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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에서 희망으로 (창 0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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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믿고 의지해 왔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사랑하던 아내를 배 신하고 떠나간다면, 그 아내는 어떤 심정이 되겠습니까? 애지중지 하며 기른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비뚤어진 인생길을 걷는 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건강하게 지내던 당신이 갑자기 암이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절망에 빠져 헤어나지 못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절망이 있다면 그것은 내일 은 없다라는 선언일 것입니다. 6.25 사변이 한창 진행 중일 때 미군 군목이 참호를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군목이 한 흑인 병사에게 다가가 기도 제목을 묻자 그 병사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본문은 태초의 인간이 절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은 사단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 게 하나님이 되기는커녕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 고 반항한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완전히 버릴 것 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 말씀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때부터 인간 세상에 절망이 존재하게 됩니다.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

희망을 포기한 채 절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 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태초의 인간과 똑같 은 모습들이 20세기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다음 세 가지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첫째/두려움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이 표현은 인간이 느낀 절망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치감이 뒤섞인 두려움입니다. 한 단어로 가장 적합한 표현이 바로 죄 책감입니다.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피할 길이 없음을 깨달은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은 단순히 위 기 상황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죽을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두려움입니다. 인 간의 실존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기까지 이 두려움은 절망의 한 모습입니다.

둘째/도피 8절과 10절 하반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피하고 있 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 에 숨은지라…두러워하여 숨었나이다.

그들은 두려움의 원인이 자기들의 죄 때문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들은 이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지를 몰랐습니다.

결국 그들은 도피라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도피는 적절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내가 처한 삶의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부딪치는 것입니다.

셋째/책임 전가 책임 전가 역시 도피의 또다른 형태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내 책임입니다 하는 말은 문제 해결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왜 내 책임이야? 당신 책임이지 하면 문제는 더욱 어려워집니 다.

본문에 보면, 아담은 그 아내에게 자기 책임을 전가합니다. 여자 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아담은 은근히 하나님도 비난하고 있습니다. 여자를 주지 않았다면 죄짓지 않았을 것이라는 변명입니다. 우리 옛말에 잘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한 술 더 떠서 하나님을 탓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곤란이나 어려움을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3절 말씀은 여자가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내용입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을 비난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종종 사단을 핑계 삼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자백할 때 나는 한 순간 마귀에게 속았 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점은 인간이 사단 의 미혹함에 동조하지 않는 한, 사단은 절대로 인간을 미혹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 책임입니다라는 고백 없이는 진정한 문제 해결이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좌절과 실 패를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는 모습에서 인류의 절망을 발견합니다.

이런 원죄의 흔적들은 결코 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의 현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아담과 그 아내처럼 책임 전가와 도피와 죄책감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있는 세상 ^ 창세기 3장은 결코 절망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이런 절망의 흔적들을 발견하면서 두려움과 도피와 책임 전가 행위를 희망 없는 인류의 모습이라고 결론 내 립니다. 그리고 인생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 고 체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 이 희망은 인간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절망에 빠져 있는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죄 지은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좌절과 절망을 안고 있는 인류에 게 새 희망을 주십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 느냐.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절망에 빠진 인간은 하나 님 도와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존심은 절 망 가운데서도 침묵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 이상 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고,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먼저 다가오십니다. 이것이 희망이고 복음의 시 작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모습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 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8,9절).

두 가지를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급하게 달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천천히 에덴 동산 을 거닐면서 아담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이른 새벽에 아담의 잠을 깨우지도 않으시고 뜨거 운 한낮에 부르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여유가 있는 날이 서늘 할 무렵에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를 찾아오셨을 뿐만 아 니라 인간에게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약속 때문에 인간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약속은 바로 3장 15절 말씀입니다. 어떤 학자는 창세기 3장 15절을 「 최초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사단의 머 리를 상하게 한다는 예언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죄에 빠지도록 유 혹하는 사단을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 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십니다. 그분은 희망의 주(主), 소망의 주님입니다. 그분은 사단의 지배에서 인간을 해 방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용서와 자유와 영원한 삶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그러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 라고 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뱀으로 상징된 사단이 여자의 후손에 게도 타격을 가한다는 말씀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사단도 그리스도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입니다. 발꿈치 를 상하게 하는 것은 일부분에 해당하는 타격입니다. 이에 비해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는 완벽하게 사단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단은 승리를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사단 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이 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오히려 사단을 패배시키는 승리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죄 값을 지불하 시고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간이 죄 사함 얻을 수 있 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단의 최후의 패배는 장사한 지 사흘 만에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 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인 간에게 참 소망을 갖게 하는 구원의 말씀입니다. 비록 인간은 하 나님을 거역하여 저주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받아 영 원한 생명까지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죄인들에게는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기사를 한 편 소개할까 합니다. 아서 고든이라는 작가의 이야기인데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무력증 에 빠진 그는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작가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는 자살을 할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의사이면서 상담자인 친 구를 찾아갔습니다. 그 친구에게 자신의 사정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네.

한참 그의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어렸을 때 제일 하고 싶어했고 좋아했던 일은 어떤 것이 었나?』 내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것은 해변에서 파도 소리를 듣는 일이 었지.

『그러면 내 충고를 한 번 따라 보겠나?』 어린아이같은 일이었지만 별다른 대안도 없고, 희망도 없고 해서 친구의 충고를 듣기로 마음 먹은 고든은 친구가 준 처방전 네 장 을 가지고 어린 시절 자주 놀러 갔던 해변으로 갔습니다. 아침 아홉 시에 첫번째 처방전을 펴 보았습니다.

『자네가 좋아하는 파도 소리, 갈매기 소리를 잘 들어 보게.』 우스꽝스럽지만 바닷가에 앉아 어린 시절에 듣던 파도 소리, 갈매 기 소리, 자연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열두 시에 두번 째 처방전을 폈습니다.

『이제 자네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면서 참 행복했다고 기억 되는 순간들을 생각해 보게.』 그는 바닷가에 앉아서 행복했던 추억들을 하나씩 떠올렸습니다. 그 러는 가운데 인생이 꼭 슬픈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느낌을 받 았습니다.

세 시에 세번째 처방전을 펴 보았습니다.

『자네 인생의 동기와 의미를 검토해 보게.』 그는 나는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는 명 예를 위해서, 이름을 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박수 갈채를 받기 위해서 글을 쓰고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에 미쳤습니다. 갑자기 마음 속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고 헛되고 헛된 내 이름을 위해서 발버둥쳤구나. 내 인생 의 동기가 한참 잘못되었구나 하는 깨달음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 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녁 여섯 시에 마지막 네번째 처방전을 폈습니다.

『이제 자네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할 시간이네. 자네가 자백해야 할 죄들을 모래 사장에 써 보게.』 이 작가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서가 아니라 제 이기심과 욕망과 출세를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나 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했고 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못했습 니다는 글을 모래 사장에 써 내려갔습니다. 글을 다 쓰고 났는 데 밀물이 들어와 그가 자백한 죄들을 다 지워 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서 고든은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집으로 돌아왔 습니다. 이때가 그의 인생에서 전환점이 된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 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가 때때로 좌절과 실망에 빠질 때 부활의 능력으로 새 힘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비관이 아닌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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