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인(義認)의 결과 (롬 05:1-11)

첨부 1


사도 바울은 스스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 택정된 자라고 말했다 (롬1:1).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한 후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말했다(1:16-17). 즉 구원을 의인(義認)과 연결시켰다. 인간은 예외없이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또는 비정상화됐다(1:18-3:20). 인간의 이 죄 문제와 그 결과로서의 죽음의 문제, 곧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 바울의 최대 관심사이다. 인간은 자기 나름의 갖 가지 방도, 방법 즉 [노모스] 를 만들어 그것으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노력했고 또 노력하고 있다. 인간이 제아무리 종교, 철학, 과학, 마술 등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의 자비와 은총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인간 세상에 보내시어 속죄의 제물, 화목의 제물이 되게 하셨고 따라서 우리의 죄 값을 완전히 치르게 하셨다. 이렇게 우리가 한 것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께서 공짜로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셨으니 이것이 바로 복된 소식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단지 그 복음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의인이라는 용어로써 설명한다. 즉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무죄로 인정하시고 당신과의 관계를 정상적인 것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3:21-31). 바울은 그의 논지를 입증하기 위해서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사건을 실례로 끌어왔다(4:1-25). 즉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아무 행함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얻는 의인(義認)의 새 법을 말한 다음 제 5-8장에서 그 결과는 어떤 것인가를 길게 설명한다. 오늘의 본문은 그 부분의 서론 격인 대목이다.
Ⅱ. 본문확정(원문비평)
이 부분에도 사소한 여러 가지 원문비평적 문제가 있지만 오직 세 가지 중요한 것만을 취급하기로 한다.
< 5:1 >
[에코멘](`우리가 가진다') 이라고 되어 있는 사본과 역본과 교부들의 인용이 있는가 하면 [에코-멘](`우리가 가지자') 이라고 되어 있는 것들도 있어서 문제가 된다. 한글개역판은 후자를 번역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근자의 권위 있는 비평판 헬라어성경들과 번역들이 모두 전자를 택하고 있다. exomen을 지지하는 사본들은 A B C D등 대문자 사본들과 많은 소문자사본들과 고대역본들과 교부들의 인용구들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시내산 사본(B)의 원본과 바티칸사본(B)의 원본이 이 읽기(reading)를 지지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것들의 권위를 인정하여 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러나 1 B2 F G 0220등의 대문자사본과 많은 소문자사본들과 고대역본, 교부들의 인용구들이 exomen을 가지고 있는 바 시내산사본의 제 1 수정자와 바티칸사본의 제 2 수정자가 exomen으로 고쳤다는 것은 그보다 더 낡은 더 권위 있는 사본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며, 그 밖의 많은 것들이 그 읽기를 채택했다는 것 역시 그 전통이 유력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UBS Greek New Testament 편집자들이 만장일치로 exomen을 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 5:2 >
(1) [테 피스테이]라고 된 것들과
(2) [엔 테 피스테이]로 된 것들과
(3)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으로 분류된다.
(1)을 지지하는 대문자사본 중에 시내산사본 원본( )과 제 2 수정자( 2)가 있고 C 와 많은 소문자사본들이 있는 바, 만만치 않은 권위를 가진 것들이다. 그와 맞서서 (2)를 지지하는 것들은 1 A와 두 개의 소문자 사본, 고대역본 하나,교부 두 사람이다. 이것들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진 것들이다. (3)을 지지하는 것들은 대문자사본 B D F G 0220과 네 개의 고대 역본과 다섯 명의 교부들이다. 이것들 중 특히 B가 들어 있으니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UBS 학자들은 그것을 괄호에 넣고 C 급으로 처리했다. 즉 확정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 5:6 >
(1) eti gar... eti라고 된 것. (2)eti gar...(없음) 으로 된 것. (3) eige...eti라고 된 것. (4)eis ti gar...eti라고 된 것. (5)eis ti gar....(없음) 라고 된 것. (6) (없음). . . .(없음)으로 된 것. 이렇게 대강 여섯 가지로 분류된다.
