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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하는 교회 (롬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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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 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가 민족앞에 수행해야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거창하게 민족이라고까지 할 것도 없이 교회가 다른 사람 앞에, 혹은 이웃과 형제들에 게 라는 말로 바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을 강한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 하는 '강한 자'라는 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하는 말입니다. 육체적으로 힘이 세다던가 세속적인 면에서의 강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건강 한 영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어서 고난을 잘 인내하는 힘이 있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런면에서 교회는 강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내와 고 난에 동참한 그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에 비 하여 강한 자들입니다. 그들보다 영적조건을 잘 갖추고 있고 그들보다 더 잘 참으며 그들이 갖지 못한 구원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될 것입니다. 강자의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교회는 이웃과 세계에 대하여 한때 제왕처럼 군림했을 때도 있었습 니다. 중세기에는 교황이 나라들을 지배하고, 교회들이 큰 세력과 막대한 재 산을 소유하며 교회의 법을 가지고 인간을 정죄하고 파문시키는 큰 힘을 가 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막강한 힘을 그렇게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교회는 마땅히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만 했다고 그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가르치고, 가르친대로 살며,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 입니다.

교회는 또한 마땅히 예언자적인 책임도 감당하여야 합니다. 불의를 규탄 하고 독재에 항거하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싸워야 하지만, 그 정의감은 소 외계층을 감싸고 위로하는 사랑으로 발전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사회 모든 계층간에 불화와 반목을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사명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현대사회에서 교회가 해야할 일은 다른 무엇보다 백성을 위로하는 일입 니다. 현대인들은 높은 지적수준을 갖추고 있어서, 알 것은 이미 다 알고 있 습니다. 그들은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짐이 너무 무겁고 많 은 사람들은 너무 피곤하고 지쳐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왕 의 권위도, 스승의 훈계도, 예언자의 규탄도 아닙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 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사랑과 넓은 아량으로 위 로하고 돌보아 주는 일일 것입니다. 민족을 위로하고 이웃을 위로하는 역할 이 가장 필요한 때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에게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습 니다. 지금 이 백성이 얼마나 피곤하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지쳐있느냐 그러 니 너는 가서 그들을 위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위로는 모든 사람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 한국의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피곤에 지쳐있습니다. 모두가 격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부유하게 잘살려는 욕망이 한도, 끝도 없이 높아, 그것을 달성하려고 달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은 모두 지쳐 있습니다.

일관성 없는 정책들, 급변하는 여러가지 상황, 공연히 쌓이는 스트레스, 치열한 경쟁의식과 그로인한 불안감, 거기에다 숨막히는 공해와 교통지옥, 초조감.긴박감.조급함..... 이런것들이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면하고있 는고통들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6.25와 같은 끔찍한 민족의 상처를 지니고 있고 세계가 화해무드에 들떠있는 이때에도 아직 냉혹한 분단상황속에 있습 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피곤하고 불안한 사람들이 어디 있 습니까 물론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희망을 달성 하기 위하여 우리는 수십년을 줄곧 뛰어와서 지금 숨이 턱에 닿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교회에게 명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이 백성을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을 기쁘게하는 자들이 되지말고 남을 위로 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진실로 이 때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인 교회와 성도들에게 이 일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사 실 어떤면에서는 성도들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한국사람이요, 우 리라고 약자가 아닌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더 무겁고 과중한 짐을 짊 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는 강한 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요 인내와 고난을 참는 힘이 있는 자들이요, 건강한 영적조건들을 지닌 자들이다. 그러니 공연히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 아라. 너희는 위로를 받는자가 되지말고 위로하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우 리 살기도 힘든데 남을 위로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를 강 한 자라고 하시고 강한 너희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명령 하십니까 첫째, 우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모든 것을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네가 지닌 것 중에서 나에게서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는데 사 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그 하나 님은 결국 그 아들까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을 달라고 하겠습니까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부터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아들까지 주셨는데 이제 우리가 무 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이제 내게 아무 염려없다.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남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하겠다'.... 그렇게 결심을 합시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주안에서 아무 것도 부족함이없는 사람들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생명을 잃으면 모든 것이 다 무익한 것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잃었던 데서 찾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받으려고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남에게 주는 삶을 살아야 될 것입니다.

