 그 문제를 가지고 장막 속에 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제사장이 장막으로 들 어가게 되면 그 장막 주위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침묵 속에 빠집 니다. 특별히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아뢸 때 제사 장이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나올지 궁금해 조바심 치면서 기다립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고 나올 때 대체적으로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갖고 나옵니다.

첫째 메시지 / 죄의 용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여 앉아서 그들의 죄를 고백합니다. 제사장들이 그 죄를 짊어지고 성소로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로 들어가 언약궤 앞 에서 하나님께 그들의 범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 십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둘째 메시지 / 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의 메시지를 통해 행진에 필요한 힘을 얻습니다.

대제사장은 자주 이스라엘 공동체가 연합해야 할 필요성과 사랑의 중요성을 하나님 말씀을 대언함으로써 전달했습니다.

셋째 메시지 / 목표 제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향을 향해 계속해서 전진해 나아가는 도 상에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일의 목표, 다음에 할 일, 미래의 비전을 말씀으로 전달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 자신의 문제를 극복해 나가도록 돕습니다. 2 백만 명이 행진하는 가운데 얼마나 많은 문제가 일어 났겠습니까 그들은 이 어려움을 장막 중심의 교제로 극복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를 부여 잡고 멀고 험난한 광야길을 헤쳐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별명을 붙인다면 격려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을 중심으로 모여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는 공동체 회원들간의 이해 와 협조가 필요합니다. 대표가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해답을 받 아 올 때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걸어가야 할 진정한 목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그 곳에 도착하기까지 함께하는 격려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격려 공공체 역할을 하 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일주일 동안 많은 문제에 시달립니다. 가족 들과의 관계에서, 직장에서 상사와 부하 직원간에, 심지어는 교회에서 봉사 하다가 교우들끼리도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이 우리들을 용서하시는 사실을 체험합니다. 우리들의 그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서로 가 서로를 사랑해야 할 진정한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목표를 향해서 다시 달려갈 수 있는 삶의 에너지를 얻습니다. 이런 일이 정말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당신이 섬기는 교 회는 성도들이 서로를 얼마나 격려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 운 공동체로 자라가고 있습니까 당신의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 보십시오. 어떻게 지냈는지, 힘들지는 않은 지, 지도해 줄 일은 없는지 알아보십시오. 우리가 격려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 출발점은 다름 아닌 모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격려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잘 모여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지속적으로 모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중심으 로 모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신앙 공동체를 만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그렇게 강력한 힘을 나타낼 수 있었던 비결도 그들이 잘 모인 데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언제 모였습니까 안식 후 첫날, 일주일에 한 번 모였습니까 사도행전 2 장에 보면 초대 교회가 얼마나 자주 모였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46 절).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모였습니다. 먹을 것을 함께 나누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전도에 힘썼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날마다 모이는 것이 번거롭고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 나 모이는 데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확실합니다. 일주일에 주일날 한 번 모이는 것은 성도가 서로 격려하기에 너무 부족한 횟수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의 격려 히브리서 10 장 25 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아마 히브리서가 기록되던 무렵의 초대 교회는 뜨거운 열기가, 날마다 모 이던 열성이 조금씩 식어 가는 위기를 맞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권면하기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주님 오실 때가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에 힘쓰라고 했습니 다.

현대 교회는 어떻습니까 주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 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이기를 폐하고 있습니까 우리 시대에는 주일 아침 예배에만 달랑 나오고 마는 신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교회는 아예 오후 예배를 없애기도 하여 점점 모이기를 폐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이라도 더 말씀을 나누고 격려하고 같이 찬양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함께 모여 있는 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십니까 모이지 아니하고 신 앙이 성장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모이지 아니하고 사랑을 배우는 사람이 있 습니까 모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 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임을 통해서 만남의 사건을 체험해야 합니다. 단순히 모이기 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임 가운데서 만남의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일 때마다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두세 사람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약속하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장막 주위에 모였던 이스 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왜 그들이 장막을 중심으로 모였습니까 그 장막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장막에는 주의 영광이 거하고 계십 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특별히 장막 안의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고 그 안에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언약궤 위에 자신의 임 재를 나타내셨습니다.

장막 주위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여야 합 니다. 그래야 우리의 만남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되실 때 진정한 모임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 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는 모임이 우리가 추구 해야 할 모임입니다.

둘째로, 형제들을 만나야 합니다.

히브리서 10 장 19 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 었나니.

구약 시대에는 아무나 장막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장막에는 제사장들만 출입할 수 있었고 특히 지성소 안에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 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던 순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안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 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고 돌아가시던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 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19,20 절)고 했습니다. 이제 예수님 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얻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는 대제사장만, 그것도 1 년에 한 번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직접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특 권입니다.

우리는 모임에서 하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는 주님의 자녀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 자매들입니 다. 우리는 이들을 만나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피차 격려를 아 끼지 않았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목적지를 향해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을 얻었던 것은 서로 격 려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서로 격려하여 힘을 얻을 수 있어 야 합니다.

제가 시계추 신드롬이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시계추는 한 쪽 끝에서 반대 쪽 끝으로 왔다갔다 합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사 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맡은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든 제직으로 임명을 받으면 열심히 일할 의욕을 보입니다.

그러다가 작은 어려움에 몇 번 부딪치다 보면 아예 교회 일에 흥미를 잃고 맙니다. 이것이 마치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으면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싫어합니다. 주일날도 사람들을 피해 몰래 예배만 드리고 갑니다. 그러면 위로와 격려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교제를 평생 경험하지 못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 역(ministry)이 없습니다. 사역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겁니다. 전도 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말 씀으로 한 사람을 세워 주는 것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입니다. 사람 을 싫어하고 사람을 피하면 사역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문 제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피차에 사랑하는 것을 연습 해야 합니다. 격려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격려는 모임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는 모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형제 자매를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만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격려의 두 가지 의미를 살펴봅시다.