(5)를 지지하는 사본은 오직 D1 하나뿐이니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6)을 지지하는 것도 일과표 몇 개에 불과하니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1)에서 (4)까지는 각각 상당한 권위를 가진 증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열을 쉽게 가리기가 어렵다. (1)은 A C D등이 (2)는 D2 등이 (3)은 B와 여러 고대역본과 교부 어거스틴이, 그리고 (4)는 F G와 Old Latin역 몇 개와 여러 교부들이 지지한다. 그래서 결국 UBS Greek New Testament 편집자들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C급으로 취급하였고 (1)을 본문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다시 말해서 확실하게 말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Ⅲ. 논리적 구조
바울이 로마서를 쓰는 목적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주장이 있다.
(1) 첫째로 스페인으로 가기 위하여 로마 교회의 협조와 지원을 받으려는 심산으로 자기 신앙의 도리를 설명하여 그들을 설득하려고 했다는 것이며,
(2) 둘째는 클라우디오 황제 추방령으로 인해서(AD. 46) 유대인들이 로마성에서 추방당할 때 유대인 크리스천들도 같이 추방당하였고, 클라우디오가 죽고 그 추방령이 해제됨으로(AD.54) 유대인들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게 되면서, 로마에 남아 있던 이방인들의 교회가 다시 돌아오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느냐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 편지를 통하여 로마의 이방인 교회가 교만하지 말고 유대인 교인을 잘 받아들이라는 권면을 하기 위해서 썼다는 것이다(롬 9-11장).
(3) 셋째는 예루살렘으로 구제금을 가지고 가야 하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심각한 위험들을 느끼면서, 로마에 있는 유력한 유대인들과 교회에게 자기를 위한 기도를 부탁하고, 어떤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썼을 것이라는 설이다. 로마서 저술의 목적이 그 어느 것이든지간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로마에 있는 독자들을 설득 내지는 설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서의 특징은 논리적으로 이론을 전개하며 수사학적인 기술을 동원하여 자기의 사상을 설득력 있게 피력해 나간 일이다. 로마서 전체에 [가르] (`왜냐하면')라는 접속사가 무려 143번이나 사용됐다는 것은 틀림없이 바울이 먼저 어떤 주장을 말한 다음에는 그것이 어째서 그렇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는 것이 로마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우리의 본문 5:1-11 가운데도 가 4회나 사용되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논리적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5:1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은즉 (dikaiothentes oun ek pisteos)은 4장까지의 논지를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며, 다음에 나오는 사실의 원인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복음을 믿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죄로 선언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인 것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그 결과로서
(1) 이제 우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는 죄 때문에 막혔던 비정상 관계가 사라지고 한 마디로 평화가 깃들었다. 서로 원수의 관계도 아니고 우리를 진노하시던 하나님의 마음도 변하셨고, 어떤 부채관계도 사라지고, 이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모자람이나 어색함이나 서먹서먹함이 없다. 그렇게 된 데는 반드시 어떤 원인과 경로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로 표현됐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데는 확실히 원인이 있다. 우리의 힘이나 꾀나 노력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사람 예수가 되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고 그가 대망의 메시아(그리스도)로 활동하시다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들의 주('나의 주 나의 하나님', 요20:28)가 되어 주신 사건 때문이다.
< 5:2 >
(2) 둘째 결과는 우리가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은 것이다. 문자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이 은혜에로 나아감 ([프로스아고게], =right to enter)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에스케카멘] 은 현재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우리가 믿는 순간에 가진 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벌써 그 속에 존재하고 있다([에스테카멘], ). 우리가 이 은혜를 받은 상태에 들어가는 데는 하나의 방편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 우리의 태도는 그것을 받느냐 안 받느냐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믿음은 곧 하나님의 베푸심에 대하여 예 하고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화평을 소유한다는 일과 은혜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것은 결국 같은 사건을 두 가지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의인(義認)의 셋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일이다. [카우코메다] (`즐거워한다')는 말은 '자랑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얻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도 된다. 우리가 무상으로 칭의를 얻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니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며 그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전에는 절망 중에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이 생겼다. 그래서 즐거워하며 자랑하고 있다.