둘째, 남을 위로할 때 그 위로를 자기도 받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하고 하였습니다. 아무 리 슬픈 사람도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될때 자신이 먼저 위로를 받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에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 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란 무엇입니까 이 말의 뜻을 해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습니다.

위로란 우선, '슬픔을 경감시킨다'는 뜻입니다. 어떤 말이 슬픔을 경감시 키는 위로일까요 남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이 남을 더 슬프게한 경우는 없었읍니까 '위로는 슬픔을 덜어 주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를 그렇게 위로하십니다.

다음으로 위로란, '권장하는 일입'니다. 무엇이든 강제로 하면 반발심을 사기 쉽습니다. 세상에 바보아닌 다음에야 강제로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일일수록 스스로 하도록 권장해야지 강압적으로하면 좋은 일 을하고도 피곤하며, 뜻대로 되지않을 때가 많습니다. 선한 일이 억지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3:17)고 하였습니다. 아 무 유익되지 않을 일을 왜 하겠습니까 그러나 즐거움으로 하게되면 사람이 많은 일과 큰 수고를 하고도 감사와 기쁨을 느끼고 그 일로 만족과 위로를 받게 됩니다. 위로는 권장입니다. 강제가 아닙니다.

또한 위로란 '법정 조력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변호인으로서 곤경에 처한 이를 변호해주고 그 입장을 해명해주고 피고의 중재자로 혹은 대언자로서 편을 들어주고, 그리고 탄원한다는 뜻까지도 포함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 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라고 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위로란 '분노를 진정시킨다', '원조를 받는다', '위문한다' 또는 '책임수행을 격려해 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결국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이며 사랑을 실천하고 생활속에 적용하는 것입니 다. 민족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백성들이 힘과 용기얻어 모두분연 히 일어나 어려운 시대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난국도 교회가 백성을 '위로'하는 사명을 잘 감당할 때에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위로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필요합니 다. 그러면 이 일을 누가 해야 합니까 우리 '강한 자'들이 해야 합니다. 민 족을 위로하는 교회가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째로, 참된 위로는 사실상으로는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위로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위로의 성령'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 것은 위로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원래 이 말은 '옆으로 부른다'는 말입 니다. 성령이 그 누구에게 가까이 오셔서 다정하게 말씀하여 주신다는 뜻입 니다. 성령이 그렇게 역사하실 때 슬픔이 사라지고 즐겁게 되며, 불안이 없 어지고 평안케 되며, 분노가 진정되고 용기와 믿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놀라 운 도움이 임하여 자기의 사명과 책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십니 다. 성령은 내 옆에 가까히 오셔서 위로하시고 속삭이시며 도우시고 힘을 내 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서' 두려워 하지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화 함께 있으매 아 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 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1) 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고 거기서 1년 6개월을 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성령 으로 교회에 역사하시고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백성을 위로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위로는 어디까지나 성령의 역사로 되어야만 합니다. 위로는 값싼 동 정이 아니요, 과잉보호도 아니요,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아니요, 단순한 인도주의도 아닙니다.

어느 큰 공업도시의 후생사업국 여직원이 빈민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거기 12살된 절름발이 소년이 살고 있었는데 이지역의 한 정형외과 의사에 게 간청해서 그를 고쳐주었습니다. 수술을 받고 열심히 치료를 한 결과 정상 인 같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간 후 여직원은 우연히 그 소년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을 죽이고 지금 감옥에 서 형기를 보내고 있습니다는 매우 실망스러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 여직원은 '내가 그에게 걷는 법만 가르쳤지 그가 걸어가야 할 곳을 가르치 는 일을 그만 잊고 있었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6.25 이후 우리나라에 많은 은혜와 위로를 내려 주셨습니다. 폐 허의 잿더미 위에서 오늘날과 같은 번영을 이루어 주셨고, 가난과 헐벗음과 굶주림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게 하여 주셨습니다. 걷지 못하는 불구의 자리 에서 스스로 걷게 된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 발을 가지 고 어디로 향해 걷고 있습니까 걸어가야 할 곳을 바로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혹시 지금 우리는 아주 잘 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참된 위로와 사랑은 발만 고쳐 주 는 것이 아니고 그 발로 가야 할 바른 길을 가르쳐 주고 인도하여 주는 일 인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을 위로하는 교회의 진정한 사명입니다. 모두 이 사명 잘 감당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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