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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스러운 제자/야고보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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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배경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였다. 세베대의 아들이었으며 직업은 요한과 같이 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부르실 때에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좇아 갔다. 그는 큰 배도 소유했으며, 일꾼들도 소유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동생 요한과 더불어 당대의 대제사장 가야바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배경을 중심으로 그가 비록 고기를 잡는 사람이었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위치에서 재산도 있었으며, 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야고보는 어느날 주님께서 다른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부르심이 들려 왔을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아 나섰다. 그로부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의 전 생애를 바침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2)인물과 성격
성경은 야고보와 요한을 항상 같이 다루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꼭 형제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다른 형제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였기만 성경은 이들을 언제나 같이 다루고 있지는 않다. 야고보와 요한이 늘 같이 행동한 것으로 복음서에 소개되어 있는 것은 이들이 아주 잘 어울리는 형제들이면서도 기질이 비슷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 3:17에 예수님은 이들 형제에게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이들은 불같은 성격을 가졌던 형제였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걸어가는 대단히 비장하고도 고독한 행진을 하고 계셨다. 예수 일행이 길을 가다가 잠시 쉬어가기 위해서 머물 수 있는 곳을 알아 보기 위해 예수님은 먼저 사자를 사마리아인의 촌에 들어가서 살펴보게 하셨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달가와 하지 않았다. 이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등장해서 “예수님을 괄세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불벼락을 내려서 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다 해치워 버립시다”라고 제안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두 형제는 천부적으로 불같은 성격을 다같이 가지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야고보는 열정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이 열정이 있기에 화를 내어도 무섭게 내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0-21)”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께서 정권을 잡으셨을 때 그의 아들들로 보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마 20:22)”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말씀하시는데 이 제자들은 다가올 영광만을 생각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왔는가 우리는 영광을 탐하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것을 주님은 이루어 주실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광을 원하기 전에 주님께서 나에게 만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이라는 삶을 허락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우리는 달게 받을 수 있을까 두 형제와 그 어미가 예수님께 청한 소식을 전해 들은 나머지 열 제자는 모두 분하게 생각했다. 똑같은 욕구가 다른 제자들에게도 다같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도 자신이 높아지고, 앞서려는 끈질긴 인간적 야망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높아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을 많이 갖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해야할 진정한 위치는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는 자리이다. 성경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높아지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것이 루시퍼의 죄악이었다.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계급의 사람도 바리새인이었다. 그들은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좋아하고, 시장에 가면 문안 받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가슴을 내어놓지 못하고, 이웃의 발을 닦기 위해 무릎을 꿇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교훈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에서도 그런 모습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도 그런 모습은 아직도 굳건히 자리하고 있지 아니한가
야고보는 그가 열정적인 기질을 가졌기에,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자연히 이 사람은 앞으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좋은 자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잘못 되어지면 남을 짓밟는 선하자 못한 의미의 지도자가 될 수 있지만, 잘 사용하면 그는 탁월한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지도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훈련시킨 사람은 야고보를 포함한 베드로, 요한이었다.
이 세 사람이 제자의 핵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사람은 장차 초대 교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로서 훈련를 받은 것이고, 또 실제로 지도자가 되었다. 사도행전에 들어가면 그는 이제 예루살렘의 영광스러운 지도자로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광 스러운 지도자였기에 지도자로서의 댓가를 지불하는 삶을 살게 된다.
3)생애와 죽음
야고보는 어떤 특별한 재질이나 업적은 갖지 못한 제자였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그곳에 야고보도 함께 있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면서 부활의 위대한 교훈을 베푸실 때,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형용할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할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기도하실 때 야고보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야망이 우리는 잘못되었다고 비판만 할 수 없다. 그는주님을 향해서 야망을 가졌기 때문에 주님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졌던 것이다.
주님이 있는 곳에 언제나 그는 있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어간다. 우리가 남을 짓밟는 야망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올바른 진리에 대한 야망을 가지지 못하는것은 더 큰 문제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선한 야망을 가져보라.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장 신실하게 받들며,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가장 귀한 일을 하고 싶어하는 선한 의미의 야망을 갖는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는 지중해 영역까지 가서 전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심지어 스페인까지 가서 전도했다고 한다.
그는 실로 많은 지역을 뛰어 다니며 부지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모든 힘을 다했다. 그는 제자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다. 때는 A.D. 44년이었다. 성경에 야고보처럼 죽음이 명확하게 표현된 제자들이 없다.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행 12:1,2)” 헤롯 왕은 교회 중 몇사람을 해쳐야만 기독교가 더 이상 세력을 펼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야고보를 죽인 것이다.
유대인들의 대다수가 기독교의 전파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야고보를 희생의 제물로 삼은 것이다. 야고보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를 대표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말씀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 아닌, 요한의 형제 야고보라고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경에서 처음으로 순서를 바꾸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기록한 것이다. 그는 잔인하고 처참한 죽음을 통해서 자기의 생애를 마치게 된다.
요한은 어떠한가 제자들 중에 제일 오래 살았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야고보는 일찍 죽게 하시고 요한은 가장 오래 남겨 두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하나님 보시기에 두 사람의 삶은 다같이 귀중하다. 우리는 죽음의 형태를 놓고 누가 낫고 누가 덜하다는 식의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성도의 죽음을 하나님은 모두 귀하게 보신다. 그의 죽음은 선교의 위대한 밑거름이 되었다.
4)문제 제기
야고보의 삶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육신의 욕망을 극복해야 한다.
그가 육신적 야망을 극복한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는 주님을 바라 보았다. 우리도 끝까지 주님만 보아야 한다.
그는 주님을 바라 보면서 계속 따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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