< 5:3-5 >
의인의 셋째 결과가 기쁨이라고 말한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가 흔히 사용하는 자문 자답 방법을 여기서도 도입한다. 칭의를 얻은 사람은 소망 중에 기뻐한다고 했는데 정말 언제나 기쁘다는 말인가라고 자문하는 것 같다. 거기에 대한 답변 격으로 4절까지 설명을 붙였다. 그러니까 3-4절은 기뻐하는 문제를 별도로 다룬 것으로 괄호 안에 넣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기뻐한다는 것은 감정 면에서 좋고 평안하고 걱정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칭의를 얻은 크리스천의 기쁨은 환난과 역경과 고통 속에서도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환난 중에도 기뻐하는 이유를 3절 하반절 이하에서 지적한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 사람이 지.정.의(知.情.意) 세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살기에 감정을 가지고 기뻐하는 동시에 지(知)를 가지고 판단하여 앞으로 될 것을 생각하면서 의지(意志)적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지금의 환난은 환난이고 그것이 아프고 쓰라린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감각적으로 아픔을 느끼며 슬퍼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의 환난은 우리에게 인내심을 만들어 준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인내심이 없는 사람은 사사건건에서 참아내지 못하여 넘어진다. 인내가 얼마나 귀한 보배인가. 인내를 계속하는 가운데 연단을 이룩한다. 쇠를 달구고 식히고 때리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강철이 된다. 그래서 쓸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가치 있는 존재는 합격품으로서 모두가 흠모하는 존재, 존경하는 존재, 귀하게 쓰임 받기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 희망이 가득한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현재의 환난이 괴로울찌라도 의지적으로 기뻐하고 자랑한다는 말이다.
< 5:5 >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소망에 대하여 계속 설명을 붙인다. 소망은 부끄럽게 아니한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the hope' 즉 다른 일반적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시는 소망을 가리킨다. 그 소망은 우리에게 보증된 것으로서 희미하거나 허황하거나 공수표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알맹이는 없이 껍질만 있어 실망을 주거나 창피하게 해 줄 그러한 소망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째서 그런가 바울은 그 이유를 [호티] (for)라는 접속사 이하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부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지만 보혜사이신 성령, 곧 하나님이신 성령이 우리에게 와 계시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넘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소망이 무효가 되거나 실패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어떤 곤경에 빠질지라도 성령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건져 주시고 그 소망이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부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그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셨다는 말일 것이다.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전인적(全人的)으로 임하는 것이지 마음이라는 인간의 한 부분에 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5:6 >
5 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였으므로 6절 이하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사랑을 설명한다. 우리가 죄로 병들어 연약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길 줄 모르는 경건치 않은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요3:16).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생명을 주실 정도로 하셨다는 것이다. '기약대로'([카타 카이론], ) 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때를 정하시고 그 계획대로 역사를 운영하신다.
< 5:7 >
여기서 바울은 또 속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스도가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이고 그것이 사랑의 행위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고 말이다. 그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설명을 붙인다. 사람이 죽는 것처럼 싫어하는 것이 없다. 그래도 늙거나 앓거나 사고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 밖에 죽음의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의인을 위해서 누가 죽는다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다(molis). 여기의 '죽는 이'라는 말은 [아포다네이타이]라는 미래형으로서 그런 일 일어나기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다라고 하여 [톨마]라는 현재 동사로써 원칙론을 말한다. 혹([타카],taxa)이라는 말도 역시 가능성의 희박함을 말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을 위해서 감이 죽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것뿐이다. 만일 의인이나 선인을 위하여 누가 자기 목숨을 버린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이겠는가! 그런데 우리들 크리스천들이 받은 사랑은 얼마나 더 큰 사랑이고 얼마나 성격이 다른 사랑인가를 8절에서 설명한다.
< 5:8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죄인은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는 원수라고도 할 수 있는데,즉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닌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그 사랑의 도수가 얼마나 높으냐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 5:9 >
여기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의인(義認)의 결과를 재론한다. 위에서 이미 의인의 결과로서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고 은혜의 상태에 들어가게 됐고 기쁨을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다시금 칭의의 결과를 논하며 첨가한다. 예수가 피를 흘려 죽으신 엄청난 사랑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인을 얻었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인간의 근본문제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이고, 그 진노를 풀어드릴 방도가 없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무죄선언을 받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었으니 하나님의 진노는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바로 의인의 또 하나의 결과로 나타났다. 여기서 구원 얻는다는 말이 [소데소메다]라는 미래직설법으로 나왔으니 신자의 지금 이후의 삶 전체를 내다보면서 한 말인 것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풀려난 그러한 구원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 5:10 >
여기서는 의인(무죄선고)이라는 법정적 술어(forensic term)를 떠나서 화해(和解)라는 개념을 새롭게 들고 나온다. A와 B의 관계가 깨어지고 서로 원수가 되었을 때 중재자가 나서서 쌍방의 중개 역할을 함으로 사이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원수였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으심을 통하여 이제는 하나님과 화해한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칭의 사건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었으니(하나님에게 무죄선언을 받았으니) 그 또 하나의 결과는 그의 사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의 생명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가 된다. NRSV는 이 부분을 having been recon ciled, will we be saved by his life. 우리가 의인을 얻었으니 우리의 미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생명을 받아서 영원히 사는 그러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일 것이다.