첫째로, 불러서 곁에 있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말하는데 부름을 받아 곁에 서 계신 분이 성령님입니다. 어떤 영어 성경에서는 보혜사 성령님을 comforter라고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곁에 서서 위로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분이 성령 님입니다. 격려가 성령님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서로를 자극한다, 혹은 서로를 다듬는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서에 쓰인 격려는 이와 같은 의미로 보면 맞습니다. 격려하려면 우 선 같이 있어야 합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 억울함을 당한 사람, 마음 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 같이 있어 주는 것이 격려의 시작입니다. 거창 한 말을 해야 격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옆에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격려가 될 수 있습니다. 고통당한 사람에게 가서 공연히 그 고통의 의미를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잘못하면 욥의 친구처럼 될 수 있습니 다. 위로하러 갔다가 오히려 더 상처를 주고 오는 것이지요. 단순히 같이 있어 주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간 격려는 같이 있어 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자극할 줄 아 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의 자극, 서로가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 한 격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일 때마다 어떤 격려를 주고 받아야 하겠습니까 히브리 서 10 장 22-24 절 말씀에 세 가지 중요한 격려의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 / 믿음 우리가 마음에 부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22 절).

우리가 진실한 마음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갖도록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로 주님께 나아가도록 격려합시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온전한 믿음으로 진정한 믿음 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나아가도록 피차 믿음을 격려합시다.

둘째 / 소망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 게 잡아(23 절).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주께서 약속하신 수많은 언약을 보게 됩니다. 그런 데 삶을 살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그 소망이 자꾸 흔들립니다. 이럴 때 흔들 리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틀림없이 수행하십니 다. 저 영원한 미래의 기업에 대한 소망을 단단히 붙잡읍시다. 우리의 미래 에 대해 주께서 약속하신 바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맙시다.

소망을 격려하십시오. 주님이 좋은 일을 준비하셨음을 믿고 힘내라고 용기 를 불어넣어 줍시다. 모든 일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실 것을 확실히 믿게 합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셋째 / 사랑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24 절).

왜 사랑에 선행이 따라옵니까 선행은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행동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행을 사랑 안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히브리서 10 장에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보배로운 덕이 강조되 어 있는 셈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우리가 만날 때마다 격 려해야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격려해야 하는지 그 본보기로 격려의 삶을 산 두 사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 격려의 가장 좋은 본보기는 누구이겠습니까 단연 예수님이시지요. 요한복 음 13 장을 보십시오. 요한복음 13 장에는 가룟 유다가 결정적으로 예수님 을 배반하기로 작정한 장면이 나옵니다. 주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리라(21 절)고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매우 우울해졌습니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선생님을 배신하다니 하고 생각하며 마음 속으로 슬픔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주님 자신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주님은 사랑 하는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팔리워 박해와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셔야 합니다. 제자들도 주님도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 절).

주님은 사랑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사람이 배신을 당하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현상입니다. 한번 상처를 받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에게 상처를 받고 배신을 당하는 아픔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 다. 사랑의 격려입니다.

14 장 1 절에 주님의 메시지가 계속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인간 관계에 상처가 생기면 사람들을 믿지 못하여 불신감이 팽배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 다. 믿음을 격려하셨습니다.

14 장 3 절 말씀도 보십시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 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곁을 떠날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 이 자신들 곁을 떠나신다는 사실에 몹시 가슴 아프고 괴로웠습니다. 이렇게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너희 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어떤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그들은 주님이 지금은 우리를 떠나시지만 장 래에는 우리가 주님 곁에 머물겠구나 하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주님과 다 시 만날 것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소망의 격려를 하셨기 때문입니 다.

우리 주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만날 때마다 주님의 본을 받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격려를 해야 하겠습니다.

 2.사도 바울 격려자로 유명한 또 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 장 11 절 말씀을 봅시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여기서 권면하라는 격려하라로 바꾸어 써도 무방합니다. 바울이 피차에 격려하라고 했는데, 그가 원하는 격려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데살로니가전서 2 장 2 절을 보십시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 라.

바울은 온갖 고초를 당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이 복음을 신뢰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을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 장 9,10 절을 읽어 봅시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 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 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더 많이 사랑할 것을 격려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정욕을 경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 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4:3,4).

오늘 우리 시대에는 정욕과 사랑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는 정욕을 경계하라고 말합니다. 순결한 사랑을 배우십시오.

우리는 정욕을 경계하고 진실로 순결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라고 하니까 그 사랑을 세속적인 사랑으로, 세상적인 사랑으로 잘못 이해해서 종종 교회 안에서도 성적인 타락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 다. 순수한 사랑, 순결한 사랑을 격려하십시오. 정욕을 버리십시오. 순결한 그리스도 안에서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서 진실하고 순결한 사랑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믿음과 사랑을 격려한 내용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소망의 말씀을 찾 아봅시다.

4 장 13 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 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 말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자는 자들, 즉 예수 믿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 까 세상을 떠난 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사장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죽었던 성도들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 람들을 다시 만날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는 날 주님을 신뢰했던 사람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 리는 이 빛나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떠나 보낸 슬픔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소망의 격려입니다.

우리는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격려가 메말랐음을 실 감합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위로와 격려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 가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남을 비판하는 일은 쉽지만 진정 이웃을 격려하 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비판하고 책망하는 자보다 격려하는 자로서 살아가야겠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본을 받아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격려자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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