< 5:11 >
2절에서 바울은 의인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같이 차지할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고 자랑한다고 말한 바 있다. 11절에서는, 10절에서 말한 생명의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 가지를 더 첨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화해된 우리들이기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2절에서는 소망을 두고 기뻐한다고 말했고, 여기서는 예수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이다. [카우코메노이]는 현재 중간태 분사로서 10절에 있는 [소데소메다] 에 종속되는 동작을 말한다. 즉 구원을 얻을 것이며 동시에 기뻐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후대의 몇 사본은 [카우코메노이]를 [카우코메다]로 수정하여 위의 aothsometha와는 무관하도록 시도했다.
Ⅳ. 사 역
1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결과,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이미 들어 서 있는 이 은혜에로 믿음에 의해서 나아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소망을 가지고 기뻐합니다.
3 그뿐 아니라 또한 환난 중에도 우리가 기뻐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4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룩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5 그리고 그 소망은 부끄러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 마음에 이미 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불경건한 우리를 위해서, 정하신 때에, 그리스도가 죽으셨습니다.
7 의인을 위해서 누가 죽는다는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혹시 선한 사람을 위해서 감히 죽을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들이었을 때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9 이렇게 이제는 그의 피로써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또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출될 것입니다.
10 우리가 하나님께 원수였을 때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그와의 화해를 얻었으니, 화해가 된 이상 , 진일보(進一步)하여 그의 생명을 누리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11 그 뿐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화해를 얻었으니, 그를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Ⅴ. 메 시 지
바울은 인간이 예외 없이 다 죄인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생각하며 그 방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급선무요 중대사는 구원이다. 바울은 많은 경험과 해박한 성경 지식과 세상 학문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인간 구원의 문제를 누구보다도 밝히 깨달았고 로마서에서 그것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3:21이하에서 집중적으로 농도 있게 취급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사건은 지극히 신비하고 우주적인 일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계와 이 세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초시간적, 초월적 사건이기도 하기 때문에 구원을 이것이라고 하며 눈 앞에 끄집어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세상에서 경험을 통하여 얻은 여러 가지 유비(類比)를 가지고 기독교 구원을 설명해 보았다. 의인(義認)은 로마나 유대 사회 도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법정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며 술어이다. 즉 죄인이 판사 앞에서 무죄선언을 받는 일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것을 죄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받는 무죄선언에다 비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가 다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판사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무죄선고를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 파생되는 일들이 또 많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를 찾을 수 있다.

1. 우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이가 평화스럽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빚진 것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음이 떳떳하고, 이렇게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가지 않는 평온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얼굴도 평온하다. 하나님도 만족이요 인간도 만족이다. 그것이 바로 샬롬이요 평강이다.

2. 둘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마음에 평강을 누린다. 칭의를 얻었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 자신의 힘이나 공로나 지식이나 계획으로 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즉 시작부터 끝까지 몽땅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해서 그의 은혜이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곧 그 은혜 속에 이미 들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 동참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다. 그 소망은 없어지거나 우리를 창피하게 만드는 그런 소망이 아니다. 우리의 기쁨은 얄팍한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다.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기쁨이다. 환난을 겪어야 하고 핍박과 순교도 당할 수 있지만 그래도 기뻐할 수 있는 그러한 기쁨이다.

4. 하나님과 화해된 상태가 바로 구원이기에 이제는 마음놓고 하나님의 생명을 만끽하는 생활을 즐기며 자랑하며 살 수 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장중에 있고 우리가 그와 같이 누리는 생명을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빼았을 수 없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